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6화
제21편 돌아가는 길에 (2)
자작에게 보여준 것은 강탈한 황실 금고에서 찾은 유물 중 하나였다.
“여행 중에 구한 빌헬름 황제의 유물입니다. 담긴 능력이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자작님이, 아니 조직이 가지고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초대 황제 폐하의 유물이라고요?”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내 손에 들린 유물을 쳐다보았다.
내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작은 단도였다.
손잡이 길이보다 날 길이가 짧은 기형적인 단도.
마나를 주입하면 화염이 생기는 흔하다면 흔한 유물이었지만, 날 길이가 저래서야 좋은 취급을 받기 어려웠다.
그랬기에 황실 금고 안에 있는 것치고는 취급이 영 좋지 않았었다.
이 단도는 따로 관리되지 않고, 다른 평범한 유물들과 함께 상자에 담겨서 방치돼 있었다.
단도에 특별한 표식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기억을 확인하기 위해 황실 금고의 모든 유물을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었다.
“평범한 유물처럼 보입니다만…….”
그의 말에 나는 손잡이를 잡지 않은 손으로 단도의 날을 잡고, 힘껏 잡아당겼다.
뽁.
손잡이에서 단도의 날이 뽑혀 나갔다.
“무슨 짓입니까! 빌헬름 황제의 유물이라면서요!”
놀란 자작의 외침을 무시하고, 나는 손잡이에서 빼낸 검날의 심지 부분을 보여주었다.
이 단검은 신기하게도 손잡이 안쪽 부분도 검날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손잡이 안쪽에 숨겨져 있던 검날은 푸른 빛이 흐르고 있었다.
“설마……. 이건.”
그 검날을 보고, 자작이 입을 딱 벌렸다.
나는 빼낸 검날을 반대로 쥐고, 다시 손잡이에 박아 넣었다.
손잡이 안쪽에 있던 검날이 밖으로 나오게 되니, 전혀 다른 검이 되어 있었다.
가지고 있는 능력도 달라지고.
“정말, 초대 황제의 단도군요.”
제국 황궁에 걸려있는 초대 황제의 초상화에는 초대 황제가 가지고 있던 대표적인 두 개의 유물이 같이 그려져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검과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
그가 들고 있는 검은 지금도 제국 황제가 대를 이어 지니고 있었지만,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은 초대 황제 이후에는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검은 황실 창고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물론,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초상화에 그려져 있는 단검의 모습과 대대로 전해져오는 단검 모습은 모두 검날에 푸른 빛이 흐른다고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단검은 손잡이 안쪽 부분의 검날까지, 쌍날로 되어 있었지만, 대전쟁 이후 황제는 사람들에게 화려한 푸른 쪽 검날만 보여줬던 것이다.
사람들은 단검의 검날이 양쪽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지 못했으니, 이 검을 뽑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 이상 찾지 못했을 것이다.
화염과 냉기.
성물도 아닌데 두 가지 이상의 능력을 담은 유물.
알고 보니, 초대 황제는 각기 다른 능력을 가진 검날을 바꿔 끼는 것으로 다른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나도 검의 기억을 보고,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억을 보고, 이 검이 황실 창고 안에서 굴러다니는 이유도 알 수 있었다.
황제는 제국의 신물이 두 개가 되어 나라가 반으로 갈라지지 않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소중한 물건을 부술 수도 없어 그는 죽기 얼마 전에 이 검을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숨긴 것이다.
기억으로 내가 볼 때는 뭔가 우유부단한 느낌이었지만, 죽기 얼마 전, 노인의 마지막 결심이라, 함부로 평가하기는 어려웠다.
그 뒤로 뭔가 쓸모가 있을 것 같아서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자작에게 주기에는 딱 좋았다.
언제가 되었건 다시 제국을 세우려면 사람들에게 내세울 신물이 필요했다.
황제의 집무실에 있는 검을 가져가지 못한다면, 이 단검이 그 검을 충분히 대신할 수 있었다.
자작이 이런 유물을 받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함부로 버릴 리도 없고.
자작은 분명 이 유물을 조직의 피난처로 가져갈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 단검은 이미 내 소유가 되어 있었다.
그러면 피난처가 어디든, 내가 찾아갈 수 있을 터였다.
내 예상대로 그는 내게서 단검을 받아 갔다.
조금 전에 말했던 나에 대한 험담도 쏙 들어갔고, 오히려 내게 사과했다.
“감사합니다. 당장 급한 일이 아니었으면, 할 수 있는 한 보상을 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는 정말 급해 보였다.
그는 내가 어떻게 단검을 구했는지, 더 묻지도 않았다.
당연히 보상이라는 말도 빈말일 뿐이었다.
조직의 피난처로 도망치는 길일 테니, 앞으로도 보상을 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보상이라면 내가 알아서 찾아갈 테니 그는 미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어디로 가던, 꼭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자작은 황급히 집을 떠났다.
나는 그를 그냥 떠나게 놔두었다.
몰래 추적한다면, 피난처로 향하는 공간 이동진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괜한 벌집을 건드릴 수도 있었다.
지금은 저 단검이 곱게 피난처에 도착할 필요가 있었다.
“잠깐만, 저 단검을 되찾고, 황제 집무실의 검도 얻게 되면, 나도 제국의 황제라고 우길 수 있으려나…….”
그래봤자, 별 의미가 없는 일일 터였다.
그때는 백성도, 영지들도 존재하지 않는 황제일 테니.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작의 집을 떠났다.
“전송!”
아직 영지로 돌아가기 전에 들러야 할 곳들이 있었다.
처음 갈 곳은 공국이었다.
다만, 공국에 도착하니 조금 난감한 상황이 펼쳐졌다.
나는 대공녀의 침실로 전송이 된 것이다.
그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대공녀는 내가 준 성물 지팡이를 따로 두지 않고, 침실 안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공녀가 잠옷 차림이 아니었다는 걸까?
“공주의 침실에 난입하다니. 저한테 배운 예절은 다 잊으신 건가요?”
대공녀는 나를 보고, 예절 선생으로 돌아가 나를 꾸짖었다.
대공녀에게 사과하다 보니, 내가 그동안 얼마나 무신경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대공녀에게는 지팡이를 주었지만, 대주교와 누이에게는 반지를 주었었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에게 전송되었을 때, 더 난감한 상황을 만났을 수도 있었다.
물론, 이 세상도 귀족끼리는 성적으로 상당히 개방된 곳이긴 했지만, 아직, 결혼 서약서에 잉크도 마르지 않았는데, 오해를 살 일을 만들 수는 없었다.
어차피 대공녀에게는 내 전송 능력을 알려줄 생각이었다.
내 설명을 듣고, 대공녀는 꾸지람 대신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 지팡이는 평범한 선물이 아니었군요.”
당연히 평범한 선물이 아니었다.
그동안 도움을 많이 받고, 그녀가 이 성물 지팡이를 제일 잘 쓰는 것 같아, 대공녀에게 준 것이었다.
다만, 대공녀가 말한 뉘앙스는 내 생각과 조금 다른 듯했다.
뭐가 다른지 고민하기 전에 대공녀가 먼저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제국은 지금 어떤가요? 저와 헤어질 때, 마왕을 막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 봉인지로 가신다고 하셨는데…….”
아쉽게도 대공녀에게는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해야 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대공녀에게만 전할 소식은 아니었다.
나는 대공녀와 함께 공국왕을 찾아갔다.
공국왕은 내가 찾아왔다는 소리에 왕세자도 불렀고, 나는 공국의 왕실 가족 앞에서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했다.
“제국군이 전멸했다는 말인가…….”
내 말을 듣고, 왕세자와 대공녀는 물론, 공국왕까지 신음을 흘렸다.
“네. 투레 백작을 비롯한 검호들 전부가 전사하고, 10곳의 요새 전부가 무너졌습니다. 마왕군은 제국의 수도로 진격 중입니다.”
“……제국만 유린당하고 끝나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일부러 여기에 와서 이야기하지도 않았을 테고.”
“대전쟁 때 마왕의 목적은 인류의 멸망이었습니다. 이번에 직접 본 마왕도 그때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내 말에 왕세자가 벌컥 소리를 쳤다.
“그럼, 제국이 무너지면 우리 차례란 말인가!”
아니, 제국이 무너지기 전에 공국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저번 삶에도 그랬으니까.
공국왕은 손을 들어 화를 내는 왕세자의 입을 막고 내게 말했다.
“상황을 알려준 것은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네. 그것만으로도 공국은 큰 은혜를 입었어. 하지만, 그 말만 전하기 위해 공국에 들린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공국왕의 말대로였다. 단지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
“저희 영지 지하에 지하 피난처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지하 깊숙한 곳이라 마물들도 마왕도 알아차리지 못할 겁니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공국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수용할 수 있을 겁니다.”
공국의 힘으로는 마왕은커녕 마물들의 공격도 막기 어려웠다.
결국, 공국도 다른 영지들처럼 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런 공국에게 우리 영지로 피난하라는 제안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제안은 얄팍한 동정심 때문에 한 게 아니었다.
이 제안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동등한 제안이었다.
이 제안은 공국은 귀족들과 기사 가족의 피난처를 받고, 우리 영지는 공국 귀족과 기사의 무력을 얻게 되는 제안이었다.
지하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어느 정도라고 얼버무렸지만, 이 방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 인원이 누굴 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왕실을 비롯한 귀족과 기사의 가족을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귀족과 기사의 무력을 얻고자 한다면 주변 영지에게 사실을 알려 피난을 오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무력은 양날의 칼일 뿐이었다.
내 말을 듣지 않는 무력은 적과 다를 바 없었다.
내 영지에 들이려는 외부 사람은 나와 친분이 있는, 적어도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된 이들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국이 공격하든, 마왕이 오든 간에, 공국의 왕은 공국을 버릴 수는 없다.”
“그럼, 후계를 위해 왕세자님만이라도…….”
“나도 마찬가지다. 나라가 없어지면 왕세자도 의미가 없지.”
사실, 거절할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공국왕과 왕세자는 카를로스 여왕을 제외하면 내가 본 각국의 왕족 중에 제일 괜찮은 왕족들이었다.
욕심은 있지만, 나라와 백성도 생각하는 그런 왕족들.
그런 이들이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바로 도망갈 리가 없었다.
이들은 패전 소식에 냉큼 도망가는 ‘조직’의 귀족들과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왕실의 후계가 끊어지는 것도 문제가 있으니까.”
공국왕은 이곳에 있는 또 한 명의 왕족, 자신의 딸을 쳐다보았다.
“……알겠습니다. 왕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잠시, 공국왕과 왕세자를 바라보던 대공녀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대공녀의 표정은 무척 슬퍼 보였지만, 그 이상으로 단단해 보였다.
공국왕의 말과 대공녀의 대답은 결국, 본인들은 못 가도 대공녀는 내 영지로 보내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물 지팡이의 위력을 생각하면 쉽게 보내지 못할 텐데?
저렇게 쉽게 떠나보내려 하다니.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딸을 시집보내는 게 아니면 이렇게 쉽게 보낼 수는 없을 터였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성물 지팡이를 가진 대공녀는 영지에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유물을 수리하고 감정하는 능력도 황실 금고를 가진 우리 영지에 꼭 필요했고.
마지막으로 대공녀가 온다면, 나도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
저번 삶에서 왕국과 공국의 소식이 끊어졌을 때, 꽤나 마음이 안 좋았었다.
수많은 삶을 사는 동안 내 감정은 점차로 마모되었었다. 사람들과의 만남은 삶을 반복하며 퇴색되었고, 없어진 삶의 인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남은 인연들은 더 소중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공국왕은 내 이야기를 들은 뒤, 바로 회의를 소집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다시 제국에서 벌어진 일을 이야기해 주고,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이제 남은 일은 공국 사람들이 해나가야 했다.
공국을 떠나게 된 대공녀도 나와 같이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하늘을 나는 마물도 남은 게 없고, 왕실 마차를 써야 하나.”
탑에서 만든 하늘을 나는 언데드 마물들은 결국, 모두 썩어 흙으로 돌아갔다.
다른 이들과 함께 영지로 온다면 따로 움직여도 되겠지만, 공국을 방어해야 하는 상황이라, 공국도 대공녀의 호위에 많은 인원을 보탤 수 없었다.
결국, 나도 같이 움직여야 하니 최대한 빨리 움직일 방법을 찾아야 했다.
“혼자 돌아가게 되면, 영지에 있는 유물로 전송되는 건가요?”
대공녀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유물이 아니라 발레아에게 전송할 겁니다.”
내 말에 대공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네? 발레아에게요? 발레아는 유물이 아니잖아요. 이 능력은 사람에게도 되는 건가요?”
나는 대공녀에게 내 강화된 능력을 설명해 주었다.
“능력이 강화되어서, 제 소유로 인정이 되는 사람에게도 전송과 소환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럼, 발레아도 여기로 부를 수도 있는 건가요?”
“네.”
내 말에 대공녀는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럼, 저도 가능한 것 아닌가요?”
“네?”
“분명, 소유로 인정되면 가능하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저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맙소사.
갑작스러운 대공녀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