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8화
제18편 선조의 팔찌 (1)
세상이 밝아졌다.
기억이 시작된 것이다.
눈을 뜨니 아침 햇살이 낡은 창가에 흘러들어왔다.
나는, 아니, 내가 빙의한 남자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마도, 내가 빙의한 남자는 팔찌 유물을 남긴 마왕을 봉인한 용사일 터.
나, 아니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뒤에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옆에 여자가 누워 있었다.
잠시 여자를 지켜보던 용사는 고개를 돌려 햇살이 스며드는 창가를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햇살 사이에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허공에 떠 있는 문장.
나도 잘 아는 메시지였다.
[능력이 상속되었습니다.]
고대 제국어로 쓰여 있는 메시지는 내가 지겹게 봐왔던 메시지와 다르지 않았다.
단지 그 내용이 다를 뿐.
‘능력이 상속되었다고?’
나는 메시지를 보고 놀랐지만, 내가 빙의한 남자는 메시지에 놀라지 않았다.
“이번에도 됐군.”
그는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을 뿐이었다.
용사는 메시지창을 지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잠을 잤던 침실은 고풍스러운 가구들이 자리한 귀족의 침실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낡아 보였다.
그가 어제 테이블에 걸쳐놓은 옷을 입고, 무기를 챙기는 사이, 같이 자던 여자가 깬 것 같았다.
“가시려는 건가요.”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이 머니까.”
용사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렇군요.”
뒤에서 옷을 입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니 용사는 허리춤에 걸어놓은 주머니에서 커다란 금덩어리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들려온 놀란 목소리.
“이건……!”
후다닥 달려오는 소리에 이어, 여자가 금덩이를 두 손으로 잡았다.
실내복만 걸친 여자.
화장이나, 꾸미지 않은 상태인데도 꽤 이쁜 여자였다.
그녀는 금덩어리를 보고 다시 나, 아니 용사를 보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금덩어리를 내밀었다.
그녀는 모멸감과 아쉬움을 얼굴에 동시에 드러내며 입을 얼었다.
“돈은 필요 없어요. 돈 때문에 같이 잔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하룻밤…… 대가로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어요.”
용사는 그런 대답을 할 거라고 예상한 것처럼 말했다.
“하루 숙식 값 아니다. 앞으로 살아가는 데 쓰라고 준 돈이야.”
“네?”
여자의 어리둥절한 표정.
용사는 계속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알지?”
“용사시잖아요.”
“맞아. 나는 용사야. 그리고, 용사는 임신이 되면 바로 알 수 있어.”
“그런…….”
여자의 얼굴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얼굴 가득 떠올라 있었다.
나 같아도 믿지 못할 것 같았다.
믿지 못하는 표정을 보면서도 용사는 말을 이어갔다.
“동료들과 따로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대를 동료들에게 부탁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럴 시간이 없군.”
용사의 말이어서였을까? 여자는 용사의 말을 믿게 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여자는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하지만, 지금 같은 때에 아이를 낳고 키울 수는 없어요.”
낡아 보이는 것은 가구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실내복도 낡아 있었고, 그녀의 몸도 말라 있었다.
영양실조에 가까운 몸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억 속은 대전쟁 때였다.
마왕이 제국을 무너뜨리고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때. 용사가 마왕을 봉인시키기 전까지는 인류의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창밖의 광경도 다르지 않았다.
창밖으로 반파되고 무너진 건물들만 가득했다.
이 방, 이 집처럼 멀쩡한 건물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금 마왕을 봉인하러 가는 중이니까. 봉인이 성공하면 전쟁은 끝날 거야.”
“그게 정말인가요?”
그의 말에 여자는 급하게 반문했다.
용사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뻐하던 여자가 다시 금덩어리를 내려다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왕을 봉인하신다면서 왜, 이 금덩어리를……. 역시, 싸움이 끝나면 용사시니까, 다시 이곳으로 오지 않으시는 건가요.”
여자가 어두운 목소리로 묻자, 용사는 고개를 저었다.
“마왕을 봉인하게 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거야. 마왕의 봉인은 내 능력, 내가 필요한 것이니까. 나도 돌아오고 싶지만, 불가능한 일이군.”
용사는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그리고, 아이를 낳을 거면, 알고 있어야 할 게 있어.”
“네?”
“원래 우리 용사들의 후손은 용사의 능력 중의 하나를 가지게 돼. 시간이 지나면 그 능력을 각성하게 되지.”
“하지만, 전부 능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고, 내가 가진 능력은 후손 중에서도 각성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 거야.”
극히 드문 각성이라…….
이것도 메시지가 알려준 걸까?
“아마 몇 대가 이어져도 각성자는 보이지 않겠지. 하지만, 언젠가 내 능력을 이을 사람이 나올 거야. 그가 각성하면 내 친우를 만나라고 해.”
설마?
“네? 친우라면 누구?”
“내 동료인데……. 음, 매번 이름을 바꿔서……. 아마 다시 세우게 되는 나라에 큰 조직을 만든다고 했으니, 찾기는 어렵지 않을 거야. 그 조직을 찾아가서 그에게 내 이름과 증표를 보이면 될 거야.”
맙소사.
‘조직’의 이름이 왜 그따위인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 용사의 후손이 알아볼 수 있게 단체의 이름을 그냥 ‘조직’으로 만든 것이었다.
“큰 조직이라면 상행 같은 곳인가요?”
“글쎄. 어떤 식으로 만들지는 나도 알지 못해서…….”
아니……. 상행이라니.
설마, 어머니 집안이 대대로 상행을 한 게 그런 이유였었나?
“그런데, 증표라니요?”
나, 아니 용사는 팔을 내밀었다. 손목에 매달린 팔찌가 보였다.
아는 팔찌였다.
내가 이 기억으로 들어오게 만든 팔찌였다.
“대단한 유물은 아니지만, 오래 차고 다녀서 애착이 많은 유물이야. 그는 바로 알아볼 거야.”
“그걸 주신다는 건가요?”
여자의 눈이 반짝였다.
금덩어리를 받게 되었을 때보다 더.
“팔면 안 돼. 그가 알아볼 유물이니.”
용사의 말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소중하게 보관할게요.”
그는 팔찌를 풀었다.
용사가 팔찌를 푸는 모습을 보고, 여자는 주저하며 용사에게 말했다.
“그런데, 이 내용을 대를 이어 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녀는 용사의 말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몇 마디의 말을 듣고 결단을 내리다니.
여자도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만족스러웠는지, 용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상관없어. 언젠가 그대 가문에 나와 같은 능력을 가지게 되는 용사가 나온다는 것만 기억하면 돼.”
그는 손에서 푼 팔찌를 다른 손에 쥐었다.
“나머지는 이 팔찌를 받게 되는 이가 보게 될 테니.”
여자는 의아한 얼굴로 용사를 바라보았지만, 용사는 팔찌를 쥔 채로 계속 이야기했다.
“마왕을 봉인하려면 마물을 잡아 능력을 올려야 해. 아니면 마왕에게 계속 도전을 해서 큰 피해를 주던지. 그러면 필요한 능력이 나올 거야.”
용사는 여자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허공을 보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는 이 기억을 네가 보질 못했으면 해. 나는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해서 이 길로 가는 것이지만, 자신을 희생해서 세상을 구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니까.”
“저에게 말씀하시는 건가요?”
용사의 말에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용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혼잣말이야.”
혼잣말도 아니었다. 기억을 보고 있는 내게 하는 말이었으니.
그리고 그는 여자, 어머니의 선조에게 팔찌를 건네주었다.
그 순간, 세상이 어두워졌다.
기억이 끝난 것이다.
* * *
다시 세상이 밝아지니, 어머니가 앞에 앉아 있었다.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기억을 보고 온 것을 알지 못하셨다.
기억을 본 시간이 꽤 길었는데, 현실에서는 잠깐이었나보다.
나는 손에 들린 팔찌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일이 꼬여 있을 줄이야.
공작의 아들이 된 덕분에 정말 먼 길을 돌아온 것이었다.
아군이 될 사람이 가장 큰 적이 되었고, 가장 중요한 일을 제일 늦게 알게 된 것이다.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뭐, 그래도 후회는 안 되니까.’
멀리 돌아온 길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살아온 내 삶이 후회스럽지는 않았다.
더구나, 봉인은 용사의 말에 따르면, 봉인을 거는 용사의 희생이 필요했다.
어떤 식의 희생이 필요한지, 왜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용사의 말대로 자신을 희생해서 세상을 구하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대전쟁 때의 용사와 달리 나는 아직 다른 방법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제한도 없어졌고, 죽어도 능력이 이어졌다.
말하자면,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성장이 가능했다.
내 정신만 버텨낸다면, 언젠가 마왕을 쓰러뜨릴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손에 쥔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팔찌는 선조가 쓰던 유물. ‘사자 회귀’를 쓰던 용사의 유물이었다.
내가 팔찌를 내려다보고 있자,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별 느낌이 없지? 이런 유물로 뭔가 알 수 있다니.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사실, 느낌은 있었다. 기억도 떠올랐고.
하지만, 나는 그걸 어머니께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걸 원하지 않으셨으니.
어머니의 가문과 달리, 어머니는 조금도 기대를 안 하셨던 모양이었다.
저주받은 가문에 대한 반발인지, 아니면 지금 상황이 만족스러워서인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내 표정이 달라지지 않자, 어머니는 오히려 안심하셨다.
“앞으로 팔찌는 네가 차고 다니거라. 설마, 대영주이자 백작에게 유물을 달라고 하지는 못하겠지. 네가 팔찌를 가지고 있으면, 가문도 더는 저주에 매몰되지 않을 거다.”
어머니는 내 팔에 팔찌를 채워주셨다.
나는 어머니가 채워주시는 팔찌를 거부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팔찌를 찬 나를 보고 미소를 지으셨다.
“가문에서 백작이 나왔는데, 용사는 무슨 용사.”
“가문에서 어머니께 뭐라 하지 않을까요?”
“괜찮네. 정 뭐라 하면 발레아와 같이 가면 되니까.”
음, 확실히, 발레아하고 같이 가시면, 웬만한 일은 잘 해결되실 터였다.
나는 어머니와의 대화를 마치고, 바로 집무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집무실 안으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다.
사람들의 방문을 막은 것은 어머니가 하신 말씀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충격적인 말들이긴 했지만, 살아오면서 그 이상의 일들을 경험해왔다.
사실, 계속된 죽음으로 단련된 내게는 웬만한 일은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사람들의 방문을 막은 것은 충격을 받아서가 아니라, 확인해 볼 게 있어서였다.
나는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어머니의 선조, ‘사자 회귀’ 능력을 지닌 용사가 찬 팔찌.
어머니가 이 팔찌를 채워준 순간, 내 능력에 변화가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팔찌를 차게 된 뒤 바로 집무실로 달려온 것이고, 이렇게 사람들의 방문을 막은 것이었다.
나는 집무실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화악.
눈앞에 정보창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