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6화
제6편 마상 돌격
어두운 지하동굴에 말들이 달리는 소리가 가득 찼다.
기사 둘이 횃불을 들고 있어 빛이 없는 지하동굴이라도 기사들이 말을 달리기 어렵지 않았다.
물론, 나는 빛이 없어도 잘 볼 수 있었지만.
그렇게 말을 달리자, 곧 동굴의 끝에 도착할 수 있었다.
흙으로 막혀 있는 동굴의 끝.
하지만, 나와 기사들은 말이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대신 더 빨리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벽에 부딪히기 직전.
크르르릉.
흙이 무너져내렸다. 무너진 벽 뒤로 환한 빛이 흘러들어왔다.
발레아가 때를 맞춰 입구를 연 것이다.
우리는 발레아가 연 입구로 달려 나갔다.
크앙!
그르르르르르!
컹! 컹!
빛이 눈에 익기 전에 먼저 마물들의 괴성이 들려왔다.
어느 한 방향이 아니라, 모든 방향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빛이 눈에 익은 뒤에 보게 된 광경도 들려오는 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아무래도 입구를 너무 잘 만든 모양이었다.
우리는 마물들이 진을 치고 있는 한가운데로 뛰쳐나온 것이었다.
크아아앙!
갑작스럽게 무너진 땅에서 튀어나온 사람들을 보고, 마물들이 괴성을 질러댔다.
평범한 마물들이라면 괴성과 함께 달려들었겠지만, 마왕의 통솔을 받는 마물들은 달랐다.
마물들은 우리를 보고, 괴성만 지를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분명, 마왕이 내린 명령과 본능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평범한 마물들이 모여 있다면 이렇게 마물들 중앙에 모습을 드러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움찔하는 말의 고삐를 낚아채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전속 돌파! 마물 진영을 횡단한다!”
내 말에 마물들을 보고 놀란 기사들이 정신을 차렸다.
우고 선임 기사가 내 뒤를 이어 큰 소리로 외쳤다.
“앞 사람을 놓치면 끝이다! 무조건 따라잡아!”
미겔도 이어서 외치고, 박차를 가했다.
“마물을 상대하지 마! 진영만 흔들면 돼!”
나와 기사들은 동시에 북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방어막을 펴!”
앞을 가로막는 마물을 베어 넘긴 뒤, 나는 따라오는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우우우웅.
기사들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반지에서 방어막들이 솟아나 말을 모는 우리들을 겹겹이 에워싸기 시작했다.
우리 주변을 감싼 것은 귀족들이 많이 차고 다니는 그 방어막이었다.
사실, 여러 번 막지도 못하고, 공격하는데 거슬려서 기사들은 잘 쓰지 않는 유물 방어막이었지만, 지금 같은 경우에는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지금 우리는 마물 군단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것은 마물을 한 마리라도 더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 마물 군단의 진영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였다.
마왕의 장악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이 피를 본 마물들을 모두 완벽하게 통솔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건 인간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마왕의 능력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마물들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면 그만큼 더 헤집고 다닐 수 있으니까.
물론, 마왕이 눈치를 채고 제대로 포위망이 구축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전에 기사들을 데리고 탈출할 자신이 있었다.
나는 검에 마나를 불어넣은 뒤, 힘껏 앞으로 내질렀다.
콰과과과과!
검에서 검기들이 튀어 나가 앞을 가로막는 마물들을 썰어댔다.
갈가리 찢긴 살점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마물의 피가 비처럼 쏟아졌다.
“맙소사…….”
뒤에서 놀란 음성이 들려왔지만, 그런 소리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마물들의 움직임이 달라지고 있었다.
카아아악!
피를 본 마물들의 살기가 점점 짙어지고, 눈이 벌겋게 변한 마물들이 마왕의 제어를 끊으려 했다.
이 정도면 마왕도 눈치를 챘을 터였다.
하지만, 북쪽에서 다가오고 있는 마왕의 마나는 조금도 속도가 변하지 않았다.
역시, 예상대로 마왕은 이 정도 일에 계획을 바꾸는 이가 아니었다.
마왕의 힘과 실력이라면 함부로 움직일 필요가 없는 게 당연했지만, 그 덕에 이렇게 뭔가 해볼 여지가 생겼다.
결국, 마물 사이로 퍼져나간 광기는 마왕의 지배력을 넘어섰다.
그 자리에서 내 공격을 감수하던 마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지나가도 지켜보고만 있던 마물들이 괴성을 지르며 나와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방어막이 있다! 막으려 하지 마! 그냥 달려!”
“힘을 비축해! 방어막이 사라지면 어차피 죽도록 싸울 테니!”
내가 따로 외칠 필요가 없었다.
우고와 미겔이 기사들의 양쪽 끝에서 달리며 모두에게 외치고 있었다.
펑! 펑! 펑!
마물들이 달려들자, 방어막이 차례로 터져나갔다.
손톱이 지나가면 방어막 하나가 깨져나가고, 코뿔소를 닮은 마물이 몸을 들이박으니, 방어막이 버티지 못하고 터져나갔다.
불을 뿜는 개구리를 닮은 마물 옆을 지나갈 때는 방어막 여러 개가 동시에 녹아버리기도 했다.
나는 선두에서 길을 열고 있었기에 옆에서 달려드는 마물들을 전부 막아줄 수 없었다.
결국, 마물 진영을 전부 가로지르기 전에 방어막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부터 마물과 기사들이 직접 마주칠 시간이었다.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검을 들어 올렸다.
“샤를 기사단의 실력을 보여줄 때다! 덤벼오는 마물들을 모두 쓸어버려라!”
미겔이 모두의 사기를 올리는 고함을 질렀고,
“막고 뒤로 흘리기만 하면 돼! 끝을 볼 생각을 하지 마!”
우고가 현실적인 조언을 했다.
그리고, 마물들이 들이닥쳤다.
기사들은 말을 달리며, 있는 힘껏 검을 휘두르고, 마물들은 기사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서걱! 쾅!
크아아앙!
마물이 검에 잘려 나가는 소리와 마물과 기사가 부딪치는 소리, 마물들의 괴성이 전장에 가득 찼다.
기사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잘 싸웠다.
그들의 창과 검은 마물들을 땅에 구르게 했고, 그들의 열기는 덤벼드는 마물들을 주춤하게 했다.
하지만, 그런 기백과 실력으로도 이 거대한 마물의 무리를 모두 빠져나오기는 어려웠다.
퍽!
“제……. 젠장!”
사람은 잘 싸워도, 말은 마물의 공격을 버티지 못했다.
마물의 공격에 말이 땅을 구르고, 말을 타고 있던 기사 하나가 말에서 뛰어내렸다.
우리는 계속 달리고 있으니, 당연히 그는 뒤에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
“안토니오 경이 낙오했습니다!”
옆에 있던 기사가 낙오한 기사를 보고 소리쳤지만, 우고도, 미겔도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그냥 달려!”
“말을 멈추지 마!”
낙오한 기사는 잠깐 사이에 몰려드는 마물들에게 묻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만이 아니었다.
다른 기사들도 버티지 못하고 차례로 낙오했다.
디오구가 들고 있던 깃발도 어느 순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각오한 일이었지만, 따라오는 기사들의 말발굽 소리가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몸에 상처가 하나씩 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수많은 삶을 거치면서도 이런 감정이 남아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필요한 일을 하는데,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 게 거추장스럽기도 했다.
그런 복잡한 기분을 느끼며, 계속 마물들을 가르고 달려가니, 결국, 마물들이 없는 곳으로 빠져나오게 되었다.
드디어 마물 군단을 횡단한 것이다.
뒤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를 따라오는 기사들은 이제 반만 남아 있었다.
나머지 기사들은 모두 뒤에 남겨진 것이다.
그래도 우고와 미겔, 노기사 오헨은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똑같이 사람을 대해야 하는 영주로서는 실격이겠지만, 그들이 모두 무사히 빠져나온 것에 안도했다.
“마물들이 따라옵니다!”
“좋아! 계획대로 방향을 바꾼다!”
따라오는 마물들의 마나로 알고 있었지만, 나는 우고의 외침에 큰소리로 대답했다.
사람들을 많이 잃었지만, 결국, 마물들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내 명령에 모두 말 머리를 바꾸었다.
마물 군단을 옆으로 관통한 뒤, 바로 도시로 향한 것이었다.
당연히, 우리를 쫓아오던 마물들도 방향을 바꿔, 도시로 향하기 시작했다.
마치, 옆구리에 구멍이 나서 피가 쏟아지는 것처럼 우리를 따라, 진영 사이에서 마물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리고, 그 마물들 때문에 마물 군단의 진영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리를 따르는 마물만이 아니라, 마물 군단 전체가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마물 군단은 그 자리에 서서 마왕을 맞이했겠지만, 나는 그런 장면을 또 볼 생각이 없었다.
그걸 또 보게 된다면, 성벽을 부수는 마왕의 검을 또 보게 될 뿐이었다.
나름 준비는 하고 있지만, 이왕이면 그 검을 내지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더 좋았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마물들을 도시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마왕이 도착하기 전에 마물들과 난전을 벌이고 있다면, 마물들 때문에 마왕도 함부로 공격을 못 할 테니까.
공격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죽어 나가는 것은 마물들일 테니.
우리는 성문이 아니라, 성벽을 향해 말을 몰았다.
나는 맨 뒤로 물러서서 추격하는 마물들의 속도를 늦췄다.
기껏 마물들을 움직였는데, 여기서 잡힐 수는 없었다.
성벽이 가까워지자, 이번에도 성벽 아래에 땅이 푹 꺼졌다.
물론, 발레아가 한 일이었다.
우리는 말을 달려, 성벽 아래에 만들어진 동굴로 뛰어들었다.
내가 맨 마지막에 들어서자, 흙이 쏟아져 동굴 입구가 막혔다.
그리고, 우리가 달려가는 동안, 동굴은 우리의 뒤를 따라서 계속 무너졌다.
땅을 파는 마물이 우리를 쫓아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성벽 아래에서 지하로 들어가서인지, 이번에는 금방 지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우리가 나온 곳은 처음 도시를 빠져나갔던 곳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히이이잉!
도시에 도착하니, 말들이 탈진해서 바닥에 쓰러졌다.
몇몇 말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경련을 일으켰다.
세뇌가 풀린 모양이었다.
이 말들은 출발하기 전, 동물을 정신을 조작할 수 있는 귀족이 세뇌했었다.
대단한 군마들이라고 해도, 말들이 저런 마물들 사이에서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미리, 정신을 조작한 것이다.
이제 세뇌가 풀렸으니, 마물 군단을 지나온 충격을 고스란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말들은 이제 군마로 써먹기는 어려울 듯했다.
아니, 짐말로 쓸 수나 있을지 몰랐다.
가혹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신이 부서진 말들도 안타까웠지만, 조금 전에 같이 떠났던 기사들도 이제 반도 남지 않았다.
더구나, 그들을 위로할 수도 없었다.
나는 죽은 이들을 마음에 담아두고, 기사들과 함께 성벽 위로 올라갔다.
크아아아아앙!
거대한 마물들의 해일이 밀려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어그로가 잘 끌린 것인지, 마왕이 제어를 포기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마왕이 도착하기 전에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벌판을 가득 메울 정도로 대단한 수였지만, 마왕이 통솔하지 않는 마물들의 웨이브였다.
이건 해볼 만했다.
나는 북쪽을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모두 공격하라! 인간의 힘을 보여줘라!”
점점 다가오는 마왕의 마나를 보며, 나는 힘차게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