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4화
제24편 탑을 오르다
복도 끝에 있는 텅 빈 커다란 방.
텅 빈 방 중앙에는 제단 하나만 남아 있었고, 그 제단 위에는 커다란 검은 구슬이 놓여 있었다.
발레아와 같이 왔을 때 보았던 것과 다르지 않은 방.
나는 주변을 살피지 않고, 바로 제단으로 걸어가, 구슬에 손을 올렸다.
[죄송합니다. 현재 이 시설은 폐쇄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요청 사항은 들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 시설의 에고가 하는 말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이다음에 할 말도 다르지 않을 터.
나는 중간 단계를 다 건너뛰고, 탑의 에고에게 명령했다.
“나는 예비 에고에게 관리자 등급으로 지정받았다. 관리자의 권한으로 폐쇄를 멈추기를 원한다.”
[……12번째 예비 에고가 사용자를 관리자로 지정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본 에고도 예비 에고의 결정을 받아들입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에고는 잠시 버벅대는 듯했지만, 전과 대답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에고는 내 명령에 따랐다.
[시설을 다시 개방하겠습니다.]
에고의 대답과 함께 석실 안에 뭉쳐 있던 강대한 마나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철컹. 철컹. 철컹.
그리고, 멀리서부터 소리가 들려왔다. 잠긴 것이 풀리는 듯한 소리가.
[봉인으로 명명된 유출 처로 마나가 유출되는 것을 차단했습니다. 유입되던 마나가 사라져서 봉인 붕괴가 가속됩니다. 남은 시간을 표시합니다.]
에고의 말과 함께 구슬 위로 숫자가 떠 올랐다.
시간을 나타내는 고대 왕국의 숫자였다.
숫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줄어들었다.
“이제 와서 초읽기라니……. 대충 2시간 정도 남은 건가.”
좀 더 빨리 왔으면 시간을 더 주었으려나.
그건 다음에 왔을 때 확인해 보면 될 일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봉인이 바로 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짧은 시간이나마 시간이 주어졌으니, 서두르면 마왕을 어떻게 봉인한 것인지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그걸 보면 뭔가 도움이 될지도.
어쨌거나, 봉인이 풀리기 전에 도착하려면, 최대한 빨리 최상층까지 올라가야 했다.
내가 숫자를 확인하는 동안, 탑에서 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문이 열리고, 잠긴 것들이 풀리는 소리가.
그리고 결국, 이 방 바로 위에서 그 소리가 들려왔다.
철컹, 철컹. 덜컹.
무언가 잠겼던 것이 풀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어서 벽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와 함께 이음새도 보이지 않았던 한쪽 벽에 사람이 지나갈 만한 구멍이 만들어졌다.
구멍 뒤에는 위로 이어진 계단이 보였다.
구멍이 아니라 통로인 모양이었다.
[시설의 개방을 완료했습니다. 그동안 마나 소모가 너무 심해서 잠시 수면 상태로 들어가겠습니다.]
위로 향하는 통로가 열리자, 탑의 에고가 잠들어버렸다.
아마도 수면 상태에서 마나를 회복하려는 것 같았다.
뜻밖의 상황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구슬을 가져가서 도움을 받으려 했는데…….
언제 깨어날지 모르겠지만, 당장은 가져갈 이유가 없었다.
나는 구슬을 그 자리에 둔 채로 새로 만들어진 구멍, 통로로 향했다.
예상대로 구멍 안에 있는 계단은 위층과 이어져 있었다.
고대 제국 이전에 만들어진 것 같은 탑.
이 탑이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위층에 올라오니 이 탑이 폐쇄되기 전에 어떻게 쓰였는지 알 수 있었다.
“여긴 설마, 병원 같은 곳인가…….”
세월을 타지 않는 벽과 바닥, 천장과 달리, 긴 복도 옆에 늘어서 있는 방 안에는 낡은 시설들이 들어서 있었다.
녹슨 금속과 낡은 돌과 만들어진 침대와 삭아버린 구속구들.
그리고, 낡은 실험 도구들.
어떻게 쓰이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낡은 실험 도구들에는 작으나마 마나가 남아 있었다.
“이게 전부 유물?”
하지만, 이 유물들은 많은 시간이 지나서인지, 유물이라는 흔적만 남아 있었다.
“용사 연구소라고 하더니……. 용사를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일도 했던 걸까?”
나는 그나마 멀쩡한 메스처럼 보이는 유물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그 유물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머릿속에 몇 가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제길!”
기억이 끝나자 나는 메스 유물을 던져버렸다.
퍽.
벽에 부딪힌 유물은 유물답지 않게 박살이 나버렸다.
하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 이상으로 내가 본 기억은 지질맞았기 때문이었다.
저 메스 유물을 썼던 사람은 용사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기억이 남아 있었던 것은 저 메스에 몸이 잘려 나간 사람들이 모두 용사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용사뿐만 아니라 용사가 되지 못한 후보생들과 실패작들이 저 메스에 몸이 잘려 나갔다.
그리고, 나는 메스에 잘리는 용사 입장으로 기억을 보게 되었다.
그토록 많은 죽음을 거치고, 유물의 기억을 보았지만, 이 메스 유물이 보여준 기억만큼 끔찍한 것은 얼마 없었다.
자르고, 끊고, 뚫고, 그 와중에 능력과 마나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확인하는 사람들의 모습.
실험실 동물을 보는 듯한 사람들의 모습은 기억을 보는 나도 무서울 정도였다.
이곳은 병원이 아니었다.
용사를 만들기 위한 인체 실험실이었다.
그리고, 그 많은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한 기억은 ‘마왕’의 기억이었다.
메스의 날에 비친 어린 마왕의 모습.
여러 번 보았던 마왕과 달리, 기억 속의 마왕은 고통 속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부수고, 자르고, 파괴해도 절대로 죽지 않는 최초 능력자.
실험하기에 딱 좋은 소재였을 터였다.
사실, 신이 내려준 용사를 인간이 만드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용사를 만들려면, 용사에 대해 잘 알아야 할 테고, 그렇다면, 용사를 여러모로 살펴봐야 할 터였다.
동물 중에 용사가 나올 리도 없으니, 동물 실험을 할 수도 없을 테고, 그렇다면, 인간 실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고대 제국이 실험 윤리나 인권을 따졌을 리도 없고…….”
나는 얼룩이 남아 있는 낡은 돌침대를 쳐다보았다.
저 얼룩 중에는 마왕의 피도 섞여 있을 게 분명했다.
“이렇게 실험해대고, 죽일 수 없으니, 마물들이 가득 찬 세상에 던져버린 건가.”
내가 그런 경험을 했다면 어땠을까?
솔직히 마왕과 다른 결정을 했을 거라고 자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봤자, 내 적이니.”
어찌 되었건 쓰러뜨릴 적일 뿐이었다.
나는 다른 유물을 확인하는 대신 복도를 내달렸다.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계속 복도를 내달리고, 위로 향하는 계단을 계속 올라갔다.
이 탑은 이상하게도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각층의 복도 반대편에 있었다.
덕분에 각층의 복도를 모두 지나가야 했다.
층마다 복도 옆으로 문이 열린 방들이 계속 보였지만, 방 안에 들어가서 확인하지 않았다.
모든 방이 처음 보았던 방과 분위기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부 인체 실험실이라는 뜻이었다.
인체 실험실을 보느라, 괜한 시간 낭비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층을 오르다 보니, 활짝 열린 문을 보게 되었다.
문밖으로 썩어가는 마물들과 호수가 보였다.
지상으로 연결된 문이었다.
나는 열린 문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문이 열렸을 줄은 생각도 못 했군.”
탑에 들어왔던 문으로 빠져나와 위로 헤엄쳤으면, 이곳까지 훨씬 일찍 도착했을 터였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여서 그쪽으로 움직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길은 빙 돌아가는 길이었다.
덕분에 어린 시절 마왕의 기억을 보게 되었지만, 그 기억은 기분만 나빠졌을 뿐, 그리 도움이 되는 기억은 아니었다.
그래도, 많이 늦지는 않았다.
나는 열린 문을 확인하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열린 입구 위의 탑 내부는 탑 지하와 달랐다.
이 층부터는 실험실이 아니라, 진짜로 ‘용사 연구소’ 같은 느낌이 났다.
입구가 있는 층은 외부 손님을 받는 로비와 휴게실 같은 것도 보였고, 그 위로는 진짜 병원과 침실, 훈련실 같은 게 쭉 이어져 있었다.
다만, 마왕이 지나가서인지, 많은 방이 부서져 있었다.
몇몇 방은 절대로 안 부서질 것 같은 벽과 바닥도 찌그러져 있었다.
딱 봐도 마왕이 한 짓이었다.
나는 그 흔적을 따라 계속 달려갔다.
1층, 2층, 3층…….
따로 층 표시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계속 층을 오르니, 점점 마왕이 봉인된 최고층에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계속 한참을 달리니, 결국, 마지막 층에 도착했다.
마지막 층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지 않았다.
계단으로 올라 온 뒤, 나는 문으로 막혀 있는 큰 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홀 안에서 거대한 마나가 가득 휘몰아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앞을 가로막은 문을 밀어보았다.
그그그긍.
두꺼운 문인 듯했지만, 너무도 쉽게 움직였다.
나는 내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문을 열고, 최상층 홀 안으로 들어갔다.
콰과과과.
탑의 한층 전체를 차지한 홀은 내 생각보다 더 커 보였다.
높이도 십여 미터는 되어 보이는 홀, 그 홀 바닥에는 흐린 문양이 가득 남아 있었다.
문양들에는 아직도 남은 마나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마나가 내게 이 문양들이 조금 전까지 가동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 문양들이 탑의 마나를 봉인에 전달하는 마나진인 듯했다.
문양들의 중심, 홀의 중심에는 커다란 반구가 있었다.
마나로 만들어진 반구.
반구 안에 흐르는 격렬한 마나의 흐름 때문에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반구였다.
“저게 봉인인가…….”
탑의 에고가 말한 대로 봉인은 지금 허물어지고 있었다.
격렬하게 회전하고 있는 마나는 그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었고, 단단했을 반구도 마나의 움직임에 따라 출렁거리고 있었다.
에고의 말대로 얼마 뒤에는 마나가 멈추고, 반구가 사라질 터였다.
봉인 구 말고는 텅 빈 것 같은 홀이었지만, 비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바닥에 가득 그러진 문양 위에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아니, 사람이 아니었다.
봉인 구 앞에 누워있는 것은 시체, 아니 해골이었다.
해골을 보자, 누구인지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에 홀로 남겨진 해골이라면 다른 사람일 리가 없었다.
마왕을 봉인한 용사가 분명했다.
나는 해골 앞으로 걸어갔다.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그가 맞았다.
해골은 팔찌의 기억에서 보았던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해골을 자세히 살펴봤다.
옷도, 뼈도.
그 어디에도 치명적인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마왕에게 상처를 입어 죽은 것은 아니었다.
“정말 봉인하려면 목숨을 버려야 하는 건가.”
마지막까지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해보았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마왕을 봉인하고, 모두 행복하게 살았어요.’라는 결말은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예상한 일인 만큼 실망은 크지 않았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해골을 살폈다.
해골만 남았지만, 뭔가 도움이 될만한 게 있을지 몰랐다.
그렇게 살펴본 끝에 찾아낼 수 있었다.
해골 가슴 아래 깔려있었던 작은 단도를.
조금도 녹슬지 않고, 광채가 남아 있는 단도.
유물 단도였다.
뭔가 대단한 힘이 담겨있는 유물은 아니었지만, 나는 단도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용사가 보내는 메시지인가…….”
이 단도는 이곳까지 찾아온 후손에게 남겨놓은 기억이 분명했다.
나는 단도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