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3화
제3편 여왕과 불새 사냥꾼
마왕이 다시 나타난 이상, 땅 위에서는 숨을 곳이 없었다.
마물들은 바다를 건너고, 빙하지대에 숨어도 날아서 찾아왔다.
“결국, 땅속에 숨는 방법밖에 없는 건가.”
하지만, 그것도 잠깐의 도피일 뿐이었다.
사람은 땅속에서 영원히 살 수 없었다.
만약을 위해 지하 도시를 만들었지만, 그건 싸우는 이들을 안심시키는 역할 이상을 하기는 어려웠다.
“그 용사가 낙원을 만든 것과 같은 이유이려나…….”
어쨌거나, 대륙에서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마왕을 죽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마왕의 손발을 자를 필요가 있었다.
서걱!
전갈을 닮은 거대한 마물의 앞다리가 검에 잘려 나갔다.
앞다리가 잘려 나간 마물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다리가 잘려 나간 마물이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다른 때였으면, 피를 피하고 마물을 마무리 지었겠지만, 이곳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다른 마물들이 반쯤 부서진 성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저 성문을 부순 것은, 지금 다리가 잘린 채로 난리를 피우고 있는 전갈을 닮은 마물이었다.
이 마물은 막아서는 기사들을 갈아버리고, 방금 잘린 집게 팔로, 한 방에 외성의 철문을 박살 냈었다.
나는 쏟아지는 피를 그대로 맞으며 달려가는 마물들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부우우웅.
마나가 가득 담긴 검이 시야를 반으로 갈랐다.
검은 단지 허공을 갈랐지만, 검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직 빛나는 선이 남아 있었다.
대검에서 쏘아진 검기였다.
검기는 내 시야를 가른 것처럼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무도 풀도, 성문을 향해 달려가는 마물들까지.
퍼퍼퍼퍼퍽.
마물들이 달려가는 모습 그대로 반으로 갈라졌다.
반파되었던 성문으로 들어간 것은 마물이 아니라, 마물들이 흘린 피와 시체의 파편뿐이었다.
“맙소사…….”
죽음을 각오하고 성문 뒤에서 대기하던 기사들은 쏟아지는 파편들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샤를 백작이 저렇게 강했었나요?”
“아니, 강하긴 했는데, 절대로! 이 정도는 아니었어.”
나를 처음 보는 기사들은 놀라서 옆 기사에게 물었지만, 과거에 나를 봤었던 기사들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카를로스 왕국의 수도 동문 앞이었다.
처음 왕국 수도에 도착했을 때 지났던 그 성문은 지금 박살이 나 버렸다.
황금빛이 너울거리던 성문 앞의 벌판은 마물과 인간의 피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조직의 낙원에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전송’ 능력을 써서 수도로 날아왔다.
마물들이 수도를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낙원’에 갔을 때, 기사의 검을 소환하기는 했지만, 수도에는 ‘전송’에 쓸 유물을 남겨두었었다.
덕분에 이번에는 수도가 마물에게 점령당하기 전에 이렇게 찾아올 수 있었다.
확실히, 마물들을 지휘하던 마물 왕이 죽어서인지, 수도를 공격하는 마물들은 단지 인간을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평범한(?) 마물들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평범한 마물들이라도 상대하기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마왕이 돌아오기 전에도 이렇게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가끔 북부 산맥을 통해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었다.
영지 몇 개가 날아가고, 작은 나라가 멸망하기도 한, ‘마물 웨이브’라 불리는 재앙이었다.
그 웨이브가 왕국, 아니 대륙 전체에 쏟아진 상황이었다.
저번 삶 때의 마물들을 경험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망적인 것은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래서, 내 활약이 더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이번 웨이브는 성문 안으로 뛰어들던 마물들이 마지막이었다.
잠시 한가해진 시간, 나와 함께 마물과 싸웠던 왕실 기사단장이 주변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군요. 그동안 실력을 숨긴 거였습니까?”
백작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내 실력을 보아서인지, 그는 내게 말을 높이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난동을 피우고 있는 거대 마물의 몸을 썰어버리며 대답했다.
“그때보다 조금 더 강해졌을 뿐입니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던, 기사단장은 버럭 화를 냈다.
“이건 ‘조금 더’가 아니잖아!”
진심으로 화가 난 것인지, 존댓말이 쑥 들어갔다.
역시 그에게는 반말 쪽이 더 어울렸다.
“정말, 초대 왕의 재림이라도 되는 건가……. 아니, 카를로스 왕도 이렇게 강하지 않았을 텐데.”
그는 내가 회를 쳐버린 거대한 마물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수도에 와서 마물들을 막은 며칠 동안 내 별명이 또 생긴 듯했다.
제국에서 부른 ‘왕 살해자’처럼, 내 싸움을 본 왕국 기사들은 나를 ‘초대 왕의 재림’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마왕이 도착하기 전에 마물들을 최대한 줄일 생각에 실력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더니, 기사들이 내게 그런 별명을 붙여준 것이다.
마물과 싸우는 내 모습이 초대 왕과 비슷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사실, 잘못된 별명은 아니었다.
내 능력의 태반은 카를로스 용사의 능력이었고, 그의 검인 수련검에게 인정도 받았으니까.
다만, 좀 곤란한 별명이기도 했다.
초대 왕의 재림이라니.
다른 때였으면, 왕실 모욕죄가 충분히 성립될 수 있는 별명이었다.
아무래도 내게는 매번 곤란한 별명이 지어지는 듯했다.
뭐, 지금은 내게 별명으로 시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도 백작 덕분에 살아남은 것 같군. 이놈도 마물 왕이라고 부를 만한 것 같지?”
기사단장의 말대로 내가 아니었으면 이 수도는 저번 삶에서처럼 무너져 버렸을 것이다.
수도에는 단단한 성벽과 실력 있는 왕실 기사단, 그리고 그동안 여왕이 훈련시킨 기사들과 귀족 장교들이 있었지만, 방금 내가 쓰러뜨린 마물을 막아설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마물치고는 강하지만, 마물 왕으로 불릴 만한 마물은 아닙니다.”
마물을 급으로 나눈다면, 이 마물은 마물 왕의 한 단계 아랫급의 마물이었다.
탑에서 죽인 마물 왕이 있으니, 마물 왕을 무력 순으로 정하기는 어렵겠지만, 마물 왕들과 제일 많이 싸운 내 경험에 의하면, 이 마물은 분명 마물 왕은 아니었다.
“이런 괴물도 왕이라 불리지 못하다니……. 그럼 마왕은 얼마나 강한 거지?”
나야 마물 왕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 마물을 쓰러뜨릴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 마물도 마물 왕과 다를 바 없었다.
기사단장은 고개를 돌려 부서진 성문을 보며 혀를 찼다.
“마왕을 막기는커녕, 마왕이 나타나기도 전에 결국 성문이 부서져 버렸군.”
사람들은 잠깐의 틈을 이용해 지금도 열심히 부서진 성문을 수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한번 부서진 성문은 뭘 덧댄다 해도, 마물들에게는 열린 문일 뿐이었다.
이번에는 막아 냈지만, 다음 공격부터는 내가 이 앞을 떠나지 못하게 될 테니, 싸움이 힘겨워질 터였다.
나에게는 이 싸움이 마왕이 나타나기 전, 마물을 줄이기 위한 싸움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발악이었다.
마물들이 몰려왔을 때, 서쪽으로 피난을 가는 사람도 많았지만, 수도에 남는 사람도 많았다.
왕국 수도에서 막지 못한다면 어디든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옳은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이건, 죽음이라는 오답만 있는 문제였으니까.
내 영지였으면 발레아가 수리했겠지만, 이곳에서는 저 문을 고칠 방법이 없었다.
발레아를 이곳에 불러도 고치기는 불가능했다.
내 영지의 성문을 발레아가 고칠 수 있는 것은 발레아가 내 도시를 오랫동안 영역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기사단장은 성문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피로스 왕국은 멸망한 모양이고, 동부 영지들도 소식이 끊어졌고…….”
이번에도 그레이스 영지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형과 형수는 연락이 끊어질 때까지 영지에 남아 영지를 지키고 있었다.
“알렉스, 아니 백작의 영지는 괜찮나?”
“그동안 계속 정리해둔 덕에 아직은 여유가 있습니다.”
북부 산맥의 지류를 끊어버리고, 시간을 들여 영지 곳곳에 마물들을 정리해두었다.
물론, 그렇게 해도 계속 서쪽에서 마물들이 몰려오기는 했지만, 당장의 웨이브는 내 영지를 비껴간 듯했다.
“거기다, 지하에 큰 피난처도 만들었고……. 지금 왕국에서 제일 안전한 곳은 백작의 영지겠군.”
‘설마, 기사단장이 내 영지로 올 생각인가?’
수도를 버려두고 도망치는 것은 이 거인 기사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의 실력이라면 나와 내 영지에는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을 들으니 그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
“마물들이 나타났을 때, 그레이스 공작과 따로 정해둔 것이 있었어.”
단장의 말과 함께.
히이이잉.
부서진 성안 쪽에서 마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물의 공격을 막지 못할 때가 되면 여왕을 따로 피신시키자는 이야기이지.”
단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성문을 바라보았다.
박살 난 성문으로 마차가 달려 나왔다.
평범한 마차였다. 왕실 마차가 아닌, 평범한 여행용 마차.
달려오는 마차 안에 내가 잘 아는 마나들이 느껴졌다.
“마물의 공격을 막지 못하는 기준은 바로 성문이 부서질 때지.”
지금이라는 이야기였다.
이쪽으로 달려오는 마차는 여왕을 대피시키는 마차라는 소리였고.
그리고, 내가 마차에서 본 마나는 여왕과 카트리네.
마차를 몰고 있는 것은 카트린 교수였다.
아니, 지금 그녀의 복장을 보면 교수 카트린이 아니라, 용병 ‘불새 사냥꾼’이었다.
“여왕의 호위를 부탁하네. 다른 기사들은 붙이지 않았네. 이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있어야 하고, 자네의 실력이라면, 다른 기사들은 오히려 방해될 테니까.”
사실, 수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내가 여기 남고, 다른 기사들을 여왕의 호위로 삼는 게 좋았다.
하지만, 기사단장은, 그레이스 공작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성벽 위를 바라보았다.
성벽 위에 그레이스 공작, 아버지가 갑옷을 입고 서 있었다.
갑옷을 입고 서 있는 모습은 처음 보지만, 공작의 모습은 꽤나 멋졌다.
그레이스 공작, 아버지도 결국 이곳에 남을 모양이었다.
“같이 가려는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요. 여왕도 가지 않으려 했을 테고.”
여왕이 도망치는 것을 알게 되면 바로 난리가 날 터였다.
그래서 평범한 마차로 온 것이겠지만,
그보다, 여왕의 마음을 바꾼 게 더 놀라웠다.
여왕 성격이라면 절대 안 가려 했을 텐데.
더구나 황궁에는 전대 왕비, 그녀의 어머니도 있었다.
히이이잉.
마차가 마물들의 시체를 피해, 내 앞에 도착했다.
카트린이 용병 차림으로 말을 세우며 내게 미소를 지었다.
전처럼 환한 웃음이 아니라, 조금 슬프고, 우울한 웃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가족을 모두 두고 왔으니까.
나는 마차 안을 살펴보았다.
어떻게 여왕을 설득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공작은 여왕을 물리적으로 설득한 듯했다.
여왕은 기절한 채로 마차에 누워 있었다.
역시 터프한 사람들이었다.
여왕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은 것을 보면, 충신은 못될 사람들이기도 했고.
“고집이 심하셔서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야. 그래도 이대로 왕국이 멸망할 수는 없으니까. 거기다, 아직 죽기에는 너무 어린 여왕이야.”
나는 기사단장의 말에 고개를 젓고, 마차 위로 올라갔다.
어차피 문이 부서진 이상, 내 할 몫은 끝이 났다.
어차피 내 전장은 이곳이 아니었다.
나는 단장에게 인사를 하고, 고개를 돌려 성벽 위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마차를, 나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손을 가슴에 올려, 기사의 인사를 했다.
내게 한 인사인지, 떠나는 여왕을 향한 인사인지는 모르지만, 나도 가슴에 손을 올려 그의 인사에 답했다.
내 인사를 보고, 카트린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같이 하는 여행이네요.”
정말 오랜만의 여행이었다.
나는 이 여행이 마지막 여행이 되지 않기를 기원했다.
카트린이 마차를 움직였다.
“갈게요.”
엉망이 된 카를로스 왕국의 수도를 뒤로 한 채로, 기절한 여왕을 태운 마차가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