제529화
제4편 휴가 준비 (2)
좀비 거인에게서 마지막 파편을 꺼낸 뒤, 나는 하늘을 나는 언데드에 올라타 공국으로 향했다.
물론, 중간에 황제가 달려오는 벌판을 지나가기도 했다.
황제는 늑대 인간 마물 왕을 죽이고, 좀비 거인을 향해 말을 달리고 있었다.
반 정도 남은 병력과 기사단과 함께 말을 달리는 황제,
언제나처럼 투레 백작은 선두에 선 황제와 달리, 맨 뒤에서 기사단을 따르고 있었다.
매번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지만, 덕분에 일은 쉬워졌다.
나는 먼 하늘에서 아래를 향해 검기를 쏘아냈다.
나는 황제는 물론 선두의 기사단을 모두 제거하기 위해 검기를 촘촘하게 쏘아냈다.
이어서 확인도 하지 않고, 그냥 공국을 향해 날아갔다.
이런 식으로 공격했을 때, 한 번도 황제가 살아남는 일은 없었으니까.
물론 제국을 지배했던 황제로서는 어이없는 죽음일 터였다.
하지만, 이제는 일대일로 마왕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나였다.
지금의 나에게는 밖에 나와 있는 황제와 기사단은 지나가다가 가볍게 손쓸 정도의 적일 뿐이었다.
그렇게 반나절을 날아, 공국에 도착했다.
나는 언데드를 풀어놓고, 공국의 왕성을 방문했다.
언제나처럼 나는 바로 대공녀를 만날 수 있었다.
대공녀는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는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공녀는 반복되는 삶 동안에 매번 보여주던 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의아한 표정. 아니, 조금 다른 표정인가.
어쨌거나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 뒤에 대공녀가 할 말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파편을 꺼내놓았다.
“이 파편들을 검으로 복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 말에 대공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쉬운 게…….”
이어서 나는 대공녀의 말을 가로챘다.
“그리고, 이 지팡이를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가슴에서 나무 지팡이를 꺼내 대공녀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건네준 지팡이를 보고 대공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건, 보통 유물이 아닌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편들과 같은, 유물 이전에 만들어진 신의 성물입니다.”
“이걸 왜 저에게?”
나는 의아해하는 대공녀를 보며 작게 웃었다.
“선물입니다. 그동안 도움을 받은 것에 감사하는.”
이건 얼마만의 편한 웃음인지, 가늠이 안 될 정도였다.
하지만, 대공녀는 눈을 찡그렸다.
“그런 웃음은……. 백작님이 처음 보여주는 웃음인데요.”
내 표정이 이상했나?
오랜만에 편하게 웃은 것인데.
반복하는 삶 때문에 제대로 표정이 나오지 않게 된 걸까?
“그 웃음은……. 마치 멀리 떠나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아, 그건 아니었다. 반대로 너무 솔직하게 표정을 지은 듯했다.
본심이 들키다니.
마음이 너무 풀어진 모양이었다.
정신을 차려야지. 잘못하다가는 발레아에게 들킬 수 있었다.
나는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대공녀에게 말했다.
“그보다 잠깐 내가 주는 마나를 거부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나는 전에 했던 것처럼 대공녀의 새로운 능력을 깨웠다.
[유물 소통]
나는 눈을 감고 새로 얻게 된 능력을 음미하는 대공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함께 여행했던 추억과 대화들, 예절 수업과 유물을 수리했던 기억들까지.
삶을 반복하면서 내게는 한참 오래된 기억으로 변해버렸지만, 그래도 기억들은 모두 남아있었다.
나는 속으로 다시 한번 대공녀에게 감사했다.
지팡이만이 아니라, 이 능력 각성까지 모두 그녀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잠시 뒤,
대공녀는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놀라는 게 당연했다.
들고 있는 지팡이가 전과 다르게 느껴졌을 테니.
다만, 내가 대공녀의 능력을 깨운 것은 대공녀에게만 특혜를 준 것이 아니었다.
반복되는 시간 동안, 조직을 만든 용사, 현자라고 불린 용사에게서 얻은 능력도 많이 성장했다.
전에는 그 능력으로 한 사람의 능력만 각성시킬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단지, 대공녀는 내 작별 선물을 처음으로 받았을 뿐이었다.
그녀가 처음 선물을 받은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 파편들을 검으로 만들어주세요. 선물도 미리 드렸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부탁하려면, 먼저 선물을 주는 게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 뒤에 나는 복구한 ‘전쟁신의 검’을 들고, 다시 마왕이 봉인된 탑으로 향했다.
탑으로 향한 것은 마왕을 봉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옥상에 남겨놓은 언데드로 ‘전송’했고, 바로 호수로 뛰어들었다.
수면 바닥에 나 있는 탑의 문, 관리자 통로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전과 똑같이 수중에 있는 문을 열고, 통로를 지나 탑의 제어실로 들어갔다.
탑의 에고는 전과 똑같은 말로 탑이 폐쇄된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나는 탑의 에고에게 내가 예비 에고의 관리자라는 것을 알려주었고.
탑의 에고는 내 말에 똑같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12번째 예비 에고가 사용자를 관리자로 지정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본 에고도 예비 에고의 결정을 받아들입니다.]
이제, 내가 에고에게 탑을 개방하라고 하면 봉인으로 향하는 마나가 멈추게 되고, 봉인이 풀리기 시작할 것이다.
여태껏 매번 반복한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말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나는 이 탑의 마나를 다시 회복시킬 생각이다.”
내가 다시 마왕을 재봉인한다고 해도, 탑의 마나가 없으면 봉인이 유지될 리가 없었다.
[봉인으로 소모된 탑의 마나는 막대합니다. 자체적으로 회복하려면 수백 년, 인간이 만든 유물의 마나로는 아예 불가능합니다.]
그건 잘 알고 있었다. 전에도 들었었고.
아무 유물이나 가능했다면, 회귀하자마자 유물을 들고 찾아왔을 것이었다.
탑의 에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나를 회복한다고 해도 이미 봉인의 붕괴가 상당히 진행되어서, 현재 존재하는 봉인의 유지는 불가능합니다.]
그것도 알고 있었다.
탑의 마나를 채우기만 하면 봉인이 계속 유지된다면, 내가 진정한 죽음을 각오하고 봉인 정보를 받아들였을 리가 없었다.
에고의 말이 이어지자, 나는 손에 쥔 검을 들어 올렸다.
전쟁신의 검.
이 검은 인간이 만든 유물이 아니었다.
신이 만든 유물.
파편만으로도 수백 년간 끝없이 마나를 쏟아냈던 성물이었다.
내가 봉인을 하기로 결심한 뒤에, 제일 먼저 이 검을 복구시킨 것도 이 검으로 탑의 마나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검을 보여주자, 계속 떠들던 에고가 조용해졌다.
철컥.
대신 제단 위로 납작한 구멍이 생겨났다. 칼날 두께와 길이에 딱 맡는 구멍이었다.
굵은 구슬 앞, 제단 위로 검을 꽂아 넣기에 딱 좋은 구멍이 생겨난 것이다.
나는 그 구멍에 검을 밀어 넣었다.
우우우우웅.
검을 밀어 넣으니, 작은 진동과 함께 검에서 마나가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그 마나는 제단을 통해 이 탑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아……. 힘이……. 마나가…….]
검을 밀어 넣으니, 바로 정령의 늘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바로 검에서 손을 뗐다.
손을 떼자 더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대신 제단 위로 반투명한 창이 나타났다.
전에는 창에는 봉인이 풀릴 시간을 나타냈지만, 이번에는 충전 예상 시간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간을 계산해보니, 마왕이 봉인을 풀기 전에 다 채워질 것 같았다.
뭐, 시간이 좀 부족해도 상관은 없었다.
그래봤자, 수십 년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수백 년의 시간 중에 수십 년이 줄어든다고 내게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뭐라 해도 나는 들을 수도 없을 테고.
수백 년 뒤 벌어질 일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내가 지금 싸우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나도 아예 후손을 방치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작별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여러 대비를 해놓고 있었다.
“급한 준비는 끝난 건가…….”
마왕을 만나기 전,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지만, 그건 사람들을 만나면서 천천히 해도 되는 일이었다.
더구나, 발레아에게는 쉬는 회차라고 말해놓았으니,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나는 제국으로 ‘전송’했다.
제국에 도착한 뒤에 나는 발레아와 함께 2 황자가 수도를 장악하게 도와주었다.
내가 황제와 마물 왕을 죽인 것은 2 황자에게 바로 말하지 않았다.
복수심으로 움직이는 2 황자였다.
정권을 뒤집기 전에 말했다가, 그가 포기해버리면 곤란했다.
내가 마왕을 봉인한 뒤에 우리 왕국이나, 내 영지의 안정을 위해서도 2 황자가 정권을 잡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조직’이 제국을 뒤에서 조종하게 될지도 몰랐다.
물론, 봉인하기 전에 ‘조직’은 최대한 정리를 해놓을 생각이지만, 수백 년간 제국을 뒤에서 조종한 ‘조직’을 전부 정리하기는 불가능했다.
남은 일은 2 황자가 해줄 것이다.
복수할 가장 큰 대상인 황제는 내 손에 죽었지만, 아직 복수할 대상이 남아있었다.
황제를 조종하고, 그를 가두었던 ‘조직’도 당연히 2 황자가 복수할 대상이었다.
며칠 동안 발레아와 나는 제국의 수도 차르마니아를 돌아다녔다.
결혼 뒤에 처음으로 둘만 다니는 구경이자 산책이었다.
사람들이 모든 잠든 밤에 다니는 산책이었지만, 결혼 뒤에 처음으로 둘만 다니는 산책이라 우리는 드디어 신혼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산책이 끝나자, 2 황자는 황궁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산책이라고요? 매일 밤 사람이 죽어 나갔는데요?”
그동안의 이야기를 듣고, 조아나 대주교가 황당한 얼굴로 나와 발레아를 쳐다보았다.
사실, 산책은 아니었다.
2 황자의 요청을 받아 쿠데타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하는 시간이었으니까.
하지만, 발레아도 나도 그 시간은 산책에 가까웠다.
수많은 삶을 반복하기 전에, 발레아도 나도 혼자 해냈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보다 훨씬 강해진 나와 발레아가 같이 다녔으니, 암살이라기보다는 산책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2 황자의 쿠데타는 훨씬 빨리 끝나게 되었고, 나는 황궁을 차지한 2 황자에게 마물 왕과 황제의 죽음을 알려주었다.
2 황자는 내 말에 황당해하고, 허탈해했다.
갑작스러운 말에 2 황자는 내 말을 믿지 못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우리 부부의 산책을 그도 들었으니까.
우리 부부의 산책은 제국 수도에 흉흉한 소문이 돌 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귀족들을 공포에 질리게 했다.
어디에 있건 누가 지키건 간에 무조건 죽어버렸으니.
밀실 살인은 기본이고, 집을 지키던 이들이 모두 사라지기도 했으니, 귀족들이 공포에 질리는 것이 당연했다.
2 황자는 내 말에 무척이나 실망했지만, 나는 그를 성심성의껏 위로해주었다.
새로 복수할 대상을 알려주는 것으로.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발레아와 나는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는 돌아가기 전에 대주교 조아나와 함께하는 마지막 다과 자리였다.
전과 달리, 이번 삶에는 틈틈이 다과 시간을 가진 덕분에 조아나도 우리 부부에게 이런 농담을 건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발레아는 그녀의 말에 미소를 지었고, 나는 대답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새로 얻은 능력은 쓸만한가요?”
내 말에 조아나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나는 대공녀에 이어, 조아나에게도 작별 선물을 줬었다.
반 토막이던 대제사장의 능력을 각성시켜 준 것이었다.
그 덕분에 조아나는 대주교의 계약 능력은 물론이고, 교단의 성물, 용사 미이라의 능력을 제대로 쓸 수 있게 되었다.
일정 지역의 능력을 봉쇄하는 대단한 능력.
혹시나 해서 능력을 각성시킨 조아나를 데리고, 마왕과 싸워보기까지 했던 능력이었다.
덕분에 마왕의 몇몇 능력(어처구니없는 회복력과 부활 등)은 용사의 능력으로 봉쇄나 디버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 내가 마왕을 이기는 것을 포기한 것은 이 능력이 안 먹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제국을 감시하기 위해서도, 교단을 계속 바꾸기 위해서도 조아나의 힘을 키워주어야 했다.
지금은 마왕에게 소용없었지만, 수백 년 뒤에는 달라질지도 몰랐다.
그런 희망을 품고, 나는 조아나와 내 누이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 뒤에 나와 발레아는 내 영지, 샤를 백작의 영지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