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8화
제8편 마왕전 (1)
아래로 낙하하면서 점점 다가오는 마왕의 얼굴.
두건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마나 충돌로 엉망이 된 그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나는 전쟁 신의 검. 신의 성물에 가득 마나를 담아 마왕을 향해 휘둘렀다.
예상대로 마왕은 내가 휘두른 검을 막아 냈다.
콰아아앙!
폭음이 일고, 몸이 튕겨 나갔다.
팔이 떨어질 듯이 아팠다.
역시, 내 모든 힘을 다 쏟아도, 마왕의 검을 뚫어내지 못했다.
분명, 마왕이 가지고 있는 검은 내가 들고 있는 검과 달리, 평범한 검처럼 보였는데…….
그런 검으로도 마왕은 쉽게 나를 막아선 것이다.
‘역시, 정공법으로는 답이 없군.’
그건 요새에서 싸웠을 때부터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제국의 검호 정도는 쉽게 이길 수 있었지만, 마왕과 제대로 싸웠다가는 1분도 채 버티지 못할 터였다.
검술도, 마나의 총량도 마왕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마왕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어디가 끝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동안 마왕은 몇 가지 능력만 사용했었지만, 문제는 볼 때마다 새로운 능력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쓸 필요가 없으니 안 쓰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런 마왕을 상대로 정면 대결을 한다는 것은 자살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나는 자살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성벽 반대쪽으로 튕겨 나가는 도중에도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검에서 검기가 튀어 나가고, 마왕과 나 사이에 쉴 새 없이 폭발이 일어났다.
내가 검기를 날린 것처럼 마왕도 바로 내게 검기를 쏘아낸 것이다.
당연히 마왕 쪽 검기가 훨씬 셌지만, 어쨌거나 검을 떠난 검기였다.
강약에 상관없이 허공에서 검기가 부딪히면 터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왕의 공격을 막아 낸 뒤에 나는 땅에 내려섰다.
바닥에 내려선 뒤에도 쭉 밀려나는 몸.
충격의 여파가 장난이 아니었다.
억지로 멈춰 서면 멈출 수 있었지만, 나는 뒤로 밀리는 몸을 그대로 놔뒀다.
내가 밀려 나가는 사이, 내 주위에서 흙벽이 올라와 마왕의 시선을 가렸다.
발레아가 손을 쓴 것이었다.
나는 벽이 솟구치는 것을 보자마자, ‘전쟁 신의 검’을 뒤로 던졌다.
동시에 다른 손을 옆으로 뻗었다.
그리고, 급하게 입을 열었다.
콰아아앙!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다음 순간, 강렬한 빛과 함께 겹겹이 솟아오른 흙벽이 모두 터져나갔다.
순식간에 몇 겹으로 쌓아 올린 흙벽이었지만, 마왕의 공격을 막기는 무리였다.
마왕은 박살 난 흙벽들 안쪽, 조금 전까지 인간이 있었던 구덩이에 서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놓친 건가?”
분명, 피할 시간이 없었을 텐데, 잡은 것 같은 느낌이 안 들었다.
물론, 지금 공격이라면 웬만한 적은 흔적도 남지 않겠지만, 지금 상대하는 인간은 그런 약해빠진 인간은 아니었다.
결국, 마왕의 눈과 공격을 피했다는 소리였다.
마왕은 재미를 주었다고, 봐주는 이가 아니었다.
더구나, 두 번째 만남이니 실력을 확인한답시고 여유를 줄 이유도 없었다.
마왕은 지금 공격에 최선을 다했었다.
상대의 검을 막고, 검기를 날린 뒤, 뒤따라 몸을 날려 공간 자체를 박살 내버렸다.
혼자서 이런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대전쟁 때도 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도망친 건가.”
최선을 다한 자신의 검을 피한 것은 재미있었지만, 요새 때처럼 또 도망친 것은 마음에 안 들었다.
한 번 공격한 뒤에 또다시 도망쳐버리다니, 이러면 재미보다 귀찮음이 더 커질 뿐이었다.
“또, 남은 놈들이나 죽여야 하나…….”
마왕은 눈살을 찌푸리고, 성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때, 반대편에서 검기가 날아왔다.
서걱, 서걱.
마왕이 검을 휘두르자, 날아오던 검기가 그대로 잘려 나갔다.
마왕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검기가 날아온 곳을 쳐다보았다.
성벽에서 멀리 떨어진 벌판에 도망친 것으로 생각했던 인간이 서 있었다.
마왕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진을 이용해서 도주한 게 아니란 말이군. 따로 공간 이동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걸까?”
어느 쪽이든 도망치지 않은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방금 전까지 공간 이동진 같은 게 보이지 않아, 따로 조처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공간 이동을 하는 것을 봤는데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마왕은 다리에 마나를 모아 발을 굴렀다.
쿵!
땅을 구른 발에서 마나가 퍼져나갔다.
마왕을 중심으로 마나가 끝없이 퍼져나갔다.
성을 지나고, 벌판을 가득 메우며 마나는 계속 퍼져나갔다.
당연히 마나는 벌판 가운데 서 있는 인간을 지나갔다.
마나가 퍼져나갔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마물들이 강해지거나, 인간들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았다.
단지, 공간 이동이 막혔을 뿐이었다.
공간 단절.
이것도 마왕이 가진 능력이었다.
“그럼 끝내러 가볼까.”
마왕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발을 박찼다.
쿵.
마왕은 엄청난 속도로 인간, 알렉스를 향해 쏘아졌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알렉스 앞에 도착했다.
마왕과 알렉스는 다시 검을 교환하고, 황당하게도 또다시 알렉스가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마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공간 단절로 막지 못하는 공간 이동이라고?”
이건 마왕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시간이 흘러, 새로운 능력이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검기가 날아오는 게 느껴졌다.
마왕은 그 자리에 서서 검을 휘둘렀다.
또다시 잘려 나가는 검기들.
마왕은 고개를 들어 검기가 날아온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 인간이 서 있었다.
성에서 더 멀어진 벌판에 공간 이동을 한 인간이 서 있었다.
“재.미.있.군.”
이번에는 마왕의 표정과 말투가 재미있어 보이지 않았다.
마왕은 다시 인간을 향해 몸을 날렸다.
농락당하는 느낌이었지만, 마왕은 개의치 않았다.
모르는 능력이었지만, 싸우다 보면 결국 알아낼 수 있었다.
더구나, 어차피 저 인간은 마나양도 많지 않았다. 이렇게 쫓다 보면 공간 이동을 쓰지 못할 때가 올 터였다.
그때 죽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마왕의 생각과 달리, 싸움은 한참 동안 이어졌고, 마왕은 점점 성에서 멀어졌다.
‘헉, 헉, 정말 외줄 타기네.’
나는 달려오는 마왕을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전송’을 수십 번이나 했는데, 달려오는 마왕의 마나는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쏟아부었다.
달려오는 마왕에게 검기를 날리고, 감각과 마나 감응력을 필사적으로 돌려 마왕의 검을 피하고, 마나로 검을 늘려 기습을 가했었다.
신검으로 마왕 내부를 흔들어보기도 하고, ‘전쟁신의 검’과 ‘기사의 검’으로 다친 몸을 계속 치료했다.
오죽했으면, 검은 쇠뇌를 쏘아 보기까지 했을까.
하지만, 그 모든 공격은 마왕에게 효과가 없었다.
마왕은 나보다 마나를 더 잘 느꼈고, 나보다 검기를 잘 토해냈다.
나보다 검술이 뛰어났고, 평범한 그의 검은 내 검들보다 더 단단했다.
결국, 내가 가진 능력 중에 나를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것은 장비 소환, ‘전송’ 능력이었다.
특정 위치로 사람을 옮겨주는 공간 이동과 달리, 내 전송 능력은 유물이 있는 곳으로 나를 옮겨주는 것이었다.
지금 위험할 때마다 마왕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내 유물을 향해 ‘전송’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미리 유물을 벌판에 뿌려둔 것은 아니었다.
마물들이 몰려오고, 싸움이 계속되는데, 벌판에 뿌려둔 유물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나는 벌판에 유물을 뿌려두는 대신에 발레아에게 부탁했었다.
내가 버린 유물을 땅속으로 옮겨달라고.
나는 매번 검을 미리 다른 곳에 던져버리고, 전송 능력을 썼다.
그 검은 발레아가 땅속을 통해 다른 곳으로 옮겼고, 나는 그녀가 옮긴 곳으로 다시 내 몸을 전송한 것이었다.
마왕이 달려오면 몇 합도 겨루지 않고, 다시 멀찍이 자리를 피하고, 그곳으로 마왕이 달려오면 다시 몇 번 검을 섞지도 않고, 다른 곳으로 옮기고.
다른 사람들이 보면, 내가 마왕을 농락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건 정말 죽음의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이었다.
마왕의 공격은 한순간만 삐끗해도 바로 죽을 수밖에 없는 공격이었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공격이었는지, 전송하기 전에 여러 번 죽기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다.
상처를 치료하는 신검과 ‘전쟁 신의 검’이 없었다면, 이미 죽었을지도 몰랐다.
더구나, ‘전송’마저도 쉽지 않았다.
‘전송’은 공간 이동과 다른 능력이지만, 아예 상관없는 능력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조금 전에 마왕이 펼친 마나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분명, 그때 마왕이 펼친 마나는 공간 이동을 막는 결계 같은 것이었다.
공간 이동이 아니라서 ‘전송’ 자체가 막히진 않았지만, 대신 마나 소모가 극심해졌다.
‘전쟁 신의 검’이 없었다면 벌써 마나가 다 떨어져서 마왕의 손에 죽었을 것이었다.
더구나, 마왕이 펼친 결계 때문에 밖으로 이동할 수 없게 되었다.
도시 멀리 ‘전송’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물론, 그건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영지와 사람들을 놔두고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 도망칠 필요가 없었다.
“이걸 노린 건가?”
또다시 자리를 옮긴 나를 마왕이 쫓지 않았다.
마왕은 나를 쫓는 대신 고개를 돌려 멀리 떨어진 성벽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거대한 방어막이 펼쳐져 있는 성벽은 조금 전과 달리, 조용했다.
성벽을 기어오르던 마물도 보이지 않고, 성벽 아래 모여있던 마물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성벽 아래 마물들의 시체가 가득 쌓여 있었다.
도시를 공격하던 마물이 모두 죽은 것이다.
마왕의 통솔을 받지 않은 마물들이고, 마왕이 대부분 죽이긴 했지만, 남은 마물들도 적은 수가 아니었다.
내 기사와 수하들이 그 마물들을 모두 죽인 것이었다.
나와 발레아가 마왕을 끌고 다니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그 마물들을 모두 죽이다니, 나는 내 동료와 수하들이 자랑스러웠다.
나는 마왕의 물음에 씩 웃어주었다.
갑옷이 넝마로 변하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지만, 결국,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다.
“성에서 기다리지.”
나는 마왕에게 말한 뒤, 머릿속으로 지팡이를 떠올렸다.
전송.
한순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나는 이제 벌판이 아니라, 대공녀가 든 지팡이 앞, 성벽 위에 서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공녀와 여왕, 기사들과 여러 귀족. 그리고, 병사들까지.
다들 지쳐 보였지만, 모두 무사했다.
대공녀의 방어막이 모두를 지킨 것이다.
“모두 수고했습니다.”
내 말에 여왕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한 건 얼마 없었어요. 발레아 님이 대부분 잡으셨어요.”
여왕은 백작 부인이라는 말 대신, 아직도 발레아를 예전 이름으로 불렀다.
어쨌거나 여왕의 말대로였다.
발레아는 나를 도와주는 동시에 그동안 준비해온 영역을 움직여서 마물들을 쓸어버린 것이다.
이것도 계획대로였다.
괜히 마왕을 멀리 끌고 간 게 아니었다.
마물들을 쓸어버리는 것을 마왕이 모르게 하는 것은 물론, 발레아의 영역을 마왕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발레아, 고생했어.”
여왕의 말에 나는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느새 옆에 나타난 발레아가 내 말에 미소를 지었다.
나는 발레아와 사람들을 둘러보고,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점으로 보이던 마왕이 성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그동안 계획의 마지막을 장식할 때가 되었다.
내 영지와 마왕과의 마지막 싸움.
마왕 레이드가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