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9화
제24편 손님맞이 (2)
내 영지의 북쪽 끝.
북부 산맥의 지류와 맞닿아 있는 사냥꾼의 마을에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산맥으로 향하는 마을의 입구에는 마물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모두, 산맥에서 내려온 마물들이었다.
산맥 초입의 사냥꾼 마을을 지나 영지로 내려오려던 마물들이고, 내가 전부 죽인 마물들이었다.
나는 시체의 산을 보며 뒤에 서 있는 사냥꾼에게 물었다.
“촌장이 마지막인가?”
“네. 넵,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영주님이 지시하신 대로 기사님들과 함께 도시로 향했습니다.”
나를 보며 떠듬거리며 대답한 사냥꾼은 이 사냥꾼 마을의 촌장이었다.
내가 영주가 된 뒤 그도 평범한 사냥꾼 마을의 촌장치고는 무척이나 파란만장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을 앞에 유적이 발견되어서 마을이 외부인에 점령당하고 마을 사람들이 끌려가지를 않나.
마물을 처리한다고 영주가 수시로 찾아오고, 도피하던 제국의 3 황자가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내가 아니었으면, 이 사냥꾼 마을은 예전에 무너졌을 테니.
내가 미리미리 산에 있는 마물들을 정리하지 않았으면, 사냥꾼 마을은 한참 전에 없어졌을 것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때마침 내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사냥꾼 마을은 흔적도 남지 않았을 터였다.
다만, 촌장에게는 미안하게도 내가 이 마을을 계속 지켜줄 수는 없었다.
내가 그나마 지킬 수 있는 것은 사람, 내 영지민밖에 없었다.
“촌장도 바로 떠나도록.”
“……알겠습니다.”
영주의 명령이라서가 아니었다.
내 앞에 쌓인 마물의 시체를 보고 이곳에 남을 리가 없었다.
이 산에 있는 모든 마물이 내려왔다고 해도 이렇게 많을 리가 없었다.
이 마물들은 봉인지에서 쏟아져 나온 마물들과 그 마물들에 밀려 내려온 북부 산맥의 마물들이었다.
겨우 하루 동안 머무르며 잡은 마물들이었고.
드디어, 우리 영지에도 마물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마왕과 같이 움직이는 마물 군단이 아닌, 단순한 마물들이었지만, 이 정도 수의 마물들이라면, 평범한 기사들이 상대하기는 힘들었다.
이제 시작이니, 더 많은 마물이 쏟아져 나올 게 분명했다.
나도 이곳에 남아 마을을 계속 지켜줄 수는 없으니, 마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어차피 영지민들은 모두 도시로 피난시키고 있었다.
다른 마을들을 피난시키기 전에 마물들이 쏟아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냥꾼 마을은 계속 지키고 있었지만, 이제 더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영지민들의 피난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을과 함께 산맥 입구를 지키던 기사들을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도시로 피난시키고, 마지막으로 내가 남아서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이제, 나도 떠날 때였다.
촌장이 기다리던 병사와 함께 산 아래로 내려가고, 나는 다시 달려 내려오는 마물 하나를 시체의 산에 추가했다.
그리고, 발레아가 내 옆으로 솟아올랐다.
“준비가 끝났어요.”
발레아는 평상시와 다르지 않았다.
대공녀가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조금 기분이 안 좋아 보였는데, 지금은 괜찮아 보였다.
역시 데리고 나온 게 잘한 일이었다.
물론,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고, 내게 쌀쌀맞게 대하거나, 찾아온 대공녀를 쌀쌀맞게 맞이한 것은 아니었다.
발레아는 언제나처럼 나를 대해 주었고, 대공녀를 맞이할 때도 예전처럼 반갑게 맞이했었다.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할 그런 모습이었다.
나는 비기지 못할 정도의 연기.
나도 내가 가진 감각이 아니었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뻔했다.
분명, 공국에서 대공녀가 했던 말은 발레아가 알지도 못할 텐데…….
발레아와 대공녀가 대화하는 동안, 발레아에게서 느껴지는 우울한 느낌에 바로 도망치고 싶어질 정도였다.
나는 도망치는 대신, 대공녀와의 인사를 끝내고 발레아와 함께 사냥꾼 마을로 달려왔다.
그녀를 대공녀와 떼어놓고, 잠시나마 같이 움직이는 편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기도 했다.
마물을 막는 것은 나 혼자서도 가능했지만, 떠나기 전 마무리는 발레아가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마을을 지나, 반대쪽 입구로 나갔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산 아래까지 좁은 소로가 쭉 이어져 있었다.
내가 물러서자, 멀리서 기회를 보고 있던 마물들이 마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마물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발레아에게 말했다.
“그럼, 부탁할게.”
“네.”
발레아는 지팡이를 바닥에 세우고, 정신을 집중했다.
쿠구구구궁.
바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서 있는 바닥만이 아니었다.
마을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마을로 진입하려던 마물들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쿠아아아아아앙!
마을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을에 얼쩡거리던 마물들도 같이 아래로 추락했다.
카아악!
땅이 울리고 천지가 진동했다.
산골 마을이라지만, 목책까지 두른 큰 마을이었다.
이런 마을이 한순간에 땅속으로 꺼져버렸으니, 난리가 난 게 당연했다.
당연히, 지금 이 지진과 마을이 무너지고 있는 것은 전부 발레아가 한 일이었다.
물론, 아무 준비 없이 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마물들을 막는 동안 발레아는 마을 아래에 지하공동을 만들어 마을을 묻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발레아가 한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불편해도 참아요.”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발레아를 번쩍 안아 들고, 산 아래로 달려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너지고 있는 것은 마을만이 아니었다.
콰아아아아아앙!
마을에 이어져 있는 소로가 같이 무너지고 있었다.
땅이 뒤집히고, 바닥이 허물어졌다.
산과 이어진 하나밖에 없는 길이 허무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발레아는 산 아래까지 이어진 소로마저 전부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산 아래에 내려온 뒤에 나는 발레아를 땅에 내려놓았다.
발레아는 잠시 휘청거리다 내가 잡아 주자, 바로 설 수 있었다.
발레아의 얼굴에는 땀이 가득 솟아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계곡처럼 푹 파이고, 바위와 돌이 가득한 산자락이 보일 뿐이었다.
준비를 한 뒤에 한 일이라지만, 산 일부를 뒤집어버린 것이었다.
확실히 힘들 만했다.
이건 지팡이를 든 발레아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발레아는 힘들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뿌듯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곳에 오기 전에 보였던 어두움이 보이지 않았다.
잘 해결된 것 같지만, 나는 그녀에게 한마디 칭찬을 했다.
“역시, 발레아가 있어야 해.”
“그렇죠? 내가 필요한 거죠?”
내 말에 발레아가 환하게 웃었다.
작은 티끌도 보이지 않는 밝은 웃음이었다.
역시, 발레아에게 제일 좋은 것은 자신이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대공녀가 온다는 말에 우울해진 것도, 자신이 필요 없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을 테지.
분명 쓸데없는 걱정이었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전부터 가지고 있는 정신적 상처였기 때문이었다.
부부가 되었으니, 서로 상처를 이해하고 살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럼 돌아갈까?”
“네.”
발레아는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이제 발레아에게 영지를 맡기고 다시 돌아다녀도 될 것 같았다.
* * *
다음 날. 제국 수도.
수백 년 동안 대륙을 지배하던 차르 제국의 수도, 차르마니아에는 연기가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성벽들은 무너지고 있었고, 무너지는 성벽 위로 마물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결국, 차르마니아가 마물들의 공격에 무너진 것이다.
저번 삶과 달리, 차르마니아는 마물의 공격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저번 삶에서 병력을 수도에 집중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요새에서 틀어막다가 전멸했으니, 수도를 지킬 병력이 남질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제국 수도를 공격하는 데 마왕이 나서지도 않았다.
마물들의 공격만으로 저렇게 허무하게 성벽이 무너지는데 마왕이 나설 필요도 없었겠지.
나는 교단 건물 맨 위층, 대주교의 방 테라스에 서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수도는 지옥과 다르지 않았다.
아직도 수도에 남아 있던 이들이 마물들의 공격에 목숨을 잃었고, 서쪽 성문으로 도망치는 모습들도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피난민 사이로 화려한 마차가 교단 건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기사들이 호위하는 마차. 황궁 마차였다.
“이제야 도망치는 건가…….”
마차는 교단 입구에 멈춰 섰고, 잘 아는 얼굴이 마차에서 내려 교단 안으로 들어갔다.
2 황자가 이제야 교단으로 온 것이었다.
“거참, 귀찮게 하는군.”
다른 곳으로 가기 전에 혹시나 해서 들렸다가, 아직도 피난을 안 갔다는 소리에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분명, 저번 삶에는 늦지 않게 도망쳤다고 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래서야 같이 피난하려고 했던 조아나도 누이도 위험해질 터였다.
그래서 더 움직이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교단으로 끌고 와서 공간 이동진에게 처박으려 했는데, 다행히 내가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2 황자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잠시 뒤에 2 황자의 마나가 내 감각에서 사라졌다.
공간 이동을 한 것이었다.
사라진 것은 2 황자만이 아니었다.
내가 계속 추적하고 있던 두 마나, 조아나와 누이의 마나도 내 감각 안에서 사라졌다.
“무사히 떠난 건가.”
2 황자야 죽어도 그만이었지만, 기껏 유물도 건네주었는데 다른 두 사람을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제국 수도가 무너질 때쯤 해서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다행히 시간이 맞았고, 내가 움직일 필요도 없이, 다들 잘 피한 것 같았다.
언제까지고 지켜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노력을 해 볼 생각이었다.
황자와 두 여성이 떠난 뒤에도 마물들은 점점 도시를 침범해나갔다.
나는 무심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지옥 같은 광경이었지만, 내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마물들로부터 한두 사람을 구해준다고 해도, 그 사람들을 안전한 곳까지 데려갈 수도 없었다.
이미 도시 밖은 마물들로 가득했다.
더구나, 마왕이 다가오고 있었다.
“설마, 내가 온 것을 알아차린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내가 공간 이동을 한 뒤에 멀리서 마나가 불쑥 솟은 것을 보면, 마냥 아니라고 하기도 어려워 보였다.
매번 새로운 능력을 쓰는 마왕이 나처럼 마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확신하기도 어려웠으니.
이래서야 누굴 구하기는커녕 빨리 도망가야 했다.
나는 바닥 틈새에 끼어놓은 유물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에 작게 중얼거렸다.
“전송.”
모두 무사히 떠난 것을 확인했으니, 원래 가려던 곳을 갈 때였다.
다시 시야가 바뀌었다.
정상으로 시야가 돌아오자, 내 앞에는 쇠사슬로 굳게 감겨 있는 상자가 보였다.
저 안에 자작에게 전해 준 단도가 있을 터였다.
나는 자작에게 준 단도로 전송을 한 것이었다.
내가 있는 이곳은 높은 탑 꼭대기에 있는 창고 같았다.
“엄청 춥군.”
곳곳에 얼음이 얼어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높게 나 있는 쇠창살이 쳐진 작은 창으로 눈보라가 몰아치는 게 보였다.
휘이이이잉.
나는 높이 뛰어올라, 창을 잡고 밖을 내다보았다.
눈보라 속, 빙하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은 제국의 북쪽 끝. 얼음 지대였다.
자작이 피난을 온 조직의 피난처는 어이없게도 얼음 지대 위에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