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7화
제17편 저주받은 가문
나는 시체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마왕을 봉인한 용사, 노아 진이라고 했나?
‘사자 회귀’라는 말을 듣고 보니, 노아 진이라는 용사에 대한 설명이 왜 어디서 들어본 듯한 설명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었던 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실패하지 않는 정답만을 찾아가는 기사.
이전 삶에서 여러 번의 실패를 경험했으니,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정답만 찾아가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역시, 그도 나와 같은 능력을 가졌던 거겠지.”
나도 모르게 허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 내가 가진 능력을 다른 사람도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당대에 한 명씩 내려오던 ‘마나 감응력’도 여러 명이 동시에 가지게 되었고.
‘사자 회귀’ 능력을 가졌던 사람이 나오긴 했지만, 그는 수백 년 전의 사람일 뿐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죽었을…….
“죽었겠지?”
마왕을 홀로 봉인했으니 그때 죽었을 것 같았지만, 내 앞의 시체를 보니 장담하기 어려웠다.
어쨌거나, ‘사자 회귀’ 능력을 가졌던 용사가 있었다는 것은 잘못된 일도 아니었고,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실망을 느낀 것은.
“사자 회귀는 상속 능력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였겠지.”
각성으로 얻은 능력도 아니고, 태어나자마자 가진 능력이었다.
아버지인 그레시아 공작에게서 물려받은 상속 능력도 아니었고, 다른 사람이 가져봤다는 이야기도 없었던 능력.
그래서 ‘사자 회귀’는 평범한(?) 상속 능력이 아니라, 나만이 가진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 생각하니, 어이없는 생각이었네. 내가 무슨 판타지 소설 주인공도 아니고…….”
결국, 내 ‘사자 회귀’도 다른 상속 능력과 마찬가지로 용사에게서 내려온 능력일 뿐이었다.
아버지에게서 내려온 것이 아닌 상속 능력.
“……어머니를 뵈어야겠군.”
가지고 계신 비밀을 최대한 묻지 않으려 했지만, 이제는 피해갈 수 없었다.
용사의 시체와 기절한 여자를 길 위에 방치한 채로, 나는 ‘전송’ 능력을 사용해서 바로 영지로 돌아왔다.
침실에 놔둔 유물 반지를 확인한 뒤에 나는 바로 어머니를 찾아갔다.
다행히 어머니는 저택에 계셨고, 나는 바로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셨다.
어머니는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겉옷은 갈아입은 뒤라, 싸운 흔적은 남아있지 않을 텐데.
혹시 피 냄새가 배었나?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자, 어머니가 먼저 입을 여셨다.
“말을 안 하려 했지만, 안 할 수가 없구나.”
역시, 화가 나셨다.
피 냄새도 아닌 것 같은데.
이번 삶에서는 자주 찾아뵙지 않아서였을까?
하지만, 그런 이유로 화가 나신 게 아니었다.
“발레아에게 맡기고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냐! 결혼식은 안 올렸지만, 정식으로 네 부인이 된 아이다.”
맞다. 그때부터 며칠이 지난 거지?
‘용사’를 찾느라, 다른 일을 전혀 신경 쓰지 못했었다.
“기사들도, 다른 이들도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던데, 이런 어수선한 때에 영주가 계속 자리를 비우다니. 너답지 않은 행동에 내가 말을 안 할 수가 없구나.”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버린 삶이라고 너무 다른 일을 등한시했었다.
그래도 기본은 했어야 했는데.
일이 잘못될 수도 있으니, 영지는 잘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나는 어머니께 사죄를 드렸다.
“정말이냐?”
“네.”
내게 확답까지 받으신 어머니는 그제야 표정을 푸셨다.
“알았으면 되었다. 그래, 무슨 일로 이렇게 나를 찾아온 거냐. 네 표정을 보니, 단순한 문안 인사는 아닐 것 같은데.”
냉정하다면 냉정한 어머니의 말씀 덕분에 나는 바로 하고자 했던 말을 할 수 있었다.
“전에 저에게 말씀하시려다 만 이야기가 뭔지 듣고 싶습니다.”
어머니가 말하려던 이야기가 내가 알고자 하는 ‘상속 능력’과 관계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부터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계속 마음에 걸렸으니까.
“…….”
어머니는 대답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도 그녀 앞에 앉은 채로 어머니가 말하기를 계속 기다렸다.
잠시 뒤, 어머니가 입을 여셨다.
“혼자 힘으로 작위까지 받은 너에게는 쓸데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는데…….”
어머니는 내용을 말하는 대신, 말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완곡하게 내비쳤다.
다른 때였으면, 이대로 물러났겠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강하게 말했다.
“말씀해 주십시오. 쓸데없는 말인지는 듣고 나서 판단하겠습니다.”
물러서지 않는 내 모습에 어머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전에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내놓으셨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내 예상대로이기도 했지만, 내 예상을 한참 벗어나기도 했다.
“내 친정, 우리 가문은 저주받은 가문이란다.”
‘저주’라는 뜬금없는 말로 시작된 그녀의 말은.
“용사라는 망령에 수백 년간 지배당하고 있는 몹쓸 곳이지.”
조금은 내 예상대로 흘러갔다.
“귀족도 아니고, 평민이 수백 년간 가문을 이룬 채로 계속 내려왔다면, 모두 비웃겠지만, 우리 가문은 남들 모르게 대전쟁 이후 가문을 계속 유지해왔단다.”
아는 사람이 없으니, 비웃는 사람도 없었겠지만,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자조적인 미소가 흘렀다.
“우리 가문은 큰 상행을 이뤄 자금을 모으고, 대를 이어 자손들을 살피고, 피가 섞이지 않게 관리했지. 마치 귀족들처럼.”
나도 어머니의 집이 큰 상행을 하는 곳이라고 들었었다. 평민치고는 상당한 부자라는 것도.
그런데, 그게 따로 이유가 있었다니.
“그렇게 한 이유는 우리 가문의 시조가 용사였기 때문이었지.”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했던 일이었는데…….
너무 예상대로 되어버리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평민 중에도 용사의 후손은 있을 터였다.
귀족의 자손 중에도 각성하지 못한 이들은 평민이 되어버리는데, 시조가 용사라는 이유로 계속 가문을 유지해왔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질문에 어머니는 입술을 깨무셨다.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듯한 모습.
어머니는 그런 모습으로 내 질문에 대답했다.
“그 빌어먹을 용사 때문이었어. 그 용사가 남긴 말 때문이었지.”
어머니의 입에서 거친 말이 흘러나왔다.
“그 용사는 자신의 자손 중에는 ‘상속 능력’을 가지고 각성할 사람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했어,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면,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갖춘 각성자가 결국 나올 거라고 했지.”
그 말을 하면서 어머니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우리에게 지옥 같은 저주를 내린 거야. 우리는 그 저주에 휘말려 수백 년간 포기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된 거지.”
각성하지 못한 후손에게 그런 희망을 남겨놓다니. 아무래도 용사는 후손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
하지만, 용사에 대해 말하는 어머니의 표정은 단지 배려가 부족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게 그렇게 안 좋은 거였나요? 희망이 나쁜 건 아닐 텐데.”
내 물음에 어머니는 주먹을 풀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평민에게 귀족이, 그것도 강력한 힘을 가진 귀족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은 절대 좋은 게 아니야.
처음에는 단지 희망을 가지고 기다렸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만으로 끝날 수 없게 되는 거지.”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상속 능력을 가진 귀족과 평민의 골이 깊어질수록, 가문의 희망은 고통으로 변했다.
대전쟁을 승리로 이끈 용사의 말이었다. 용사의 말을 의심할 수 없으니, 가문은 그 이유를 자신들에게 찾게 되었고.
“많은 일이 있었어. 약물을 투여하기도 하고, 다른 유물을 빌려보기도 하고, 조상 중에는 귀족에게 싸움을 걸었던 사람도 있었지.
그러다가 결국, 강한 능력을 가진 지체 높은 귀족에게 딸을 첩으로 보내자는 말이 나왔지.”
설마?
나는 황당한 눈으로 어머니를 볼 수밖에 없었다.
“가문의 역량이 총동원되었어. 지체 높은 귀족의 첩은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으니, 결국, 그 귀족이 가문의 딸에게 반하게 만들어야 했으니까.”
다른 사람의 일을 말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어머니의 얼굴은 그녀답지 않게 일그러져 있었다.
“귀족의 취향을 알아내서 딸을 그 취향에 맞게 가르치고, 우연을 가장해서 귀족이 딸에게 반하도록 상황을 만들고.
그렇게 해서 나는 그레시아 공작의 첩으로 들어오게 되었단다.”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던 어머니는 마지막에 가서 자신의 이야기라고 밝혔다.
용사 이야기를 하면서, 어머니가 생각 이상으로 화를 내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머니는 분노할 만했다.
자신의 이야기였으니.
“나는 죽은 마리아를 원망할 수 없었단다. 그녀의 사랑을 내가 빼앗은 게 맞았으니까.”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나도 화가 났다.
용사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 어머니에게 화가 났다.
“설마, 제가 목숨의 위협을 받는 것을 보면서도 계속 공작가에 머물렀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습니까?”
내 말에 어머니는 화들짝 놀라셨다.
어머니는 고개를 마구 저으며 대답했다.
“아……. 아니야. 아니야. 그건, 내가 공작님을 사랑하게 되어서…….”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이야기인지.
소설보다 현실이 더 어처구니없다지만, 이건 로맨스 소설도 아니고.
설마, 신데렐라 신드롬이라도 걸리셨던 걸까.
뭐, 채 스무 살도 안 된 어린 평민 여성이 첩이지만, 젊고 잘생긴 공작의 아내가 되었으니, 사랑에 빠질 수도 있을 터였다.
공작도 어머니를 계속 좋아했으니.
사실, 잘 이해가 안 되었지만, 그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그렇게 이해하기로 했지만, 어머니의 말을 듣고, 내 입에서 나온 말은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 계속 공작 옆에 계시지. 왜 저와 함께 오셨습니까.”
어머니가 내게 고개를 숙이셨다.
“네게 미안했으니까. 시간이 지나니, 내 욕심 때문에 네가 위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결국, 어머니는 나를 위해 내 영지로 오셨다는 말씀이셨다.
어머니의 말을 들으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결국, 나를 위해 희생하신 것이니.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머니가 말씀을 안 하시려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도 괜히 들었다는 기분이 들었고.
하지만, 듣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계신 어머니께 물었다.
“가문의 시조라는 그 용사. 이름이 노아 진입니까?”
내 말에 어머니가 고개를 드셨다.
붉게 충혈된 눈. 고개를 숙인 채로 울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맞아. 어떻게 안 거냐. 내가 말해준 적도 없고, 가문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을 텐데.”
여기까지 들었는데, 다른 사람일 리가 없었다. 단지, 확인일 뿐이었다.
어머니가 놀란 얼굴로 내게 물었다.
“설마, 그 용사의 능력을 얻은 거냐?”
그녀의 말에 나는 다시 물었다.
“노아 진의 능력이 뭔지 아십니까?”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셨다.
“용사 중에서도 뛰어난 능력이라는 거밖에는 알려진 게 없구나.”
“그럼, 어떻게 능력이 발현되었는지 확인하시려 한 겁니까?”
“그래서 말을 안 하려 한 거란다. 너는 공작가의 능력으로 성공을 했으니. 확인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거지.”
그렇게 말하며, 어머니는 품에서 팔찌 하나를 꺼냈다.
“용사가 남긴 유물이 있단다. 용사의 능력이 각성했다면, 이 유물에 뭔가 반응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단다.”
역시, 유물이 있었다.
선조가 용사이고, 그가 남긴 말이 있다고 하지만, 벌써 수백 년이 지난 일이었다.
단지 전해오는 말로 수백 년간 한 가문이 그 말을 따를 리가 없었다.
이런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그들은 그렇게 희망에 매달린 것이다.
어머니는 팔찌를 내게 건네주셨다.
평범해 보이는 팔찌였다.
하지만, 유물이 맞았다.
그것도 기억이 담긴 유물.
팔찌를 잡자, 세상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