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5화
제15편 용사 (1)
요하나가 가진 두 가지 능력 중 하나인 ‘고속 이동’은 그녀를 반나절 만에 왕국의 직할령을 벗어나, 직할령의 남쪽에 있는 영지까지 오게 했다.
달리는 말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아무리 마나가 많은 기사라도 따라오지 못할 속도.
그렇게 계속 달렸던 요하나는 해가 지기 시작하자, 마나가 고갈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두 가지 능력을 따라올 사람은 없다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귀에 박히게 들었던 샤를 백작의 실력과 힘은 그녀의 발을 계속 움직이게 했다.
검호보다 뛰어나고, 마물 왕마저 혼자 쓰러뜨릴지도 모른다는 기사.
그런 이가 뒤에 있는데, 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마나는 한계가 있었고, 그녀의 걸음은 조금씩 늦어졌다.
결국 마나 고갈로 쓰러지기 얼마 전, 그녀는 석양 아래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홀로 걸어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무도 없는 길을 천천히 걸어가는, 누가 봐도 평범한 여행객처럼 보이는 남자였지만, 요하나는 그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분이 확실했다.
요하나는 속도를 늦추고, 바닥이 드러나고 있는 마나를 갈무리했다.
그러자, 마나 고갈로 어지러웠던 머리가 조금은 맑아졌다.
그녀가 마나를 갈무리하자, 바닥을 보며 길을 걷고 있던 여행객이 고개를 들어 요하나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여행객이 그녀를 보게 된 것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바로 달려가서 인사를 했겠지만, 그녀는 모르는 척, 천천히 걸으며 작게 손을 움직였다.
이제야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듯한 모습.
하지만, 그녀가 하는 동작들은 다가오는 여행객에게 전하는 수신호였다.
오랫동안 용병단에 전해 내려오는 수신호, 앞에서 다가오는 용사가 알려준 수신호로 그녀는 지금 상황을 최대한 자세히 알려주었다.
용병단에 갑자기 찾아온 적과 용사님이 노출됐다는 것, 그리고, 어서 달아나라는 말까지.
말로 하는 것보다 불편한 방법이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녀는 아무도 쫓아오지 못하리라 자신했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했다.
조심, 또 조심,
이것이 수백 년간 용사를 도와온 용병단의 규율이었다.
여행객은 그녀가 전하는 수신호를 전부 알아들었다.
여행객의 걸음이 느려졌다. 그도 방향을 바꿀 모양이었다.
이제, 서로 갈 길을 가면 되었다.
요하나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힘들고 피곤했지만, 맡겨진 임무는 잘 마무리했다.
이제, 서로 갈 길을 가면 되는 것이었다.
현자는 다시 여행을 떠나고, 그녀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다시 용병단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들 죽었겠지만, 확인은 해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검은 선 하나가 아래로 내리꽂혔다.
푹.
화살이었다.
화살은 걸음을 멈춘 여행객과 그녀 중간에 박혀버렸다.
수직에 가깝게 떨어진 것을 보니, 멀리서 쏜 화살이었다.
누구를 겨냥한 것도 아닌 화살.
땅에 박힌 화살은 쇠뇌용 화살처럼 보이는 짧은 화살이었다.
그 화살은 촉부터 깃까지 전부 검게 칠해져 있었다.
분명,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그녀가 놀라 주변을 둘러보려 할 때였다.
팟.
화살이 박혀 있는 곳에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났다.
공기가 출렁이지도 않고, 움직임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분명, 이건 공간이동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따라온 거지?”
갑자기 나타난 사람은 요하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반나절 전에 봤던 샤를 백작이었다.
요하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모습을 감추면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분명, 마나를 볼 수 있다는 카를로스 왕족들도 전부 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따라올 줄이야.
거기다, 대륙의 누구보다 빠르다고 자랑하던 그녀의 ‘고속 이동’도, 저게 백작의 능력이 맞다면, 지금은 쓸모없는 능력일 뿐이었다.
세상에.
진을 그리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동이라니.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요하나는 이를 악물고 마나를 끌어올렸다.
바닥이 보이는 마나를 끌어올리자, 그녀의 몸이 벌벌 떨렸지만, 요하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도망쳤지만, 이번에는 몸을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까지 추적한 것을 보니, 몸을 숨겨도 소용없을 터였다.
그리고, 요하나는 몸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지금 그녀가 도망치는 것은 저 괴물을 유인하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추적했는지 모르지만, 백작이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은 그녀가 능력을 쓰는 것을 멈춘 뒤였다.
그녀가 다가오던 여행객과 아는 척을 하지 않았으니, 아직 그 여행객이 그가 찾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할 터였다.
역시 조심하는 게 맞았다. 이번에도 용병단의 조심성이 빛을 발했다.
이제, 마지막 유인을 할 시간이었다. 조금이라도 유인해서 그분이 달아날 시간을 벌어줘야 했다.
그런 생각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몸을 날렸지만, 이상하게도 쫓아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검이 움직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공간이동으로 나타나지도 않았다.
요하나는 달리면서 뒤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걸음을 멈추었다.
백작은 그녀를 쫓지 않았다.
아니, 그녀에게는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었다.
그는 검은 화살을 뽑아 든 채로 로브를 둘러쓴 여행객을 향해 걷고 있었다.
* * *
운이 좋았다.
이렇게 한 번 만에 ‘현자’로 불리는 용사를 만나게 되다니.
몇 번이나 삶을 반복할 것을 각오했었는데, 몇 가지 운 덕분에 이렇게 한 번에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현자’는 여행객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낡은 로브를 머리까지 꾹꾹 눌러써서 얼굴도 보이지 않았고, 구부정한 등과 헤진 봇짐이 그를 평범한 여행객으로 보이게 했다.
더구나, 어떻게 했는지 그에게서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몰랐으면 나도 그냥 지나쳤을 모습.
실제로 살면서 여러 번 스쳐 지나쳤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눈에 알아봤다.
그의 몸에 빙의해서 기억을 보기도 했지만, 그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유물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우타 공작을 만나서 ‘현자’의 신물에 대해 들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때 들었던 유물을 눈앞에 여행객이 가지고 있었다.
지금 여행객이 기대고 있는 철봉.
지팡이 대용으로 쓰는 것처럼 보이는 긴 철봉이 그의 신물이었다.
올빼미처럼 보이는 문양이 빙 둘러 그려져 있는 철봉을 보니, 왜 용병단 이름이 올빼미의 눈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면서, 바닥에서 뽑아낸 검은 화살을 가슴에 집어넣었다.
이 화살과 쇠뇌도 우연히 도움이 되었다.
쇠뇌와 화살이 없었으면 지금 다시 이쪽으로 달려오는 여자를 놓쳤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빠를 줄이야.
이제는 나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기사의 검’ 덕에, 마나를 볼 수 있게 되었지만, 나는 그녀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니, 그녀의 마나는 점점 멀어졌고, 나는 뒤를 쫓으면서도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기껏 추적할 방법을 찾았는데, 속도가 느려서 놓치게 될 줄이야.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찾아보았다.
달리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
나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전송’ 능력.
나는 수십, 수백 킬로를 단숨에 갈 수 있는 공간이동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 능력은 내 소유의 유물로만 ‘전송’이 가능했다.
여자가 내 유물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그녀를 향해 ‘전송’을 할 수는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유물을 몰래 여자의 품에 넣어놓는 건데.
다시 한번 혀를 차는 순간, 나는 주머니 속에 있는 검은 화살과 쇠뇌가 떠올랐다.
목표를 놓치지 않는 유물이지만, 능력을 쓰면 꼭 망가지는 약점이 많은 유물.
하지만, 능력을 쓰지 않는다면 이 유물 쇠뇌는 망가지지 않는 평범하게(?) 강한 쇠뇌일 뿐이었다.
여자를 쫓기에는 그 평범한(?) 쇠뇌가 안성맞춤이었다.
여자를 쫓다가 거리가 멀어지면, 쇠뇌를 쏘아 보낸 뒤, ‘전송’ 능력을 따라잡고, 거리가 가까워지면 다시 달리고.
나는 그런 식으로 반나절 동안 따라온 것이었다.
마나가 많이 소모되고, 단단한 유물 화살이 필요했지만, 덕분에 새로운 이동 방법을 알아낸 것 같았다.
저벅, 저벅.
내가 바로 앞에 멈춰 설 때까지 ‘현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 앞에 멈춰서서 입을 열었다.
“현자라고 부르는 편이 좋을까요. 아니면 용사라고 부르는 편이 좋겠습니까?”
내 말에 그가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래도 그는 쉽게 인정을 안 할 모양이었다.
역시, 끝까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더구나, 나를 유인하려 했던 여자도 다시 달려들고 있었다.
“샤를 백작! 일반인에게 시비를 걸지 말고, 내게 덤벼라! 죽은 올빼미 용병 단원의 복수를 하겠다!”
일그러진 얼굴로, 눈에 눈물까지 맺힌 채로 나를 향해 달려드는 여자의 모습은 무척이나 훌륭했지만,
달려들며 쏟아놓은 그녀의 지리멸렬한 말 때문에 전부 빛이 바랬다.
나는 혀를 찼고, 여행객, ‘현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들고 있던 기사의 검을 휘둘렀다.
딱!
검 면에 맞은 여성은 바닥에 나뒹굴었고,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그녀가 기절한 이유도 내 검에 맞아서가 아니라, 마나 고갈 때문이었다.
그녀가 기절한 것을 확인한 뒤에 나는 ‘현자’에게 말했다.
“그녀의 말은 틀렸습니다. 용병단 중에 내게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죽을 뻔하고, 휴유증도 엄청나게 남겠지만, 분명 죽은 사람은 없었다.
“복수 때문에 용병단이나 당신을 찾은 게 아닙니다. 마왕과의 싸움 때문에 당신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였습니다.”
나는 진심을 담아 그에게 말했다.
분명,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 진심을 담기 어렵지 않았다.
사실, 대전쟁 때의 용사라고 해도, 말로 설득하는 것보다 힘으로 제압을 하는 게 편했다.
하지만, 힘으로 제압해서는 원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더구나, 대전쟁을 겪은 용사에게 고문이 통할 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이렇게 진심을 담아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제발 좀 믿어줬으면 좋겠는데…….
내 진심 어린 말에도 ‘현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 전처럼 모른 척하지는 않으니, 한 걸음 더 나아간 걸까?
나는 기다렸다. 그가 대답하기를…….
좀 더 시간이 흐르고, 석양이 져서 어둠이 올라오기 시작할 때, 그가 입을 열었다.
“알고 싶은 게 뭐지?”
그는 말을 하면서 머리에 쓴 두건을 젖히고, 몸을 쭉 폈다.
잘생긴 젊은 얼굴이 드러나고, 구부러진 허리가 펴지자, 펑퍼짐한 로브 위로도 건장한 몸이 드러났다.
하지만, 잘생긴 젊은 얼굴에는 수백 년이라는 세월이 내려앉아 있었다.
지치고, 피곤한 얼굴.
수백 년을 살아가고 있는 용사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