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1화
제11편 현자 (1)
절대로 찾지 못할 정도로 깊게 숨겼다고 생각했었다.
유물인 황실 금고가 어떤 공격이라도 막아줄 거로 생각했었다.
발레아의 영역이 도시를 지키고 있어, 문제가 생겨도 괜찮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을 지하 도시로 피난시킨 것이었는데.
그래서, 영지민들과 피난 온 사람들, 고용인들과 고용인의 가족들까지 모두 지하 도시에 숨게 한 것이었는데.
그래서, 어머니를 지하 도시로 모신 것이었는데.
그 지하 도시가 지금 땅에 파묻혀버렸다.
내 영지의 중앙 도시가 있던 자리는 이제 거대한 구덩이로 변해있었다.
수백 미터 이상 아래로 푹 꺼진 지름 수 킬로미터의 거대한 구덩이.
지하 도시는 물론, 지상의 도시도, 도시를 감싸던 성벽도 구덩이 속에 묻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구덩이는 거대한 운석이 떨어진 것 같은, 거대한 화산이 지면을 날려버린 뒤의 모습 같았다.
나는 돌과 바위가 난잡하게 섞여 있는 그 구덩이 안쪽에 주저앉아 있었다.
한쪽 팔이 잘리고, 양쪽 다리가 잘린 채로.
나는 좀전의 마왕과 똑같은 모습으로 땅에 주저앉아 있었다.
내 팔다리는 도시가 무너지는 동안, 마왕이 잘라낸 것이다.
나는 막지 못했다. 아니, 막지 않았다.
지하 도시가 무너지는 순간, 이번 삶은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마왕이 바로 죽일 줄 알았는데, 마왕은 나를 좀전의 자신과 똑같이 만들었다.
빚을 갚으려는 건가?
하지만, 이건 유치하기만 했다.
[왜 그러시는 거예요! 빨리 회복하세요!]
손에 쥐고 있는 검의 정령이 계속 외쳐댔지만, 나는 검의 치유 능력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소용없는 짓이었다.
회복해도 마왕에게 놀아날 시간만 늘어날 뿐이었다.
마왕은 팔다리가 잘린 나를 버려두고, 거대한 구덩이 속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는 구덩이 안을 뛰어다니며, 조금이라도 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다.
지금 그의 지시를 따를 마물이 주변에 없긴 하지만, 저렇게 직접 뛰어다니다니.
마왕은 인간을 죽이는 데 진심인 모양이었다.
나는 마왕이 부상자들을 죽이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하 도시가 사라지고, 소중한 이들을 마왕이 직접 죽이는 것을 봐서인지, 마왕이 신원을 알기 어려운 부상자들을 죽이는 것은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았다.
발레아는 마왕이 내 팔다리를 자르기 위해 달려올 때, 제일 먼저 죽었다.
영역이 파괴된 그녀는 마왕의 공격을 잠시라도 막을 수 없었다.
지금도 내 뒤에 그녀의 시체가 있었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돌아볼 수 없었다.
마왕이 직접 죽인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추락에 살아남은 대공녀와 여왕, 선임 기사들과 오헨 경까지.
마왕이 직접 찾아다니며 죽였다.
그들은 죽으면서도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내가 만든 지하 도시가 무너져 가족이 모두 죽은 것을 알았을 텐데도.
지금 당장 마왕에게 죽을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눈을 마주치고, 목이 잘리면서도 그들은 나에게 원망의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단지, 여왕은 조금 겁먹은 눈으로 나를 보았었고, 대공녀는 서글픈 눈으로 내게 미소를 보냈다.
미겔과 우고는 머리가 잘리기 전에 나를 향해 검을 세웠고, 오헨 경은 슬픈 눈으로 무너진 바닥, 지하 도시 쪽을 봤을 뿐이었다.
그렇게 소중한 이들은 먼저 마왕에게 목숨을 잃었고, 이제는 운 좋게 목숨을 구했던 이들이 마왕의 손에 죽게 된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살아남은 사람들을 모두 죽인 마왕이 내게 다가왔다.
마왕은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저렇게 고개를 갸웃거리니, 웃기기도 하고, 괴기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마왕은 벌거벗은 채로 내게 물었다.
“왜, 도망치지 않았지? 내가 펼쳐 놓은 마나 때문에 멀리 도망치지는 못했겠지만, 도망치면서 몸을 회복하면 조금이나마 기회가 있었을 텐데.”
확실히 마왕의 말대로였다.
지금 내 머릿속에서 목이 터지라고 외치는 검도 같은 식으로 말하고 있었고.
하지만, 그래봤자 의미가 없었다.
어머니가 죽고, 도시가 무너지고, 발레아와 소중한 사람들이 죽었다.
혼자 살아남는다고 해도 의미가 없었다.
“아니면, 죽여달라고 덤벼들 수도 있는데 말이야.”
페널티 때문에 자살은 무리였지만, 마왕 말대로 회복하며 계속 덤벼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내 잘못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핑계로 만들어 놓은 모래성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동안, 삶을 반복하면서 내가 해온 일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일인지, 직접 경험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내가 죽은 뒤에도 세상이 그대로 남게 될까 봐 준비했던 많은 일들.
자기만족이라는 핑계까지 대면서 해온 일들이 얼마나 허무한 것들인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 많은 삶들이 평행세계처럼 계속 흘러가고 있다면, 내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준비했건 간에, 그 세상은 마왕에게 멸망했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자기만족이 아니었다. 단지 외면을 했을 뿐이었다. 최선을 다했다는 핑계를 대기 위한 외면.
그 결과 이렇게 내 눈앞에서 모든 이들이 죽어 나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들의 죽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 잘못이었으니까.
“재미없는 것 같군. 고통스러워하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고, 좌절하지도 않는다니.”
마왕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더니, 검을 들어 올렸다.
“아쉬워. 검이 내 말도 좀 들어줬으면 회복시켰다가 다시 자르고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냥 끝내야겠군.”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신검이었다.
내 팔을 자르고 가져갔는데, 마왕은 그 검을 평범한 검처럼 쓰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잘만 회복시켜주는 검이었는데, 역시 성물답게 마왕에게는 힘을 빌려주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역시, 마왕이 나를 살려 둔 것은 마지막 장난감을 남겨 둔 것이었다.
나 같은 인간이 더 없을 것 같아서 좀 더 살려두고 재미를 보기 위해.
도망쳐도 되고, 검으로 치료해주어도 되고.
그렇게 생각하고 나를 살려 둔 것이었다.
하지만, 도망치지도 않고, 치료도 불가능해졌으니, 이제 남은 것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번에는 저번 삶에서처럼 부하로 들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다행이었다.
이번에 자살을 하게 되면 페널티가 어떻게 될지 걱정이었는데.
쓸모가 없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마왕은 고민하지 않았다.
마왕의 검이 빠르게 움직였고.
“금방 찾아가겠다.”
나는 그에게 이번 삶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했다.
동시에 시야가 뒤집히고, 마왕의 얼굴이 거꾸로 보였다.
잘린 머리가 공중에서 빙글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런데, 나를, 잘린 내 머리를 바라보는 마왕의 표정은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이 아니라, 뭔가에 매우 놀란 얼굴이었다.
마왕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어두워지는 시야 속에서도 나는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깜깜해졌다.
* * *
<사망하셨습니다.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어두웠던 세상이 다시 밝아졌다.
통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잘렸던 팔에서 잘렸을 때의 고통이 다시 느껴지고, 양다리도 환상통이 느껴졌다.
잘렸던 목은 타 틀어가는 듯이 아팠고.
하지만, 나는 그 고통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더 고통스럽고 힘든 이들도 모두 받아들인 고통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다시 살아난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텐데.
고통을 버티며 주위를 살피니, 예상대로 이곳은 지하 도시였다.
내 영지 아래 만들어 놓았던 지하 도시가 아니라, 황궁 터에 있던 지하 도시. 언데드 도시였다.
고개를 내리니 내 앞에 투구가 벗겨진 마물 기사가 누워 있었다.
역시, 시간도 마물이 된 고대 제국의 황태자와 해골을 죽인 뒤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다음 순서로 저번 삶에서 했던 것처럼 큐브를 소환해서 지하 도시에 쌓여 있는 마나를 모아야 했다.
하지만, 나는 큐브를 꺼내지 않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떠 있던 메시지창의 내용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마왕에게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위대한 업적입니다. 경험치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벌칙이 사라졌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었다.
마왕을 죽이지 못해서 변화가 없을 줄 알았는데, 마왕을 한 번 박살 낸 것만으로도 경험치가 오른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마왕에게 죽으면서도 벌칙 때문에 걱정이 많았었다.
이번에 벌칙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이번 삶에서부터 벌칙을 없애기 위해 마물들을 잡으러 다녔을지도 몰랐다.
“설마……. 돌아오신 건가요?”
내가 허공을 보고 있자, 옆에서 발레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내 옆에 발레아가 있었다.
발레아는 지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방금 싸움이 끝나서 저렇게 지쳐 보이는 것일 터였다.
어쨌거나 그녀는 살아 있었다.
마왕의 손에 내 눈앞에서 죽은 발레아가 아니라, 살아 있는 발레아.
발레아가 죽은 것을 처음 본 것은 아니었고, 이렇게 돌아온 것도 처음이 아니었지만, 발레아는 전과 달라 보였다.
아니, 내가 전과 달라졌다.
“네. 계획대로 안 되었습니다. 다른 방법을 써야겠네요.”
나는 발레아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분명, 발레아에게 내 능력을 이야기해주면서 모든 것을 말해 주기로 했었는데…….
이렇게 금방 말을 바꾸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조금 전에 겪은 일을 발레아에게 모두 말해 줄 수는 없었다.
그런 지독한 경험을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괜히 말했다가 앞으로 할 일에 방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이번 삶도 없어질 테니.
쓸모없어질 일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괜찮아요? 표정이 많이 안 좋아요.”
표정이 안 좋았나? 무표정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발레아에게는 숨기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아직, 통증이 남아 있어서…….”
나는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실, 환상통은 이제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아픈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아무래도 잘못한 모양이었다.
전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터놓지 않았다면, 이렇게 충격을 받지도 않았을 텐데.
발레아에게 비밀을 이야기하고 결혼을 하게 된 뒤로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었다.
발레아와 결혼을 하게 될 때 분명 각오한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더 힘든 것 같았다.
“곧 괜찮아질 겁니다.”
삶을 반복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번에 꽤 충격을 받았지만, 곧 괜찮아질 게 분명했다.
그리고, 나는 전처럼 큐브를 소환해서 지하 도시의 마나를 끌어들였다.
전처럼 죽음의 성물, 큐브는 도시의 마나를 빨아들인 뒤, 제힘을 되찾았다.
언데드로 되살아난 마물 기사와 해골은 내게 충성했고, 황궁 터의 지하 도시는 다시 내 도시가 되었다.
그 뒤에 나는 발레아와 함께 제국으로 돌아왔다.
“발레아는 2 황자를 도와주세요. 저는 잠깐 다녀올 데가 있어요.”
발레아는 내 말에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나를 뼛속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기다릴게요.”
나는 발레아에게 감사를 표한 뒤에 대주교의 방을 나섰다.
나는 지하로 내려갔다.
보통 방법으로는 마왕을 죽일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 시간은 많았다.
우선, ‘현자’라 불리는 용사를 찾을 생각이었다.
그에게 봉인이 무엇인지, 알아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