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6화
제1편 봉인 선택 (1)
콰아아아앙!
조용하던 탑이 터져 나갔다.
터져 나가는 탑에서 파편들과 함께 사람 하나가 호수로 총알같이 튕겨 나갔다.
촤악!
물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튕겨 나간 사람은 호수에 대각선으로 처박혔다.
콰앙, 첨벙, 첨벙, 첨벙.
이어서 지면과 호수로 떨어지는 탑의 파편들.
파편들이 호수와 섬을 두들긴 뒤에 한 사람이 엉망이 된 섬 위에 내려섰다.
깃털이 내려앉는 것처럼 땅에 내려선 사람은 누더기로 보이는 로브를 두른 남자.
마왕이었다.
로브 사이로 보이는 마왕의 얼굴에는 마나의 충돌로 만들어진 상처가 가득했지만, 그 상처로도 짜증 난 표정은 가려지지 않고 있었다.
마왕은 주변을 둘러보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누더기가 된 옷을 확인했다.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거지?”
마왕은 유치한 함정에 빠져서 갇혀버린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지금도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한순간 같기도 하고, 영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긴, 함정을 판 용사 나부랭이의 능력이라면 회귀, 아니 시간과 관련된 능력일 테니, 가늠이 안 되는 게 당연하긴 했다.
“능력을 되찾을 생각이었는데, 거꾸로 당해버렸지.”
마왕은 그 당시, 아니 자신이 느끼기에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되찾고 싶기는 했지만, 사실은 되찾을 방법도 몰랐고, 되찾을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뭐, 죽여버리면 되지 않을까 했지만, 죽여도 능력이 되돌아올 것 같지도 않기는 했다.
그래서,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이야기를 들어주었었는데, 그게 실수일 줄이야.
‘그런데, ’회귀’ 능력에 이런 능력도 있었나?’
사실 마왕은 저쪽 세상에서도 회귀 능력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
제대로 각성하지 못한 능력도 산더미였고, 실시간으로 덮쳐오는 마물들과 싸우느라 죽고 되살아나는 것에 대해 고민할 시간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시간이 지나, 마물들에게 죽지 않게 된 뒤에는 아예 신경도 안 썼으니까.
그게 방심으로 작용해서 이렇게 함정에 당하고 말았지만, 함정에 대해서는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
나름 재미있었으니까.
다만 함정을 빠져나오니, 그 재미있는 함정을 꾸민 인간이 해골이 되어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지나가 버린 것이다.
당연하게도 마왕은 기분이 안 좋아졌고, 거기다 처음 보는 젊은 놈이 앞에서 헛소리를 지껄이니, 오랜만에 불쑥 화가 나버렸다.
그래서 냅다 내질렀는데…….
“안 죽었다고?”
마왕은 호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전에 웃긴 인사를 하는 인간에게 날린 공격은 지형 파괴용으로 쓰는 기술이었다.
저쪽 세상에서는 초거대 마물을 박살 내거나, 산을 날려버릴 때 썼고, 이 세상으로 넘어와서는 제국이 자랑하는 거대한 성벽을 날려버리는 데 쓴 기술이었다.
신의 유산인 저 탑도 저렇게 박살 났는데, 인간이 살아남다니.
아무리 봐도 신기한 일이었다.
호수를 바라보던 마왕의 시선이 움직였다. 호수 안에서 섬 쪽으로.
그리고.
철벅.
마왕이 보고 있는 물가에서 한 사람이 올라왔다.
물을 흠뻑 뒤집어쓰고, 갑옷이 갈기갈기 찢긴 채로 온몸에서 줄줄 붉은 피를 흘리는 젊은 남자, 알렉스가 올라온 것이다.
나는 멀리서 나를 보고 있는 마왕을 보며 입안에 고인 피를 뱉었다.
퉤.
입에서 튀어나온 핏덩어리가 바닥에 철썩 눌어붙었다.
젠장.
죽을 뻔했다.
이건 다 해골이 되어버린 용사 때문이었다.
내가 마왕에게 이상한 인사를 한 것은 전부 용사 때문이었다.
성격이 나쁜 용사의 기억에 빙의한 덕에 그의 이상한 말투가 옮겨붙은 게 분명했다.
인사 한번하고 죽을 뻔하다니.
사실, 죽어도 상관없긴 했지만, 그래도 기껏 만났는데, 뭔가 해보지도 못하고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다.
나는 쥐고 있는 검에 계속 마나를 밀어 넣었다.
‘전쟁신의 검’이 내 몸을 계속 치료해 나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에서 흐르던 피도 멈추고, 상처도 사라졌다.
내가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마왕은 나와 내 검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 검은 내 검 같은데…….”
[저는…… 내 검이라니! 한 번도 마왕의 검이 된 적이 없었어요!]
역시, 마왕은 이번에도 ‘전쟁신의 검’을 바로 알아봤다.
검도 마왕의 말에 바로 발작했고.
전에는 검의 정령이 한 말을 마왕에게 전해주었지만, 이번에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알 것은 다 알았고, 마왕에게서 알아내고 싶은 것도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지? 거기다, 그 검을 가지고 있다는 건, 내 수하들은 전부 죽었다는 거겠지.”
나는 마왕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멀쩡해진 몸 상태를 확인하고, 가슴 속에 넣어둔 유물을 반대편 손에 소환했다.
“소환 큐브.”
말을 끝내는 순간, 내 손에 ‘죽음의 성물’ 잡혔다.
“설마 말을 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
그리고, 또다시 이어진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고, 동시에 큐브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한순간에 검은 마나가 큐브에서 뿜어져 나왔다.
꺄아아악!
섬 위에서 썩어가는 마물들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왕은 담담한 얼굴로 되살아나는 마물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담담한 마왕을 보며, 다시 작게 중얼거렸다.
“소환.”
말이 끝나자, 내 옆에 두 언데드가 소환되었다.
죽음의 사제, 해골과 마물 기사.
이번 삶에서는 하도 험하게 굴려, 지하 도시의 언데드는 이 둘밖에 남지 않았지만, 이 둘이면 충분했다.
아니, 이 둘이 아니면 마왕을 상대하기 불가능했다.
주위에서 일어난 언데드들을 보고도 표정도 변하지 않았던 마왕이 내 옆에 나타난 마물 기사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내 수하를 죽여서 데리고 다닌다라…….”
마왕이 화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것은 많지만, 다른 사람에게 묻기로 하지.”
여러 번 마왕을 보게 되니, 생각보다 다양한 마왕의 표정을 보게 되는 것 같았다.
몇 번 더 만나면 원하는 표정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 헛생각을 하며 나는 언데드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공격!’
“캬아아악!”
언데드가 된 마물들이 날개를 펄럭이며 마왕에게 덮쳐들었다.
그리고, 마물 기사가 마왕을 향해 달려갔다.
해골은 손을 들어 내가 일으킨 마물들을 지휘하기 시작했고, 나도 마왕을 향해 몸을 날렸다.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이번에는 내가 생각해도 잘 싸운 것 같았다.
물론, 도시 안으로 끌어들여서 화약으로 마왕을 박살 냈을 때보다야 못했지만.
혼자 싸운 것치고는 충분히 오래 버틴 것 같았다.
해골과 마물 기사가 버티고 있었을 때는 나름 우위를 차지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동안 죽어가면서 레벨을 올린 덕분이기도 했고, 마왕이 봉인을 푼 직후라 싸움에 익숙해지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동안 내가 마왕과 많이 싸워왔기 때문이었다.
싸움이 시작되고 30분 정도 지난 것 같았다.
맨 위가 터져나갔던 탑은 이제 뿌리만 남아 있었다.
눈이 부시게 하는 마왕의 검격을 여러 번 맞아서 탑 대부분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내 공격에는 꿈적도 하지 않을 탑인데, 그런 탑을 날려버리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무시무시한 공격이었다.
부서진 것은 탑만이 아니었다.
탑이 세워진 섬도 반 이상 물에 가라앉아 있었다.
사실, 가라앉은 것도 아니었다. 마왕이 지면을 날려버려서 호숫물이 밀려들어 온 것일 뿐이었다.
핏빛이 가득한 호수 위에는 썩은 살점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전부 언데드의 파편들이었다.
물 아래에는 더 많은 파편이 가라앉아 있을 터였다.
물론, 내가 소환한 두 언데드, 해골과 마물 기사도 박살 나 버렸다.
해골은 마왕의 주먹에 맞아 머리가 박살이 나버렸고, 마물 기사는 마왕에게 갈가리 찢겨버렸다.
그리고 나도, 온몸이 누더기로 변해버렸다.
팔이 잘리면 다시 붙여 회복하고, 배가 터져 나가서 내장이 쏟아지면 다시 밀어 넣은 뒤 검으로 회복해 나가면서 열심히 싸운 끝에 결국, ‘전쟁신의 검’의 회복 한계를 알게 되었다.
상처가 더는 회복이 안 되고, 마나도 바닥이 나버린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번 싸움에 만족할 수 있었다.
마왕이 봐준 것도 아닌데,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고, 그 사이에 마왕에게 깊은 상처 몇 개를 남겨 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 이상으로 막막했다.
겨우 서 있는 나와 달리, 상처를 회복시킨 마왕은 멀쩡해 보였으니까.
거기다, 저 몸을 박살 내도 소용이 없으니, 결국, 봉인밖에 답이 없는 걸까.
겨우 서 있는 나를 보며 마왕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상하군. 어디서 나와 싸운 적이 있나?”
마왕의 말을 듣고 가슴이 뜨끔거렸다.
이런, 심장에도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나, 나는 처음 보는데.”
억지로 입을 여는데,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와버렸다.
성대도 상한 건가.
“그럴 리가, 처음 상대했다면, 이렇게 잘 버틸 리가 없어.”
하기야, 마왕이 알 수밖에 없었다.
30분 동안 나는 그의 검술과 능력을 일일이 상대해 냈으니까.
마왕이 능력만 강한 것도 아니고, 검술도 수준급인데 모를 리가 없었다.
“잘됐군. 수……. 백 년 동안 준비했던 보람이 있는 모양이네.”
하지만, 나는 끝까지 다른 이유를 댔다.
곱게 죽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싸우다 확 죽어버렸으면 걱정이 없었을 텐데.
한계를 시험하느라 이렇게 살게 되어서 마왕의 눈치를 보게 되어버렸다.
괜히 눈치를 채서 부하로 삼겠다고 하면 큰일이었다.
마왕의 부하가 되는 것도 문제지만, 자살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게 더 문제였다.
그래도 난 마왕을 믿었다.
마왕은 두말하는 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는 분명 나 대신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거라고 했었다.
마왕은 내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수백 년이 지난 건가…….”
그렇게 중얼거린 마왕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왕의 손이 환하게 빛났다.
그리고, 열기와 충격이 밀려왔다.
세상이 어두워졌다.
* * *
다시 환해진 세상은 예상대로 황궁 터의 지하 도시였다.
마물 기사의 시체가 보이고, 눈앞에 메시지도 보였다.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죽을 때마다 보는 메시지.
나는 고통을 참으며 뻔한 메시지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예상대로 시간이 지나자 메시지가 바뀌었다.
<경험치가 상승했습니다.>
<봉인 정보를 획득했습니다.>
<사자 회귀의 레벨이 올라갔습니다. 추가 능력, 봉인이 확인되었습니다.>
메시지는 딱 내가 예상한 대로 이어졌다.
<봉인 능력을 얻으시겠습니까?>
그리고, 질문까지. 나는 바로 예라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내가 대답하기 전에 메시지가 한 줄 추가되었다.
<주의 : 봉인 능력을 얻으시면 현재 저장 시점이 사라집니다.>
뭐라고?
나는 대답 대신 새로 나타난 메시지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