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3화
제23편 다시, 또다시 (2)
대공녀의 새로운 능력은 내 예상과 달리 유물을 수리하는 것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버지인 공왕 쪽 능력이 생겨난 것은 아니었고, 수리는 아니었지만, 어머니 쪽 능력인 유물과 관련된 능력을 새로 각성했다.
아니, 새로 각성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원래 유물 감지 능력으로 알고 있었던 능력이 제대로 각성한 것이었으니까.
거기다, 앞선 삶들에서 대공녀가 방어막을 쓰는 성물인 ‘나무 지팡이’를 그토록 잘 활용할 수 있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유물 소통]
구슬로 확인한 대공녀의 새로운 능력이었다.
능력을 확인한 대공녀의 말에 따르면 유물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인 모양이었다.
어떤 신의 성물이든, 어떤 형태의 마나가 담겨 있건, 어떤 조건이 걸려 있든 간에 유물의 능력을 최대한 쓸 수 있는 능력.
그녀가 성물 지팡이로 거대한 방어막을 만드는 것도 그 능력의 일부일 뿐이었다.
이제 제대로 그 능력을 쓸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보이게 될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장은 그 위력을 확인할 수 없었다.
먼저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처음 말했듯이 새로 얻은 능력은 ‘전쟁신의 검’을 수리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덕분에 검을 수리한 뒤에 대공녀는 기절하듯이 쓰러졌고, 나는 새로운 능력을 확인하기는커녕, 도망치듯이 성을 빠져나와야 했다.
대공녀의 새로운 능력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원래 목적이었던 ‘전쟁신의 검’을 수리했으니, 공국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바로 봉인지로 향했다.
‘전송’으로 황궁터 지하 도시로 돌아온 나는 봉인지를 헤집고 돌아다녔다.
내 감각에 걸리는 강한 마물을 찾아다녔고, 마물들의 둥지를 부숴나갔다.
“회귀하지 않으면 결과를 알지 못하니까 꽤 곤란하네.”
둥지를 지키던 마물, 여왕개미를 닮은 마물의 머리에 검을 꽂은 채로 나는 입맛을 다셨다.
주변에는 사람보다 큰 개미 마물들이 가득했다.
모두 여왕과 둥지를 지키기 위해 나와 싸웠던 마물들이었다.
이 마물들에게는 내가 침략자였을 테지만, 내게는 그냥 경험치를 주는 마물들일 뿐이었다.
그렇게 싸움의 여운에 잠겨 있을 때, 머릿속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뭐 하고 있어요! 괜히 분위기 잡지 말고 빨리 뽑기나 해요!]
전쟁신의 검 에고, 아니 정령의 목소리였다.
봉인지에서 홀로 싸우면서 다른 유물의 에고와 달리, 정령은 제대로 된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게 좋다는 말은 아니었다.
감정이 있는 정령은 지금처럼 상당히 귀찮은 존재였다.
덕분에 쓸데없는 감상에 젖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래도, 외롭지 않으니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정령의 말대로 둥지 주인의 머리에 막혀 있는 ‘전쟁신의 검’을 뽑았다.
벌써 봉인지에서 혼자 돌아다닌 지도 한 달이 넘었다.
가끔 내 영지와 제국 수도에 들려보기도 했지만, 그건 특별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보급을 받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더구나 방문할 때마다 발레아의 표정이 안 좋아지고, 다른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을 보게 되니, 점점 영지로 돌아가기가 껄끄러워졌다.
“뭐, 그것도 이제 끝이니까.”
이제, 며칠 뒤면 마왕이 봉인을 풀고 나올 터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마왕이 봉인을 풀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는 검이 내 몸을 모두 회복시킨 것을 확인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전송’
시야가 바뀌고, 나는 탑 옥상에 서 있었다.
마왕이 봉인되어 있고, 마물을 통솔하는 마물왕이 옥상에서 지키고 있었던 탑.
지금은 이 탑의 옥상에 언데드 한마리를 제외하면 마물왕과 마물들의 시체만 남아 있었다.
시간이 흘러서인지, 옥상에는 마물들의 시체가 썩는 냄새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어차피 모두 내가 죽인 것이었으니까.
나는 ‘전송’ 용으로 남겨놓은 언데드, 하늘을 나는 마물을 살펴보았다.
역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만약을 대비해서 마물 하나를 언데드로 만들어 놔야 하나…….”
잠시 고민해 보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이곳으로 다시 전송해 올 일은 없을 테니.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탑이네요.]
검의 정령이었다.
“기억하고 있었군.”
[기억할 수밖에 없죠. 내 몸. 검이 부서진 곳인데요.]
따지고 보면, 수백 년 전에 벌어진 일이라 충분히 잊을 만했지만, 인간이 아닌 검의 정령은 그 일을 잊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잘 되었어. 마침 길 안내가 필요했는데.”
[네?]
어리둥절한 정령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옥상 끝으로 걸어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옥상은 물론, 탑 외벽 어디에도 안으로 들어갈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이 탑은 마왕을 봉인하기 위해 폐쇄되었으니까.
나는 ‘전쟁신의 검’으로도 구멍을 내지 못할 탑을 살펴보는 대신, 지상을 살펴보았다.
넓은 호수 위로 내가 올라와 있는 탑이 자리한 섬이 보였다.
탑이 차지한 자리보다 남은 공간이 더 적어 보이는 작은 섬.
물론, 호수에 비해 작은 섬은 아니었지만, 이 거대한 탑이 세워져 있으니, 섬이 작아 보였다.
섬의 빈 곳에는 탑 옥상처럼 마물들의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저 시체들도 내가 만든 것들이었다.
사실, 저보다 많은 마물이 있었지만, 마물들 상당수가 호수에 추락했다.
아마, 호수 밑바닥에도 하늘을 나는 마물들의 시체가 많이 있을 터였다.
아니면, 물고기들이 먹어서 뼈만 남았던가.
‘그런데, 물고기들이 마물 시체도 먹나?’
죽으면 마나 방벽이 사라져서 일반적인 동물들도 살점을 후벼 팔 수 있기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딴 세상에서 온 생명체, 외계인들인데 먹어도 되는 건지…….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이유는 별것 아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조금 무서워졌기 때문이었다.
더 황당한 일도 자주 벌였고, 죽는 것도 무진장 죽었으면서 겨우 이런 것을 무서워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몸을 돌려, ‘전송’ 용으로 남겨 두었던 날개 피막이 반쯤 삭아 버린 마물의 등 위에 올라탔다.
끼룩.
성대도 상했는지, 마물은 애처로운 목소리를 내며 날개를 펄럭였다.
나를 태우면 몇 킬로도 날아가지 못할 것 같은 모습.
영 불안했지만, 그래도 이번 한 번은 쓸 수 있을 터였다.
마물은 날개를 퍼덕이며 앞으로 달려갔다.
반쯤 삭은 날개였지만, 그래도 힘차게 퍼덕이는 만큼, 조금씩 떠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마물은 최선을 향해 달려가다가, 옥상 끝에서 힘차게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몸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지면.
바람을 가르는 유선형 몸체라서 그런지, 제대로 추락하니 그냥 자유낙하 할 때보다 훨씬 더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젠장, 역시 무섭잖아!”
이건 죽음의 공포와는 결이 다른 공포였다. 소변이 마려운 공포랄까.
나는 그런 공포를 참으며, 추락하는 마물 위에 엎드려 마물의 방향을 조정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잘못해서 섬에 추락하면 개죽음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속도를 늦추거나 먼 곳으로 활강해 버리면 이렇게 추락하는 의미가 없었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섬 바로 앞 호수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래야 호수 바닥에 붙어 있는 관리자용 탑 출입구에 쉽게 도착할 수 있었다.
“발레아를 부르는 편이 좋았으려나…….”
코앞에 다가오는 수면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발레아를 부르는 대신, 충격을 막기 위해 마나를 끌어올렸다.
충격을 막으려면 반지 같은 유물의 방어막을 쓰는 게 더 좋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깊은 곳까지 내려갈 수 없었다.
다음 순간.
쾅!
귀청을 때리는 폭음과 함께 나는 마물과 함께 수면에 처박혔다.
수면에 부딪힌 충격에 내구도가 다 사라졌는지, 언데드 마물은 산산이 부서졌다.
나도 충격을 느꼈지만, 마나 덕분인지 생각 보다 버틸만했다.
나는 전생에 보았던 다이빙 자세를 따라 하며 계속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대단한 충돌이었지만, 역시 호수 바닥에 도착하기도 한참 전에 추진력이 사라졌다.
예상했던 일인 만큼 나는 계속 아래로 헤엄쳐 갔다.
그리고, 호수 바닥에서 작은 문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기억이 틀리지 않았어.’
나는 그 문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설마, 입구가 또 있었나요?]
내가 문을 보고 있자, 정령이 말을 걸어왔다.
‘몰랐어?’
[네. 마왕은 섬 위에 있는 탑 입구로 들어갔었어요.]
하긴, 마왕이 탑을 찾았을 때는 봉인 전이었으니, 정상적인 입구로 들어갔을 터였다.
‘그런데 왜 내가 뛰어내릴 때 아무 말도 안 했어?’
[신이 용사라고 인정한 기사가 갑자기 투신자살하는 것을 보고 제가 뭐라 하겠어요. ‘이 용사가 미쳤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죠.]
마왕과 같이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수백 년간 부서진 채로 있어서 그런 건지, 이 검의 정령은 무척이나 시니컬했다.
나는 정령이 떠드는 소리를 무시하고 문을 살펴보았다.
앞선 삶에서 보았던 대로, 조개와 따개비가 가득 덮여 있는 문이었다.
벽과 같은 재질이라 절대 부서지지 않을 것 같지만, 나는 이 문을 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나는 가슴에서 구슬을 꺼냈다.
내가 꺼낸 구슬은 봉인지의 유적에서 찾은 유물,
정보창을 보게 해 주었던 ‘12번째 예비 에고’가 들어 있는 용사 관리용 유물이었다.
[도착했군요.]
구슬은 전에 이곳에서 꺼냈을 때와 똑같은 말을 했다.
“문을 열어.”
[죄송합니다. 시설이 폐쇄되어 있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시설이 연락에 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내 말에 구슬이 바로 부정적인 답을 했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때와 다르지 않은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잠시 기다리면, 구슬이 말을 바꿀 터였다.
[……한군데 연락이 되는 곳이 있습니다. 앞에 있는 문에 저를 대 보시겠습니까?]
전에 했던 대로 나는 구슬을 문에 가져다 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탑의 대답이 들려왔다.
[12번째 예비 에고의 정식 사용자가 확인되었습니다. 시설이 폐쇄되었습니다. 정식 사용자라도 관리자용 통로 이외에는 시설에 진입할 수 없습니다.]
똑같은 말.
[관리자 통로를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똑같은 물음이 머릿속을 울렸다.
나는 당연히 승낙했고, 다시 탑이 말했다.
[외부와 내부의 압력 차이가 확인되었습니다. 시설의 안전을 위해 일정 시간만 문을 열겠습니다. 삼, 이.]
츄악!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초읽기가 시작되었다. 그것도 셋만 세는 초읽기였다.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문 안으로 쏟아지는 물과 함께 통로로 뛰어들었다.
[일, 문을 닫습니다.]
촤악.
내가 들어서는 순간, 문이 닫혔다.
나는 찰랑거리는 물과 함께 바닥에 누워 한숨을 내쉬었다.
여태 똑같았던 순서가 갑자기 달라지다니…….
물론, 다시 생각하면, 이상할 게 없었다.
그때는 발레아와 같이 공기 방울 속에서 문을 열었으니까.
나는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을 적셨던 물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배수 시설도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젓고는 대리석을 닮은 통로를 걸어갔다.
목적지는 이 통로 끝에 있는 중앙 제어실이었다.
중앙 제어실은 탑의 폐쇄를 풀 수 있었다.
나는 마왕이 봉인을 풀기 전, 탑의 폐쇄를 풀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