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천재는 무한리셋 중-502화 (502/563)

제502화

제2편 낙원 (3)

겹겹이 나를 짓누르는 함정들과 기사와 장로들의 공격은 정말 대단했다.

이 정도면 마을 사람들과 장로들이 자신만만한 게 당연할 정도였다.

문제는 이 함정과 공격은 아무리 봐도 마물을 상대하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

떼로 몰려오는 마물들이 얌전히 이 홀 안에 모여들 이유도 없었고, 포위될 때까지 얌전하게 있을 리도 없었다.

이건 단 하나의 적. 그것도 크지 않은 인간 형태, 아니 인간을 상대하기 위한 함정이었다.

그런데 또 이런 수준의 함정이면 인간을 상대하기는 과했다.

설마, 이 함정은 마왕이 찾아왔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준비한 걸까?

그렇다면, 조직은 함정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것이었다.

마왕이 이런 함정에 당할 리가 없었다.

이 함정은 나조차도 감당하지 못했으니까.

쿵.

검으로 바닥을 내려찍고, 마나를 밀어 넣자, 마나를 흡수하던 문양이 터져 나갔다.

콰아아앙!

문양과 함께 홀 바닥까지 박살 나자, 달려들던 기사들은 날아오는 파편을 쳐내기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장로들은 급하게 방어막을 펼쳤고.

“마나 봉쇄 진이 부서졌습니다!”

“말도 안 돼! 그건 인간의 힘으로 부술 수 있는 게 아니야!”

“진군의 깃발을 제대로 쓰긴 한 거야? 멀쩡하잖아!”

“분명, 제대로 쓰고 있어!”

바닥이 박살 나자, 놀란 장로들이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싸움 중에 저렇게 떠들어대다니.

능력은 좋지만, 실전은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었다.

나는 바닥에서 검을 뽑으며, 장로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먼지를 가르며 앞으로 튀어 나가, 검을 휘둘렀다.

쾅!

방어막이 부서지고, 놀란 중년 귀족의 모습이 보였다.

알고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더 참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귀족을 스쳐 지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비명도 없이 허물어지는 중년 귀족.

나는 마나가 꺼지는 것을 느끼며 다른 장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쾅!

다시 방어막을 부수고.

“놈이 우리 쪽으로 왔다!”

고함을 치는 귀족의 가슴에 검을 찔러넣었다.

“컥!”

기사도 아닌 이들이 함정이랍시고 적에게 너무 가까이 있었다.

그들은 유물의 방어막을 믿었을 테지만, 그 방어막은 일정 이상의 공격에는 무용지물이었다.

그 일정 이상의 공격이 마물 왕 급의 공격이라는 점을 보면, 꽤 열심히 준비한 유물이긴 했지만,

마왕은 물론, 나에게도 소용이 없는 방어막이었다.

“벨로 경! 베라 경! 젠장, 전부 당한 거야? 기사들은 뭐 하고 있어! 우리를 지켜줘야……. 컥!”

마지막까지 고함을 지르는 귀족을 쓰러뜨리자, 문양이 박살 나며 생긴 먼지가 가라앉았다.

내 앞에 쓰러진 귀족은 자신들을 돕지 않은 기사들을 욕했지만, 그건 열심히 싸운 기사들을 모욕하는 것이었다.

박살이 난 홀 바닥에는 장로들은 물론 시체가 된 기사들도 누워 있었다.

바닥이 터져 나가고, 먼지가 가라앉기까지는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장로들과 함께 기사들도 쓰러뜨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먼지가 가라앉은 홀에는 나 말고 두 사람만이 온전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전 재상, 로마이어 백작과 차도프 자작이었다.

두 사람만이 나를 공격할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로마이어 백작도, 차도프 자작도 홀 내부의 광경을 보고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둘 다, 시체들은 많이 봤을 텐데.

친한 이들이라서 그럴까.

뭐, 상관없었다.

어차피 두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건 관심이 없어졌다.

오죽했으면, 다른 질문을 하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과 함께 그들을 죽이지 않은 것도 검을 휘두를 가치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이들이 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망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함정을 만들어 덤벼들었기 때문도 아니었고.

결국, 내가 이들에게 실망한 것은, 내 안에 있던 ‘조직’이란 곳에 대한 기대가 사라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여태껏 나와 싸워왔던 모습과 마왕에 대비하기 위해 수백 년간 대제국을 뒤에서 지배하던 모습에서.

나는 ‘조직’의 수뇌에 뭔가 대단한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 모양이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열심히 파봤는데, 나온 결론이 이 모양이었다.

조직은 수백 년간 무너지고 무뎌진, 썩어버린 상태였다.

지금의 조직에게는 마왕에 대비하겠다는 뜻은 겉치레에 불과한 명분뿐일 테지.

나는 반쯤 넋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을 무시하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피에 젖은 깃발을 주워 들었다.

이 조직을 세웠다는 용사가 썼다는 깃발.

조금 전에 장로 한 명이 이 깃발로 내게 정신 공격을 퍼부었었다.

용사가 직접 사용한 유물이어서 그런지, ‘기사의 검’이 없었다면 위험할 뻔했었다.

물론, 이 깃발로 내게 공격을 가하던 이는, 이미 시체가 되어 바닥에 구르고 있었다.

“그럼 확인해 볼까?”

나를 보고 있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기억을 보는 시간은 그들이 손을 쓸 정도로 긴 시간이 아니었다.

나는 깃발을 쥐고, 마나를 밀어 넣었다.

우우우웅.

핏빛에 물든 깃발이 바람 없는 실내에서도 펄럭이기 시작했고.

내 시야는 바로 어두워졌다.

다행히, 이 유물에는 기억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시야는 금방 다시 밝아졌다.

그런데, 주변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아니, 낯설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다시 눈을 떠서 본 주변 모습은 조금 전 싸웠던 중앙 홀과 똑같았다.

물론, 똑같아 보이는 게 아니라, 기억 속의 장소는 지금 내 육체가 서 있는 중앙홀이었다.

당연히 시간은 다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중앙홀의 느낌이 달랐다.

조금 전까지 보았던, 만든 지 오래되어 고풍스럽게 느껴지던 홀이 아니었다.

지금 보고 있는 홀은 조금 전에 완성한 것 같은 새 건물 느낌이 가득 풍겨 나오고 있었다.

내가 빙의해 있는 사람은 깃발을 들고, 홀 가운데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여러 사람이 서 있었다.

대부분 중년 아래의 사람들이었다.

나, 아니, 내가 빙의한 사람을 보며 눈을 반짝이는 이들.

지쳐 보였지만, 신뢰와 의욕이 가득한 그들의 눈은, 조금 전 보았던 늙은이들의 찌든 눈과 비교가 되었다.

모두를 보며, 내가 빙의한 이가 말하기 시작했다.

“성이 완성되었군요.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성이 완성되었으니, 이제 이 피난처의 기반은 쌓은 셈입니다.”

상황을 보니, 내가 빙의한 이가 조직을 만든 용사가 맞는 듯했다.

이 기억은 이 성이 완성되었을 때의 기억인 듯하고.

아쉽게도 내가 원하던 기억은 아니었다.

이 용사에게는 대전쟁 때의 기억보다 성이 완성되었을 때의 기억이 더 마음에 남았던 모양이었다.

용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곳은 우리가, 우리의 후손이 마왕과 싸우게 될 때 소중한 사람들을 피난시킬 곳입니다. 이곳이 있으면, 대전쟁 때 소중한 이들을 잃고,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동료들의 모습을 다시 보지 않게 될 겁니다.”

아무래도, 용사와 조직이 이곳을 만든 이유는 지금과 달랐던 모양이었다.

지금처럼 자신이 살기 위한 것이 아닌, 가족의 대피처였다.

“성을 완성시켜 분지의 온도를 높여 놓았으니, 이제 이 분지 전체를 살 만한 곳으로 바꾸는 일이 남았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겠지만, 모두 잘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낙원 같은 곳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마왕과 싸워야 할 우리에게는 낙원 같은 희망으로 남게 되겠죠.”

이 말 때문에 이곳에 낙원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걸까?

지금은 전혀 다른 뜻이 되어버린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듣고 있던 이들 중 한 명이 크게 소리쳤다.

“용사님이 계속 우리를 이끌어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대답하는 용사의 목소리는 전과 다르지 않았다.

“아뇨. 이 조직은 이제 제가 없어도 됩니다. 여러분이 있고, 나를 세운 동료들도 도와줄 테니까요.”

아무래도 이 자리는 용사가 조직을 떠나는 자리인듯했다.

자신이 만든 조직을 떠나다니.

이 용사는 생각보다 무책임한 자이려나.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할 일이 있어서 조직을 떠나지만, 저도 밖에서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그에게서 남들보다 오래 사는 유물도 얻었으니까요.”

이건, 내가 죽인 예언자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늙지 않는 유물’을 이 용사도 가지고 있다는 걸까?

그럼 설마, 이 용사는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걸까?

“이제야 마왕을 봉인한 동료가 한 부탁 중에 하나를 끝냈습니다. 이제 나머지 하나를 해내야죠. 이제부터 오랫동안 대륙을 돌아다니며 사람을 살펴야 합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조직이 저를 많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설마…….

이 용사가 그동안 내가 찾던 ‘지나가는 현자’인 건가?

그가 조직을 만들었고,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풍파를 일으키는 것도 마왕을 봉인한 용사의 부탁이었던 거였나?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어버린 듯했다.

이렇게 돼버리면, 마왕을 봉인한 용사에 대해 알려면 그 ‘현자’를 찾아내야 한다는 소리인데…….

“내가 떠나는 대신, 이 깃발을 기념으로 이곳에 남기겠습니다. 이곳에 마물들이 쳐들어올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제 깃발이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는 깃발을 앞에 선 이에게 내어 주었다.

동시에 내 시야도 어두워졌다.

기억이 끝난 것이었다.

어두웠던 시야는 바로 다시 밝아졌다.

기억과 똑같은 장소가 다시 보였다.

희망이 가득 찼던 장소가 지금은 시체가 가득한 장소로 변해 있었다.

전부 내가 만든 시체들이었다.

이번에도 기억을 본 시간이 정말 짧았던 모양이었다. 백작도 자작도 기억을 보기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이 성을 완성시킨 것으로 기온이 올랐다고 했지?”

나는 기억에서 들은 말을 떠올리며 내가 부숴버린 홀 중앙으로 걸어갔다.

박살 난 잔해들을 뛰어넘어 홀 중앙에 도착해 보니, 부서진 바닥 아래에 커다란 마나가 느껴졌다.

이 아래에 강력한 유물이 있었다.

“마나를 빼앗는 문양이 저 유물에서 힘을 빌리고 있었던 건가?”

문양, 마법진 만으로 내 마나를 빼앗는 능력을 가질 수는 없었다.

마법진에 힘을 불어넣을 능력자가 있거나, 대신할 유물이 있어야 했다.

이 문양은 이 성에 묻혀 있는 유물에서 힘을 빌려온 모양이었다.

기억에서 들은 대로라면, 그 유물은 이 분지의 온도를 올려주는 유물이었다.

이 유물을 꺼내거나, 부숴버리면 분지의 기온은 원래대로 돌아갈 터였다.

나는 검을 들어, 바닥에 찔러넣으려 했다.

“멈, 멈추십시오! 유물을 망가뜨리면, 마을에 있는 모든 이들이 죽을 겁니다.”

“이 마을에는 싸우지 못하는 여성과 아이들이 많이 있소. 그들을 죽일 생각이오!”

내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갔던 자작과 백작이 동시에 소리쳤다.

분명, 조금 전에 누가 누구를 추방한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저렇게 합심해서 소리칠 줄이야.

거기다, 마을에 있는 아이와 여성을 들먹이다니.

확실히 저들은 무력보다, 말싸움에 더 능한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을 쳐다보다가, 검을 치웠다.

곧 쓸모없어질 것 같아서 가져가려고 했는데, 저렇게 애원하니 그냥 놔두기로 한 것이었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홀을 빠져나갔다.

정문이 닫혀 있고, 철문이 내려와 있었지만, 내 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도개교 앞에는 마을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싸움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문이 부서지고 내가 나타나자, 마을 사람들의 표정은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 한 듯했다.

그들은 내가 무슨 일을 벌일지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바로 바닥에 엎드린 사람도 있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들이 뭘 하던 관심을 두지 않았다.

따로 손을 쓸 생각도 없었고.

나는 낙원이 아니게 된 이곳을 그냥 떠날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곳은 내가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나는 떠나기 전 멀리 남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작은 점들이 무수히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점들은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아직 볼 수 없겠지만, 나는 저 점들이 무엇인지 볼 수 있었다.

날개가 달린, 하늘을 나는 마물들이었다.

마물들이 이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중얼거렸다.

“전송.”

시야가 바뀌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내 뒤를 따라 밖으로 나온 자작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하늘에 저, 저게 뭐지?”

평범한 물음이었지만, 나에게는 외마디의 단말마처럼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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