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1화
제1편 낙원 (2)
사실, 안내해 달라는 내 말을 저들이 쉽게 따르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제국을 도와 마물 왕을 쓰러뜨리고, 잠시 협력하기도 했지만, 조직과 나는 기본적으로 적이었다.
만나 주기는커녕, 싸움이나 안 일어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저들도 함부로 싸움을 일으키기는 어려울 터였다.
이 마을에는 저들, 이곳에 피난 온 조직 수뇌의 가족도 같이 있었다.
그들이 싸움에 휘말리지 않게 하려면, 저들이 먼저 손을 쓰지는 않을 거로 생각했었다.
결국, 나는 저들의 가족을 인질로 삼은 것이었다.
그리고, 내 계획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잘된 듯했다.
나를 막아선 이들은 내 무기도 빼앗지 않고, 수뇌들이 있다는 마을 중앙의 성으로 나를 안내한 것이다.
나는 살기 등등한 기사들과 귀족들에 포위된 채로 마을 정문을 지났다.
멀리, 마을 중앙에 성이 보였다.
영주들이 사는 저택 같은 성도 아니고, 왕궁들처럼 아름다운 성도 아니었다.
마을 중앙에 있는 성은 전쟁을 하기 위한 제대로 된 성이었다.
마을의 주택들도 신기했지만, 이런 외진 곳에 저런 성까지 만든 것을 보면 황당할 따름이었다.
더 황당한 것은 길옆에 서서 나를 구경하는 이 마을 사람, 조직의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보며, 내가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속삭였지만, 내 귀에는 그들의 말이 전부 들려왔다.
“저 사람이 누군데 그래요?”
“적대자로 불리던 사람이래요.”
“그게 누구죠?”
“조직의 일을 망치고 사람들을 많이 죽인 자래요.”
“그러면 지금 잡아가는 건가요? 근데, 무기도 들고 있는데…….”
“그냥 장로님들께 데려가는 건가 봐요.”
“왜 안 죽였어요? 심문해야 해서 살려둔 건가? 하지만, 심문하려면 무기는 빼앗아야 하지 않나요?”
많은 사람이 살기를 띤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반대로 적대자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이의 의문은 다른 사람이 풀어 주었다.
“저자가 마물 왕을 쓰러뜨렸다는군.”
“맙소사…….”
내가 마물 왕을 쓰러뜨렸다는 말이 돌자,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요. 카를 경과 그레고르 경이 크게 다쳤습니다.”
몇몇 젊은이들은 분노에 차서 내게 소리치고, 능력을 쓰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말 이상의 행동을 하지 못했다.
나이 든 이들이 그들을 막아선 것이다.
그들의 모습은 역시 교양이 풍부한, 아니, 앞뒤를 잘 재는 귀족다웠다.
그들은 성을 가리키며 젊은이들을 다독였다.
“장로님들이 잘 해결해 주실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 수하들이 나를 믿는 것처럼 이들은 장로라 불리는 조직의 수뇌들을 믿는 모양이었다.
길옆에 나와 있는 이들은 전부 어른들이었다.
아이들은 집 안에 숨어 있는 게 느껴졌다.
아이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걸로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역시, 적대적인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은 좋은 경험이 아니었다.
그래도 꾹 참고, 마을을 가로질러 성에 도착했다.
가까이서 보니, 진짜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성이었다.
성 주위에 해자를 파고, 빙하에서 흘러나온 강물까지 끌어들여 물을 채워놓았다.
해자 위에는 강철로 만든 도개교가 내려와 있고, 두꺼운 강철로 만든 성문이 위로 올라가 있었다.
싸움이 시작되면 도개교는 올라가고, 성문도 내려오겠지.
사실, 해자와 두꺼운 성문도 대단한 기사와 마물을 상대하기에는 큰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이런 곳에 이런 성을 만들어 놓은 것만 봐도, 얼마나 정성을 들인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설마, 대전쟁이 끝나고부터 만들기 시작한 걸까?’
나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인 채로 도개교를 지나,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성문 안에는 크지 않은 안마당이 있었고, 그 뒤에 성벽과 이어진 성이 보였다.
안마당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안마당을 지나, 활짝 열린 성안으로 들어갔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중앙 홀이 나를 반겼다.
외부의 모습과 달리, 중앙 홀의 벽에는 화려한 장식이 걸려 있었고, 그 아래에는 아름다운 판금 갑옷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중앙 홀 끝. 커다란 깃발 아래에는 귀족들이 서 있었다.
중년부터 노인까지, 전부 나이가 든 귀족들이었다.
저들이 바로 내가 만나고자 했던 이들일 터였다.
“자네가 바로 적대자인가?”
“역시 적대자는 카를로스 왕국의 귀족이었구먼.”
이들은 마을에 있는 귀족들과 달리, 왕 살해자가 적대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직의 수뇌들이니 자작이 알려 주었겠지.
모르는 이들도 있고,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이도 있었지만, 그중에는 예상치 못했던 사람이 있었다.
“자네일 줄은 생각도 못 했군. 자네같이 어린 기사가 적대자일 줄 생각도 못 했어.”
늙은 귀족이 나를 보며 혀를 찼다.
“저도 당신이 조직에 소속되어 있는 줄은 생각도 못 했군요.”
늙은 귀족은 몇 번의 삶 동안 계속 보아온 제국 귀족이었다.
리하르트 폰 로마이어.
전대 황제 때의 재상이자, 온건파의 수장이라고 불리던 노인이었다.
2 황자가 끝까지 설득해서 자신을 돕게 했던 이였고, 실제로 수도를 장악하고, 황제가 죽은 뒤에도 제국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었던 대단한 귀족이었다.
조직은 죽은 황제 쪽의 과격파이고, 반대파인 온건파는 조직과 관계가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누가 황제가 되건 간에 제국을 움직이는 것은 조직이어야 하니까.”
수백 년간 제국을 뒤에서 조종하던 조직의 수뇌다운 말이었다.
“그래도, 나는 잠깐 손을 빌려준 것일 뿐이네. 그때 나는 진짜로 은퇴했었으니까.”
노인은 말을 하다가, 나와 같이 홀 안으로 들어온 차도프 자작을 보고 혀를 찼다.
“그런데, 다음 대를 책임질 사람이 이런 실수를 할 줄은 몰랐군.”
차도프 자작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홀 입구에 서 있었다.
“고의로 한 것은 아닐 테고, 신호를 보내는 유물이라도 들고 온 건가?”
그 큰 제국의 재상을 맡았던 관록인 건가?
그는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비슷하게 추측해냈다.
로마이어 백작의 말에 자작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백작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자네는 일이 끝나고, 처벌을 받기로 하지.”
노인의 말에 자작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설마, 추방입니까?”
자작의 물음에 백작은 옆에 있는 사람들과 시선을 교환한 뒤에 자작에게 대답했다.
“그럴 가능성이 크지.”
“그동안 제가 해온 일이 있잖습니까. 장로님! 제발 추방만은…….”
“가족이라도 이곳에 남기려면, 추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게 좋을 걸세.”
로마이어 백작의 말에 자작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자작이 침묵하자, 백작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손님과 잠깐 이야기를 나눠볼까.”
내가 그를 알아보아서인지, 아니면, 그의 위치가 높아서인지 모르겠지만, 백작과 같이 서 있는 사람들은 백작이 대표로 말하게 했다.
“여기까지 온 이유가 있을 텐데. 설마, 우리를 다 죽이기 위해 쫓아온 건가?”
그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다른 이유가 먼저였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그런가? 마침 잘 되었군. 우리도 자네에게 물어볼 게 많은데.”
조직의 장로들은 마물 왕을 쓰러뜨린 나를 보고도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뭔가, 나름의 방비를 해 놓은 모양이었다.
그런 방비가 있다면 마왕을 상대로 쓸 것이지, 이렇게 도망쳐버리다니.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나는 조직에게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왜, 카를로스 왕국에 그토록 피해를 준 것인지.
또, 마왕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이런 피난처를 왜 만들었는지도.
거기다, 어떻게 대전쟁 뒤에도 마나를 강화하는 목걸이 같은 유물에 가까운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와 조직과 가깝다는 거리의 현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까지.
궁금한 것투성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 마왕에 관해 묻기 위해서였다.
“대전쟁 때 마왕의 봉인을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내 말에 백작은 물론, 다른 장로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왕의 봉인은 이미 풀려버렸는데……. 그걸 왜 묻는 거지?”
봉인이 풀려버렸으니, 이들에게는 이제 소용없는 일일 터였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봉인이 풀리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번에 마왕을 쓰러뜨리면 상관없겠지만,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다른 방법들도 찾아야 했다.
그 방법의 하나는 봉인이 풀리지 않게, 더 오래 버티게 만드는 것이었다.
탑의 마나를 쓰고 있긴 하지만, 어차피 마왕을 봉인하고 있는 것은 고대 제국의 유물이나 용사의 능력이었다.
그리고, 전부 사방으로 파편화가 되어버렸지만, 지금 귀족들도 대전쟁 때의 용사들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방법만 안다면, 봉인을 반복하거나 봉인을 수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미안하지만, 마왕을 봉인한 용사와 조직을 만든 용사가 친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어떻게 마왕이 봉인되었는지는 전해 내려오는 바가 없군.”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백작이 말했다.
뭔가 다른 표정을 짓는 이가 있을까 하고 얼굴들을 살펴보았지만, 뭔가 아는 것처럼 보이는 이는 없었다.
꽝인 건가.
이곳이 아니면 알아볼 곳이 없었다.
결국, 봉인 쪽은 포기해야 할 모양이었다.
‘그럼, 다른 질문이나 해볼까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백작과 같이 서 있던 장로 한 명이 자신들의 뒤쪽 벽에 걸려 있는 깃발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 원하면 저 유물에 대고 물어보던가. 조직을 만든 용사의 유물이니까.”
나는 장로의 말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나를 놀리려고 한 말이었지만, 나에게는 구원의 목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저 유물에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고, 그 기억이 내가 원하는 기억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되겠군요.”
내 대답에 장로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원하는 대답은 아니지만, 대답했으니, 우리도 질문을 하지.”
백작의 말에 나는 귀를 기울였다.
내게 기회를 주었으니, 나도 최대한 성실하게 대답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백작의 질문은 내 생각과 달랐다.
“질문을 하기 전에 우선 제대로 된 답을 할 상태로 만들어야겠지. 거기다, 조직에 손해를 끼친 것도 보답해야겠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쿵.
내성의 철문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쿠아아앙.
이어서 활짝 열려 있던 정문도 굳게 닫혔다.
그리고, 홀 바닥에서 마법진처럼 보이는 문양이 빛을 발했다.
“강대한 마물을 상대하기 위해 수백 년간 준비해온 함정을 인간에게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군.”
문양이 빛을 발하자, 내 몸에 있는 마나가 미친 듯이 빨려 나갔다.
이어서, 장로중 한 명이 벽에 걸린 깃발을 꺼내 들었다. 그가 깃발에 마나를 주입하자, 세상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거기다, 나와 함께 들어왔던 기사들이 검을 꺼내 들고, 앞에 서 있던 장로들도 무기를 꺼내고, 능력을 준비했다.
역시, 함정이었다.
여태 나와 말을 한 것은 함정을 발동하기 위해 시간을 끈 것이었고.
함정도 내가 처음 본 대단한 함정이었다.
바닥의 문양이 마나를 뽑아내고, 조직을 만들었다는 용사의 유물이 내 정신을 공격하고, 한가락 하는 능력자들이 나를 포위하는 처음 겪어보는 함정.
다른 사람이거나, ‘전쟁 신의 검’을 가지기 전이었다면, 죽었어야 할 예상치 못한 함정이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아쉽게도 나는 두 개의 검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대검을 바닥에 던지고, 가슴에서 검 두 개를 꺼냈다.
‘전쟁 신의 검’과 ‘기사의 검’이었다.
양손에 검을 쥐자, 빨려 나가는 속도 이상으로 마나가 모여들었고, 까맣게 물들던 머릿속이 바로 맑아졌다.
이번에는 말로 해결하려 했건만.
나는 덤벼오는 기사들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