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5화
제20편 돌아가는 길에 (1)
‘전송’이 끝나자 내 눈앞에는 조아나, 교단의 대주교가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조아나가 바로 보이는 것을 보니, 그녀는 내가 준 선물을 계속 가지고 다닌 모양이었다.
이번 전송은 조아나에게 준 선물, 유물 반지를 향한 전송이었다.
다행히 옆에는 똑같이 놀란 표정의 누이, 엘레나밖에 없었다.
내가 전송된 곳은 제국 수도에 있는 교단의 제일 상층, 대주교의 방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게 되면 조금은 곤란해졌을 텐데, 운이 좋았다.
나는 두 사람이 더 놀라기 전에 투구를 벗었다.
내 얼굴을 보여 주자, 두 사람은 반가워하면서도 다른 의미로 놀란 얼굴이 되었다.
“설마 공간 이동? 알란 신관도 없을 텐데……. 어떻게…….”
누이는 갑자기 등장한 내게 매우 놀란 듯했지만, 조아나 대주교는 다른 이유로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바로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했다.
“봉인지 앞 요새에서 마물들을 막아 내고 계셔야 할 텐데……. 이렇게 혼자 돌아오시다니, 상황이 많이 안 좋은 겁니까?”
대주교의 말에 누이도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다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까지 마왕과 싸우느라 갑옷도 부서지고 몸도 피투성이였다.
물론, ‘전쟁신의 검’으로 전부 치료된 상태였지만, 내 모습은 누가 봐도 격전을 치르고 온 모습이었다.
“예상대로 마왕이 나왔습니다. 마왕 등장 이후 빌헬름 요새를 끝으로 모든 요새가 전멸했습니다. 요새에 있던 투레 백작을 포함한 모든 검호도 죽었습니다. 저만 혼자 도망쳐 나온 겁니다.”
직접 보았으니,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요새가 무너지는 것도, 사람들이 모두 죽는 것도 내가 전부 보고 들었다.
거기다, 검호는 내가 직접 언데드로 움직이기까지 했으니, 절대 살아있을 리 없었다.
사실, 부대의 대장으로 임명되었던 내가 이렇게 홀로 도망친 것은 기사로서도, 귀족으로서도 무척이나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제국 귀족이라면 얼굴을 들고 다니지도 못할 일.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제국 귀족도 아니었고, 황제 대리와 내 앞에 있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제국에서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이제 곧 세상이 망하게 생겼는데, 그런 것에 연연할 수는 없었다.
대주교도 나와 비슷한 입장이었기에 그녀는 나를 조금도 비난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당장 급한 일을 말했다.
“그럼, 더 서둘러야겠군요. 남아 있던 신도들도 서둘러 카를로스 지부로 보내겠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교인은 ‘교단’의 신도가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교단의 대주교가 아니라, 셀린의 신도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었다.
조아나는 대주교의 직권으로 교단의 공간 이동진을 이용해서, 제국에 있는 셀린 신도들을 카를로스 왕국 수도로 옮기고 있었다.
전부 망가진 카를로스 왕국과 그 주변 나라의 수도원들을 도와줄 지원자라는 명목이었다.
그런 이유치고는 너무 많은 인원이라, 이리저리 말이 나오고 있었지만, 마왕이 쳐들어오고 있는 이상, 들켜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공간 이동진을 통해 카를로스 왕국 수도로 이동한 셀린의 신도들은 모두 내 영지로 오고 있었다.
내 영지로 향하는 이들은 수도원을 도울 이들이 아니라, 일거리가 폭발한 내 영지에서 일할 일꾼이 되어 있었다.
대주교와의 급한 대화가 끝나자, 엘레나 누나가 내게 물었다.
“마왕이 그렇게 강한가……. 요.”
전과 달리, 조심스러워하는 목소리였다.
전과 다른 모습에 의아했지만, 지금은 의문을 풀 때가 아니었다.
나는 전처럼 존댓말로 그녀에게 말했다.
“네. 제국군도, 검호도 상대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마왕은 마물들의 통솔도 가능했습니다. 마왕이 나타나자, 마물들은 인간처럼 싸우는 마물 군단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보다 몇 배나 강한 마물, 평범한 병사들의 공격은 기별도 안 가는 마물들이 군단을 이뤄 공격하니 인간의 군대가 막을 수 없었다.
저번 삶에 경험했던 것이었고, 이번에도 다시 느낀 일이었다.
저번 삶과 달라진 것은 마물을 통솔하던 고목 나무 마물 왕이 죽어, 마왕이 없을 때는 평범한 마물들과 다르지 않다는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도 마왕이 없을 때는 큰 도움이 되긴 했지만, 결국, 이 전쟁이 끝나려면 마왕을 쓰러뜨려야 했다.
“엘레나 누나도 신도들과 같이 가시죠. 왕국 수도에서 저희 영지까지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솔직히 나에게 죽은 두 번째 공작부인 때문에 누이를 볼 때마다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누이 탓도 아니었고, 내 잘못도 아니었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껄끄러운 기분이 든다고 바로 외면할 수는 없었다.
보지도 못한 셀린 신도들도 영지에 받아들이는데, 단지 껄끄럽다고 배다른 형제를 받지 않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내 말에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조아나와 같이 있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조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삶에도 두 사람은 다른 신도들과 함께 도망치지 않았었다.
첩자이긴 했지만, 교단에 대한 정이 남아서였을까? 아니면, 마지막까지 대주교의 책임을 지려고 했던 걸까.
두 사람은 교단 사람들과 2 황자와 함께 피난을 떠났었다.
아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역시, 신을 믿는 이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강제로 두 사람을 끌고 갈 수도 없었다.
지금은 두 사람에게 이번 삶에서는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작별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두 사람 다 내가 준 유물 반지들은 끼고 있으니, 한 가닥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도와줄 수 있다는 희망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나는 황궁으로 향했다.
나는 번잡스러운 절차를 밟는 대신, 얼마 전 황제가 썼던 비밀 통로를 이용해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물론, 비밀 통로의 입구는 인정받은 이만 이용할 수 있었지만, 어차피 이것도 유물일 뿐이었다.
제국의 황실 금고를 강탈한 뒤, 나는 내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되었다.
마나를 보고, 유물의 소유권을 빼앗아 올 수 있는 내게는 그런 제약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조용히 집무실에 들어서니, 2 황자는 집무실에서 홀로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전보다 더 창백해진 얼굴을 보니, 상처를 치료하기는커녕, 더욱 악화시킨 듯했다.
“제국 황제의 집무실이 이렇게 아무나 드나드는 곳인지는 몰랐군.”
황자는 내가 앞에 선 것을 보고 허탈하게 웃었다.
“뭐, 자네 같은 대단한 기사의 앞을 막을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내 개인 시간은 배려해 주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아직 해가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벌써 술에 취한 걸까?
그럼 좀 곤란한데…….
“그보다 마물을 막겠다고 기사들과 귀족들을 끌고 갔으면서 왜 돌아온 거지? 그것도 이렇게 몰래 방문하다니. 혹시 또 누가 반란이라도 일으켰나?”
다행히, 술에 취한 것은 아닌듯했다.
하긴, 제국의 황자는 용사 빌헬름의 후손이었다.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그도 귀족이자, 각성한 능력자였다.
쉽게 술에 취할 리가 없었다.
“마왕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요새는 전멸했습니다.”
나는 대주교에게 한 말을 황자에게 다시 이야기했다.
마왕의 무서운 실력과 검호들의 죽음, 그리고, 마왕이 마물들을 통솔한 이야기까지.
제국군이 전멸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으며, 황자는 술을 들이켰다.
“결국, 제국은 마왕에게 망하는 거였나. 조직의 노력도 형님의 발버둥도 결국, 소용없던 거였군.”
내 이야기를 들은 뒤, 황자 자신은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말을 늘어놓았다.
“자네가 나를 도운 것도 결국, 마왕을 막기 위해서인가?”
“네.”
제국을 위해서 마왕을 막으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황자를 도운 이유는 마왕을 막기 위해서였다.
“역시 제국에 어울리는 이는 따로 있었군. 다른 때였으면, 바로 황위를 건네주었을 텐데 말이야.”
황자는 부대를 전멸시킨 나에게 화를 내는 대신, 저번 삶과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제국 황제 자리도 이제는 쓸모가 없겠군. 마왕이 전부 부숴버릴 테니. 다시 끌어모은다 해도 결국 시간 벌기일 뿐이겠지.”
복수에 미치고, 복수 뒤에는 의욕을 잃어버린 황자였지만, 그도 바보는 아니었다.
이번에 모아간 병력은 내전으로 피폐해진 제국의 마지막 힘이었다.
내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제국은 마왕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자네 계획은 실패했으니, 이제 어떻게 할 건가. 내 옆에서 제국과 함께 마지막을 보낼 생각은 아닐 테고.”
황자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카를로스 왕국, 내 영지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죽는 자리는 가족과 함께라……. 그게 맞겠지.”
내 말에 황자는 다시 술을 들이켰다.
마왕을 막기 위해 벌인 내전 때문에 그의 가족은 마왕이 오기 전에 모두 죽어버렸다.
그런 그에게는 내 말이 고통스럽게 들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과 달리, 죽을 자리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수 있었지만, 나는 아직 이번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제국에서의 싸움은 마왕의 힘을 확인하고, 마물들의 힘을 줄이기 위한 싸움이었다.
내 진짜 싸움은 왕국, 내 영지에서의 싸움이었다.
제국에서의 싸움이 끝난 이상, 이제 왕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그 전에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었다.
황자를 만난 뒤, 나는 제국 수도에 있는 한 귀족의 집을 방문했다.
이번에도 몰래 찾아간 것이었다.
그의 집은 황궁과 달리, 경계가 심하지 않고, 어수선해서 내 방문은 들키지 않았다.
소리 나지 않게 창문을 뜯고 들어가니, 집의 주인, 차도프 자작은 열심히 짐을 싸고 있었다.
“급하게 어디를 가시는가 봅니다.”
내 말에 그는 싸던 짐을 그대로 던지고는 품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누구냐!”
역시 조직인 건가.
막 꺼내든 단도도 마나가 가득 꿈틀거리는 좋은 유물이었다.
나는 그가 단검을 내지르기 전에 두 손을 들고, 입을 열었다.
“접니다. 왕 살해자. 아니, 조직의 적대자라고 할까요.”
피가 좀 튀고, 갑옷이 많이 상했지만, 내 갑옷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더구나 벗었던 투구도 다시 썼으니, 더욱 알아보기 쉬울 터였다.
“어떻게 돌아온 겁니까? 분명, 전멸했다고 들었는데?”
놀란 그의 말에 이번에는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국 수도, 차르마니아에 내가 돌아온 게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다.
당연히 교단도, 황자도 요새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벌써 알고 있다고?
조직은 실시간으로 소식을 전해 받을 수 있는 연락망이 있나?
물론, 공간 이동진도 있고, 셀린 교단의 실시간 텔레파시 같은 것도 있으니, 조직도 없지는 않겠지만.
하지만, 전에 상대할 때는 분명, 엄청나게 소식이 늦었었다.
이쪽 세상에 맞게 비둘기라도 날리는 게 아닌가 했는데…….
급할 때만 쓰는 그런 건가?
뭐, 지금 와서야 관계없는 이야기였다.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편하기도 했고.
아니 잠깐, 그럼 지금 짐을 싸고 있다는 건, 설마 도망갈 작정인 건가?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늦을 뻔한 것이다.
“교단의 도움으로 공간 이동진을 이용했습니다.”
나는 교단 핑계를 댔다.
“그쪽에 교단의 수도원이 있었습니까?”
역시 조직도 교단의 공간 이동진을 알고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까지도.
“글쎄요. 수도원 같지는 않던데…….”
내 말에 자작은 혀를 찼다.
조직이 파악하지 못한 게 있다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부대를 버리고 도망친 지휘관이 저를 왜 찾아온 겁니까? 명예를 모르는 이와는 할 말이 없습니다만.”
수도에 온 뒤로 처음으로 제대로 된 비난을 받게 되었다.
틀린 말은 아니어서 나는 그의 말에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나는 품에서 물건을 하나 꺼냈다.
이제 제국을 떠나게 되니, 그에게 줄 게 있었다.
“선물이 있습니다.”
내가 꺼낸 것은 그가 거절하지 못할 선물.
나를 조직의 피난처로 도망친 그에게 안내할 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