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0화
제25편 낙원 (1)
창문으로 확인하니, 쇠사슬에 담긴 상자가 덩그러니 있는 이 텅 빈 방은 높은 탑의 맨 꼭대기에 있는 방이었다.
상자는 평범한 상자였지만, 상자를 감싼 쇠사슬은 딱 봐도 유물이었다.
여태껏 어떤 상황에서도 부서지지 않았던 내 대검과 같은 느낌의 유물.
딱 봐도 쉽게 잘려 나가지 않을 듯했다.
상자 안에 무슨 물건이 들었는지 몰랐다면, 쇠사슬 때문에 어떻게 상자를 열지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콰직.
나는 대검을 꺼내 쇠사슬이 감긴 상자를 힘껏 내려쳤다.
예상대로 쇠사슬은 흠집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상자는 그렇지 않았다.
상자는 쇠사슬에 싸인 채로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부서진 상자 안에는 예상대로 단도가 들어 있었다.
“자작은 이 검을 왜 이런 외진 곳에 둔 거지?”
나는 단도를 꺼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요한 물건이라고 생각했으면, 금고에 담아 두거나 경계가 삼엄한 곳에 두어야 했다.
중요한 물건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이런 쇠사슬 유물로 감싼 상자에 보관했을 리도 없었을 텐데.
거기다, 이 유물이 의심스러웠다면 이곳까지 가져왔을 리도 없었다.
방해받지 않고 편하게 ‘전송’되어서 좋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지금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곧 알 수 있겠지.”
이해가 안 가면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그만이었다.
나는 단도와 쇠사슬을 가슴 속에 집어넣고, 방구석에 있는 계단으로 향했다.
내려가는 계단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유물이 아닌 이상 나를 막기는 어려웠다.
쾅!
문을 부수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래층도 방금 나온 방과 똑같은 방이었다.
대신 이 방은 곡식 포대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방은 고기, 다음 방은 어류, 이런 식으로 여러 종류의 식량이 내려가는 방마다 가득했다.
“이 탑은 식량 창고인가.”
온도도 영하로 내려가 있으니, 평범한 식량 창고가 아니라, 냉동고에 가까웠다.
음식을 저장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문제는 이 탑이 식량 창고라면 조금 전 일을 더 이해하기 어려웠다.
“초대 황제의 단검을 식량 창고에 가져다 놓았다는 건데…….”
나는 고개를 젓고는 가로막는 문을 부수며 계속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래로 내려가는 도중, 온도가 전보다 따듯해진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영하 수십 도였던 기온이 한 층을 내려온 순간, 영상으로 올라온 것이다.
거기다, 또 한 층을 내려가니 차가운 초봄 온도로 변했다.
그리고 마지막 층에 도착하니, 포근한 늦봄 온도로까지 올라왔다.
포근한 기온을 온몸으로 느끼니, 탑 꼭대기에서 보았던 거대한 빙하가 환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것도 무척이나 신기한 일이었다.
쾅.
나는 의문을 담아 둔 채로 탑 밖으로 향하는 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섰다.
“누구냐!”
“침입자다!”
문밖에 있던 두 기사가 문을 부수고 나오는 나를 향해 검을 겨누며 크게 소리쳤다.
실력이 좋은 기사들로 보였지만, 나는 그들을 상대하는 대신 주변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곳은 예상치 못한 신기한 곳이었다.
탑 꼭대기 창으로 보았던 빙하 산맥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지금 탑 아래에서 볼 때도 사방으로 빙하 산맥이 펼쳐져 있었다.
이 탑이 있는 이곳은 빙하 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였다.
원래대로라면 빙하 산맥에서 내려오는 한파가 몰아치고, 냉기가 모여 꽁꽁 얼어붙어 있어야 할 분지였지만,
내가 보고 있는 광경은 정반대였다.
얼음 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는 일정 높이 아래에는 얼음이 보이지 않았다.
추위가 일정 경계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는 것처럼, 지면에서 가까운 곳에는 전부 얼음과 눈 대신 나무와 풀밭이 펼쳐져 있었다.
분지에는 빙하의 물이 내려와 만들어진 것 같은 작은 강이 흐르고, 강 주위에는 과수원과 밀밭까지 보였다.
그리고, 분지 중앙에는 마을이 만들어져 있었다.
마을 가운데에는 작은 성까지 있는 제대로 된 마을이었다.
“황당한 곳이네.”
탑의 창에서 빙하 산맥을 보았을 때, 이 추운 곳에서 어떻게 지내려 하는지 궁금했는데, 그 의문을 한 방에 날려 주는 광경이었다.
땅속에 화산이 있어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걸까?
아니면 이 분지 전체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유물이라도 있는 걸까?
어느 쪽이든 놀라운 모습이었다.
“무기를 내려놔!”
“어떻게 숨어든 거지? 낙원에는 누구와 같이 온 거지?”
아무래도, 이들은 이 분지를 낙원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나도 내 영지 지하에 있는 피난처에 뭔가 이름을 짓는 편이 좋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고함을 지르며 내게 덤벼드는 기사들에게 대검을 휘둘렀다.
쾅! 쾅!
“커억! 컥!”
기사들은 내 검을 맞고 멀리 튕겨 나갔다.
이리저리 바닥을 구른 기사들은 바닥에 누워 몸을 떨었다.
몇 군데가 부러진 것 같았지만, 일부러 검날이 아니라 검면으로 때렸으니 죽지는 않을 것이었다.
탑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분지의 외각에 있었다.
하지만, 탑 입구에서의 소란은 마을에서도 들린 모양이었다.
기사들이 마나를 담아 외쳤으니, 마나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들었을 터였다.
나도 들으라고 일부러 기다려 준 거였고.
이런 작은 곳에서 잠입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일이었고,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에 대해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그냥 사람들을 모아, 한 번에 설명하는 편이 나았다.
그편이 의견 교환이 잘 안 되었을 때도 바로 잡기가 훨씬 편했다.
나는 천천히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마을 곳곳에서 고함이 들리고, 마나가 치솟는 게 보였다.
마나가 치솟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설마, 이 마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각성자는 아니겠지?”
아니, 조직의 중요한 사람들이 대피한 곳이니, 전부 귀족인 건가? 그럼 귀족들이 직접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건가?
계속 이어지는 뜬금없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솔직히 궁금하긴 했다.
마을로 천천히 다가가니, 마을에서 몇 사람이 달려 나오는 게 보였다.
기사도 아니고, 나이 든 중년 남자들이었다.
달려오는 표정을 보면, 마을 주민이나 자경단이 외부인의 횡포에 결연히 나선 것처럼 보였지만,
“멈춰라! 어디서 횡포냐! 여기에 누가 있는 줄 알고!”
“여기는 용병 나부랭이가 감히 설칠 곳이 아니다!”
입고 있는 화려한 옷이나 내게 쏟아내는 말은 자신이 대단한 귀족이란 뜻을 내게 열심히 알리고 있었다.
나는 달려오는 중년 귀족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아는 조직이 이렇게 어리숙한 곳은 아니었는데?”
탑을 지키던 기사들이야 그렇다 치지만, 조직의 윗선이던 이들이 이렇게 생각 없이 달려들 줄 생각도 못 했다.
두 사람은 내게 소리치고는 자리에 멈춰서서 마나를 끌어모았다.
한 사람의 손에는 바람이 모이고, 다른 사람의 손에는 물이 모여들었다.
둘 다 능력을 쓸 수 있는 귀족이 맞았다.
한 사람은 바람을 쓸 수 있는 귀족일 테고, 다른 사람은 물을 움직일 수 있는 귀족일 테지.
움직이는 마나나 모여드는 바람과 물을 봐도 흔해 빠진 귀족들보다는 훨씬 실력이 좋아 보였다.
“전부 저런 귀족들이라면, 직접 농사는 안 지어도 되려나…….”
능력으로 전답에 물을 뿌리고, 능력으로 곡식을 심고, 추수도 하면, 손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확실히 각성한 귀족의 능력은 싸움이 아니더라도 정말 유용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쿵.
작은 발놀림과 함께 몸이 앞으로 쏘아지고, 내 검은 능력을 움직이던 두 귀족의 몸을 강타했다.
쯧쯧.
나는 바닥에 나뒹군 두 귀족을 보며 혀를 찼다.
좀 전의 기사들과 달리 내 움직임을 눈치채지도 못했는데, 너무 힘을 쓴 모양이었다.
내 검에 튕겨 나간 두 귀족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뒤에 쓰러져 있는 두 기사와 달리, 이 귀족들은 크게 다친 것 같았다.
그래도 죽지는 않았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사실 죽어도 상관없었다.
이들도 나를 죽이려 한 ‘조직원’이었으니.
신검을 가지고 있지만, 치료해 줄 생각도 없었다.
그나마, 먼저 공격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배려해 준 것이었다.
사실, 내가 이들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없었다면, 이곳을 이렇게 평화롭게(?) 방문할 생각도 없었다.
전부 박살 내고 돌아갔겠지.
그리고 제대로 대답을 듣지 못하면, 같은 결과가 될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도 두 귀족이 박살 난 것을 보았는지, 내게 달려오려던 다른 귀족들이 후다닥 마을로 돌아가는 게 보였다.
나는 여유롭게 과수원 옆길을 걸어, 마을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간을 준 덕분인지, 마을 사람들(?)은 준비하고 나를 맞이할 수 있었다.
제대로 된 기사들과 싸워 본 경험이 많아 보이는 젊은 귀족들. 그리고 유물을 가득 달고 있는 늙은 귀족까지.
마을의 실력자는 모두 나온 것 같았다.
조금 전과 달리, 마을 입구에 모여 있는 사람 중에는 내가 아는 사람이 꽤 있었다.
제국 행사에서 보았던 귀족들과 이피로스 왕국에서 본 귀족.
그리고 아버지와 형 대신 오게 된 것인지, 카를로스 왕국 지하 창고에서 보았던 창고지기도 보였다.
창고지기는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투구를 안 쓰고 왔으니, 그가 나를 알아보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에게 알은척을 했다.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한 일등 공신.
차도프 자작에게 손을 흔든 것이다.
“덕분에 쉽게 왔습니다.”
투구를 벗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던 그는 내 목소리에 내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
그의 말에 사람들이 전부 자작을 쳐다보았다.
중앙에 서 있던 기사가 그에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다른 사람에게 이 낙원의 정보를 누설한 겁니까?”
“그럴 리가 없잖은가. 헛소리일 뿐이네!”
기사의 말에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의 표정을 보고,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는 초대 황제의 단검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탑, 아니 식량 창고에 몰래 숨겨 둔 것이었다.
아마도 자작이 그 식량 창고를 담당하고 있을 테고,
자작은 몰래 단검을 가지고 있다가, 훗날 자신이나 자신의 후예가 그 단검을 쓰도록 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단검을 들고, 자신이 새로운 제국의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외칠 생각이었을까?
어쨌거나, 그의 계획은 내가 온 이상 실패로 돌아갔다.
아니, 제국이 다시 세워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으니, 처음부터 잘못된 계획일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자작님을 믿죠.”
기사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바라보았지만, 일그러진 자작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다들 수긍하는 듯이 보였지만, 이미 의심이 싹튼 이상 다들 전처럼 자신을 보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넌 누구지? 그리고 어떻게 여기를 온 거지? 네가 누구든 간에,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이곳에 있는 수백의 귀족에게 합공을 당할 거다.”
내가 두 귀족을 박살 내는 것을 보았기에 기사는 함부로 나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같이 있는 귀족들과 기사들을 믿고 있었는지, 자신만만하게 내게 말했다.
나도 바로 덤빌 생각은 없었다.
말이 통하면 싸울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나를 따로 소개할 필요도 없었다.
이곳에는 나를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제가 압니다! 저 남자는 샤를 백작. 카를로스 여왕의 기사인 알렉스 샤를 백작입니다!”
제일 먼저 왕실 창고지기가 소리쳤고, 그의 말에 몇몇 귀족들이 나를 알아보았다.
“아, 맞다! 그가 맞아! 전 황제 때 봤었어. 어린 기사가 실력이 좋아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나이가 어리지 않아?”
“그런데, 어떻게 여기를 온 거지?”
나를 아는 이들은 내가 찾아온 것에 더욱 혼란을 느꼈다.
그들이 아는 나는 왕국의 사절로 제국에 찾아왔던 어린 기사였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자작이 나에 대해 말했다.
그는 반쯤 포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수도 앞에서 마물왕을 쓰러뜨렸던 왕 살해자입니다. 2 황자에게 권력을 안겨 준 자이고…….”
자작의 말이 이어지자,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나는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말하는 조직의 적대자입니다. 조직의 수장과 만나기 위해 이곳 낙원을 방문했습니다.”
눈이 커졌던 사람들은 이제는 입을 딱 벌렸다.
그들은 너무 놀라서 싸울 생각도 못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들의 놀람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싸우는 것도 상관없지만, 이왕이면 편하게 만나면 좋을 것 같았다.
이 조직의 수장은 누구일지.
나는 마왕과 싸우기 전에, 조직에 대해 제대로 들어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