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0화
제10편 마왕전 (3)
마나가 있고, 초능력을 가진 귀족이 있는 이 대륙은 전생에 비해 과학이 발전하지 못했다.
의학은 치유술이 대체했고, 군사력은 귀족의 능력과 마나를 가진 기사가 대신했다.
거기다, 마나와 초능력은 기사와 귀족이라는 소수가 독점하고 있었으니, 대륙의 과학이 발전할 수 없었다.
다만 그렇다고 모두 발전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신들을 지상으로 끌어내릴 정도로 합리적이었던 고대 제국은 많은 발명과 개발을 해 놓았었다.
그중 하나가 광물을 채굴하기 위한 화약이었다.
전차와 전술 병기로 사용 가능한 기사와 귀족이 있어서 군사 무기가 되지는 못했지만, 화약은 지금도 광산용으로 잘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화약을 계속 모아왔었다.
처음에는 지상의 도시를 무너뜨려 지하도시를 숨길 생각이었지만, 계획이 바뀐 뒤에는 준비한 폭약 중 반을 저택에 남겨 두었다.
가히 작은 동산 하나는 무너뜨릴 정도의 화약.
이 정도로 모으면 화약도 능력 이상의 효과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화약을 준비한 것은 많이 모은 화약이 생각보다 강해서가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화약은 마나가 담기지 않아, 마지막까지 마왕이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마왕은 화약으로 인한 파편은 신기에 가까운 검술과 능력으로 대부분 피해냈지만, 거리에 깔려있던 폭약을 터지기 전에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택에 모아놓은 폭약도 마찬가지였다.
마왕은 대공녀의 방어막과 발레아가 만든 돔에 저택과 함께 갇히게 되었어도 전혀 이상한 것을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콰아아아아앙!
폭발은 내 예상보다 내 컸다.
지면이 들썩이고, 이중으로 감싸던 돔이 갈가리 찢겨나갔다.
땅이 너무 흔들려, 지하도시가 무사할지 걱정될 정도였다.
‘전송’으로 돔에서 빠져나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도 대공녀를 데리고 뒤로 물러서야 했을 정도였다.
“쓰러뜨린 걸까요?”
대공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녀의 말에 뭔가 안 좋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마나를 보태지 않았지만, 방어막을 안쪽으로 치고, 그 위에 단단한 흙벽을 덮었다.
그 안에서 폭탄이 터졌으니, 그 파괴력은 방어막과 돔에 막혀 몇 배로 강화되었을 터였다.
물론, 마물이라면 피부를 감싸는 마나방벽 때문에 평범한 폭발은 소용이 없었겠지만, 마왕은 인간이었다.
몇 배나 강화된 폭발을 뒤집어썼으니, 마왕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멀쩡할 리가 없었다.
“대공녀를 모시고 물러나 있어.”
“넵.”
대공녀를 이곳까지 데려온 기사에게 그녀를 부탁한 뒤에 나는 박살 난 돔을 향해 몸을 날렸다.
“발레아는 괜찮아?”
[네. 저는 괜찮아요.]
발레아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마나가 실리지 않은 폭발이라 영역에는 이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저번 삶에서 내가 죽기 전에 발레아가 죽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 최대한 몸을 사리라고 이야기를 해 놓았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멀리서 영역을 이용하라고.
발레아는 언제나처럼 내 말을 잘 들었지만, 항상 조심해야 했다.
내가 위험한 것을 보면 그녀는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나는 거리를 거슬러 올라, 폐허가 된 저택 앞에 도착했다.
발레아가 만들었던 돔은 흔적만이 남아 있었고, 저택이 있던 자리는 거대한 구덩이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그 구덩이 한쪽에 마왕이 있었다.
입고 있던 옷이 모두 사라지고, 한쪽 팔과 두 다리가 떨어져 나간 마왕.
마왕은 금이 간 검을 들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옷이 모두 사라진 마왕의 몸에는 흉이 가득했다.
싸움의 상처가 아니라, 마나 충돌로 생긴 고름과 흉들.
이렇게 맨살을 보게 되니, 온몸에 추악한 문양을 새겨놓은 것 같았다.
지금은 그 문양도 태반이 뭉개져 있었다.
팔 한쪽, 두 다리 만 떨어져 나간 게 아니라, 마왕은 온몸에 화상을 입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예전에 죽었을 상처, 마나를 가진 기사도 버티기 어려운 상처들이었다.
하지만, 마왕의 상처들은 조금씩 낫고 있었다.
전보다 빠른 속도였다.
이대로 놔두다가는 없어진 팔다리도 다시 만들어질지도 몰랐다.
나는 바로 마왕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검에 마나를 가득 담아, 주저앉은 마왕을 향해 내려쳤다.
캉!
마왕이 검을 들어, 내 검을 막아냈다.
세상에.
이런 상처를 입고도 마왕은 내 검을 막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검을 막은 마왕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죽일 수 있어!’
마왕은 약해져 있었다.
한 팔만 남은 상태로도 마왕은 나와 싸울 수 있고, 동시에 몸도 치료할 수 있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캉! 캉! 캉!
내가 사방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잘려 나간 팔다리를 향해 검을 날려도 마왕은 움직일 수 없었다.
거리를 벌리고, 검기를 날려 공격해도, 다리가 없는 마왕은 그 자리에서 막아 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막아 내는 것만 해도 대단했고, 그 와중에도 조금씩 몸이 치료되고 있었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마왕과 싸우는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발레아!”
[네! 가세할게요!]
콰과과곽!
마왕이 앉아 있는 바닥이 솟구치더니, 바닥에서 돌송곳이 치솟아 올랐다.
동시에 마왕은 바닥을 검으로 후려쳐 몸을 띄웠다.
훌륭한 대처이고, 발레아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는 순간이었지만,
계속 공격을 퍼붓는 나에게는 제대로 된 기회였다.
서걱.
마왕이 몸을 띄우는 순간, 나는 마왕의 등을 반쯤 베어낼 수 있었다.
그 뒤에는 마왕이 다시 내 검을 막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마왕이 나를 막는 사이, 발레아가 다시 공격했으니까.
돌송곳이 끝까지 솟아나 결국 마왕의 허벅지를 꿰뚫었고. 땅속에 남아 있던 나무뿌리가 자라나, 마왕의 몸을 붙잡고, 아래로 끌어내렸다.
마왕은 바로 나무뿌리를 베어내고, 송곳을 부쉈지만, 그사이에 내지른 내 검을 막지 못했다.
다시 상처가 추가되었다.
그렇게 발레아와 나의 합공은 계속되었다.
발레아의 공격을 막으면 내 검에 상처를 입고, 내 검을 막으면 발레아의 공격을 받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마왕이 가지고 있던 검이 부서졌고, 마왕의 팔도 잘려 나갔다.
팔다리가 모두 잘려 나간 마왕.
마왕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마왕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무심했다.
물어볼 것이 많았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팔다리가 잘려 나가도 안심할 수 없었다.
나는 마나를 가득 담아, 검을 휘둘렀다.
서걱.
마왕의 목이 잘려 나갔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나는 떠오르는 마왕의 머리를 향해 검기를 날리고, 남은 몸도 산산조각 냈다.
콰앙!
살점이 흩어지고, 피비가 쏟아졌다.
내 몸 위로 쏟아지는 피와 살점.
나는 멍하니 그 피를 뒤집어썼다.
“정말 끝난 건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신도 멍했고.
얼마나 정신이 없는지, 대공녀가 했던 말을 다시 할 정도였다.
“괜찮아요?”
그때 발레아가 내 팔을 잡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젓고 말았다.
분명, 최대한 먼 곳에 있으라고 했는데…….
발레아는 이렇게 당장 달려올 곳에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내가 걱정되어서겠지.
왜 말을 듣지 않았는지 알고 있으니, 발레아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아니, 지금은 발레아에게 화를 낼 정신이 아니었다.
발레아는 어느 것보다 내가 제일 걱정이겠지만,
나는 마왕을 쓰러뜨렸다는 것에 정신이 없었다.
실감을 느끼고, 제정신을 찾으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마왕을 잡았다!”
“이겼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빨리 현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성벽 위, 거리에서 환호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샤를 백작 만세!”
“카를로스 왕국 만세!”
“여왕님 만만세!”
기뻐하고 환호하는 기사들 사이에 환하게 웃고 있는 여왕의 모습이 보였다.
창백한 얼굴로 손을 흔드는 대공녀도 보였고.
무너진 건물 사이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웃고 있는 카트린과 레스티도 보였다.
그리고.
짝짝짝.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손뼉을 치고 있는 마왕이 보였다.
“마왕?”
나는 급하게 바닥을 확인했다.
조금 전까지 웅덩이를 이루고 있던 피가 보이지 않았다.
흩어져있던 살점도 사라져 있었다.
“정말 재미있었어. 이 정도로 준비해 놓았을 줄은 생각도 못 했군.”
나를 한껏 칭찬한 마왕은 이어서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몰랐던 모양이군.”
그리고, 구덩이 밖에 서 있던 마왕은 말을 마치면서 힘껏 발을 굴렀다.
쿠우우우우웅.
마왕이 발을 구른 곳에서부터 마나가 퍼져나갔다.
“윽.”
동시에 발레아가 신음을 흘렸고, 발레아의 영역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마왕이 영역을 알아차리면 더 써먹지 못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저번 삶에서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최대한 숨겼다가 한 번에 폭발시킨 것이었는데…….
하지만, 마왕은 분명히 죽었었다.
혹시 몰라, 잘린 머리와 몸도 박살 냈고, 마나가 사라진 것도 확인했었다.
그런데 저렇게 살아있다니.
설마 환각에 당한 건가?
아니, 아니었다.
다시 나타난 마왕은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검도 들고 있지 않았고.
그 검의 잔해도 내 앞에 남아 있었다.
저건 분명 되살아난 것이었다.
“제국이 망한 뒤, 왜 용사라는 놈들이 나를 봉인했을까? 용사라는 놈들이 너와 이 영지보다 약했을까?”
되살아난 마왕은 전과 조금 달라 보였다. 조금은 표정이 남아 있고, 바로 덤비지 않고 여유롭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돌아온 뒤에 이렇게까지 나를 갈아버린 것은 세 번밖에 없었지만……. 제국도 한번 나를 죽였었고, 용사 놈들도 나를 죽였었지.”
맙소사.
마왕의 진정한 힘이 마물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건가.
“제국은 그 뒤에 나에게 멸망했고, 용사놈들은 나를 죽이지 못하자, 능력으로 나를 봉인했었지.”
그리고, 용사들은 진짜로 마왕을 죽일 방법을 찾지 못해서 마왕을 봉인한 거였다는 건가.
“나를 죽일 수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군. 재미있었어. 봉인을 풀고 나온 보람이 있는 시간이었어.”
즐거운 듯이 말을 하는 마왕.
마왕은 그 말 뒤에 의미심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보다, 재미있는 걸 숨겨놓았군.”
그는 주먹을 쥐고, 힘껏 아래로 내려찍었다.
쾅!
주먹이 땅에 박혔다.
설마?
“정말 깊숙이 숨겨두었군. 하지만, 이걸 못 찾으리라고 생각했나?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인간을 없애리라 다짐했던 내가?”
쾅!
땅에 박아넣은 마왕의 주먹에서 엄청난 마나가 퍼져나갔다.
동시에 발아래에서 뭔가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황실 금고가……. 망가졌어요.”
발레아가 바닥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마왕은 주먹을 땅에 박아넣은 채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작별 인사를 하도록.”
마왕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멈춰!”
나는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마왕을 향해 몸을 날렸다.
몸을 날리자, 마왕의 얼굴이 확 다가왔다.
나를 비꼬던 마왕의 얼굴은 어느새 무표정하게 변해있었다.
나를 유인하기 위해 내뱉은 말이었을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으련만.
마왕의 팔에 다시 마나가 모였다.
팔이 환하게 빛났다.
성벽을 부쉈던 그때 보았던 빛이었다.
설마, 저게 검이 없어도 쓸 수 있었던 것이었나?
안돼.
제발.
이건 내 앞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야.
나는 마왕에게 달려들며, 믿지 않는 신들에게 기도했다.
셀린 여신. 전쟁 신.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교단의 신까지.
하지만, 그 신들은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내 검은 마왕에게 닿지도 않았다.
마왕이 다른 손으로 쏘아낸 검기에 나는 튕겨 나가버렸고, 마왕이 땅속으로 성벽을 부수었던 마나를 밀어 넣었다.
쿠우우우우웅.
빛도 없고, 폭음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거대한 진동이 울릴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무너져내렸다.
건물이, 바닥이.
내 도시 전체가 무너져내렸다.
지하도시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