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3화
제18편 요새 방어전 (3)
‘전쟁신의 검’은 파편이 된 상태에서도 마물왕들에게 마나와 재생력, 지혜를 주었었다.
검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면 그 능력을 쓸 수 있는 게 당연했다.
검의 정령이 나를 용사라고 부른 뒤에는 나도 검의 능력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더구나, 이 검의 능력은 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검의 정령이 자신을 ‘용사의 검’이라 부르는 것처럼 이 검의 능력은 용사 일행을 위한 것이었다.
하늘로 치켜든 검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방어막을 펼친 귀족과 장교들에게 스며들었다.
“젠장, 마나가…….”
“훈련했던 대로잖아! 마나를 막으면 안 돼!”
앞에서 말도 안 되는 공격이 다가오는 상황이라서 그런지, 방어막을 펼친 귀족들은 내가 전해준 마나를 쉽게 제어하지 못했다.
물론, 전쟁신의 검을 실전에서 처음 사용하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이 검을 썼던 용사는 항상 같이 다녔던 동료들에게 힘을 불어넣는 것이라 어려울 게 없었겠지만.
나는 관계없는 자들, 아니 적으로 볼 수도 있는 이들을 동료로 인식해서 그 사람들에게만 마나를 보내야 했다.
그동안 같이 훈련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을 속이며 억지로 방어막을 펼치는 이들에게 마나를 보내고, 그들은 내가 보낸 마나를 받아들여 방어막을 강화했다.
부아아아아앙!
모든 방어막이 확장되며 강화되었다. 거기다 같은 마나로 강화되어서인지, 방어막들은 밀어내지 않고.
비눗방울이 합쳐지듯이 하나로 모여들었다.
거대하고 단단한 방어벽이 성벽 위에 펼쳐졌다.
마치, 대공녀가 성물인 나무 지팡이로 방어막을 펼쳤을 때처럼 거대한 방어막이 만들어진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마왕의 공격이 방어막을 때렸다.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굉음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동시에 단단했던 방어막이 한순간에 박살이 났다.
방어막을 펼치던 귀족들은 동시에 피를 토해냈다.
방어막이 깨지는 소리도, 방어막을 펼치던 귀족들의 비명도, 정령의 비명도 굉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꺼져가는 마나로 나는 알 수 있었다.
마나가 모자란 귀족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고, 대다수가 포션으로도 회복하지 못할 부상을 입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마나를 볼 수 있는 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마왕의 엄청난 공격에 놀라고, 그 공격 속에서도 살아있다는 사실에 놀랐을 뿐이었다.
빛이 사라지고, 굉음이 잦아들었다.
나는 피를 토하는 귀족들을 보며 피 묻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검과 백 명의 방어막으로도 부족한 건가.’
다시 보게 된 마왕의 첫 공격은 역시나 무시무시했다.
저번 삶에서 내가 이 공격 속에서 살아남은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물론, 그때 내가 살아남은 것은 반지의 방어막과 발레아의 도움 덕분이었다.
예상보다 강한 공격이라 단 한 번에 방어를 담당했던 부대가 거의 전멸해버렸지만, 어쨌거나 마왕의 공격은 막아냈다.
그 덕분에, 마왕의 첫 공격, 검으로 성벽을 부수는 ‘공성 파괴 검술’의 파괴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전쟁신의 검과 제국 귀족 백 명이 펼친 방어막을 상회하는 공격.
다만, 수치로 표현하게 되니, 그 강대한 힘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가 생각보다 강한 마왕의 공격에 놀란 것 이상으로, 마왕도 자신의 공격이 막힌 것에 놀란 모양이었다.
성벽 아래에 착지한 마왕이 나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아니, 마왕은 내가 아니라 내 손에 들린 검을 보고 있었다.
마왕의 손에는 낡은 검 대신 손잡이만 남은 검이 들려있었다.
방금 공격에 검이 부서진 것이다.
마왕이 나를 노려보는 사이,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다.
물론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리는 것은 검호들이었다.
“모두 정신 차려! 마왕의 공격을 막은 지금이 기회다. 마왕이 힘을 되찾기 전에 공격해야 한다!”
투레 백작은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크게 소리쳤고.
검호들은 굳은 얼굴로 앞으로 나섰다.
“지금도 무시무시해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지금밖에 없겠지.”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마왕의 마나 때문인가? 멀리서는 공격이 닿지를 않는군.”
‘마법사’도 마왕을 향해 능력을 사용해 보더니, 혀를 차며 노인의 뒤를 따랐다.
노인처럼 성벽을 뛰어내린 사람은 ‘마법사’ 말고도 또 있었다.
“여기서는 제 능력도 안 먹히네요.”
여검호도 그렇게 말하며 아래로 뛰어내렸고, 마지막으로 투레 백작도 내게 말을 남기고 아래로 향했다.
“우리가 먼저 상대하고 있겠네. 몸이 괜찮아지면 합류하고, 힘들면 지휘를 부탁하겠네.”
나는 성벽 아래로 사라지는 투레 백작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들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아래로 뛰어내렸지만, 지금 검호들이 마왕에게 달려드는 것은 자살과 다를 바 없었다.
마왕의 공격은 막혔지만, 지상에 내려선 마왕의 마나는 전과 다르지 않았다.
마왕은 힘이 약해지지도, 다치지도 않은 것이다.
저번 삶에서도 마왕은 성벽을 부순 뒤에도 말도 안 되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물론, 성벽을 부수는 공격을 남발할 수는 없겠지만, 그 능력이 아니더라도 마왕은 정말 강했다.
다만, 지금이 기회라는 투레 백작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마왕이 큰 공격을 쓴 뒤였고, 마물들이 뒤로 물러서 있으니, 마왕과 직접 상대할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지 몰랐다.
사실, 나도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몸이 괜찮았으면 투레 백작과 같이 뛰어내렸을 것이다.
문제는 방어막이 깨졌을 때, 방어막을 펼친 귀족들처럼 나도 충격을 받았다는 것.
주변의 시선 때문에 터져 나오는 피를 억지로 삼켰지만, 몸 내부는 엉망이 되어있었다.
마나 충돌로 죽을 정도로 충격을 받다니.
마왕은 멀쩡한 것이 기가 찰 지경이었다.
나도 포션으로 치료할 수 없는 상처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포션보다 훌륭한 치료제가 있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셀린의 신검을 꺼내려 했다.
[저를 쓰세요. 바로 치료해 드릴게요!]
아, 맞다. 내가 들고 있는 검도 그런 능력이 있었다.
이 검은 수백 년간 부서지는 좀비를 회복시켰던 재생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몸속에서 날뛰는 마나 중 일부를 억지로 움직여 검에 밀어 넣었다.
검으로 흘러간 마나가 변형이 되어 검을 빛나게 했다.
화아아악.
검의 빛은 내 몸을 따스하게 어루만졌다.
몸속에 스며들어 내상을 치료하고, 날뛰는 마나를 진정시켜 주었다.
내 몸을 치료하는 그 빛은 다른 사람들도 비추었다.
“어, 아프지 않아.”
“치료된 건가? 포션을 먹은 것도 아닌데?”
“아니, 포션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내상이었는데? 설마 방금 그 빛이?”
바닥에 누워 피를 토하고 있던 귀족들이 검의 빛을 받고 한순간에 치료되었다.
고통에 겨워하던 사람도, 치료가 힘들어 보이던 사람도 모두 멀쩡해진 것이다.
하지만, 모두 치료된 것은 아니었다.
“브렌! 젠장, 죽어버린 거냐!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 건데.”
애통해하는 귀족 앞의 주검처럼, 이 검도 이미 죽은 이들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마침 잘되었다.
마왕과 싸우는 동안, 성벽을 맡길 사람이 필요했는데.
이들이라면, 얼마간은 버틸 수 있을 듯했다.
“뒤를 부탁합니다.”
나는 일어난 귀족들에게 말하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마왕과 검호들의 싸움은 내 예상대로였다.
검호들은 아직 살아 있었고, 마왕과 싸우고 있었다.
투레 백작은 빛나는 검을 휘두르고, 노인은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마왕의 틈을 노렸다.
‘마법사’는 마왕 주변에 화염을 일으키고 있었고, 여검호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마왕을 약화시키려 했다.
격렬한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검호들의 표정은 절망으로 검게 변해 있었다.
투레 백작의 검은 손잡이만 남은 검에 튕겨 나가고 있었고, 기회를 노리던 노인은 마왕의 근처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마법사’의 화염은 마왕의 손짓에 허무하게 흩어졌고, 여검호의 ‘약화’ 능력은 마왕에게는 조금도 먹히지 않는 듯했다.
왜, 검호들이 저렇게 표정이 안 좋은지 알 것 같았다.
격렬해 보이는 싸움처럼 보였지만, 지금 마왕은 검호들과 놀아주고 있었다.
저번 삶에서 마왕이 내게 한 것처럼, 마왕은 여유롭게 그들의 공격을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검호와 싸우던 마왕이 고개를 들었다.
‘설마, 나를 기다린 건가?’
사실, 마왕이 기다린 것은 내가 아니라 내가 들고 있는 검이겠지만.
어찌 되었건 마왕은 내게 호기심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마왕이 손잡이만 남은 검을 휘둘렀다.
마왕이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순간, 검의 손잡이에 빛나는 선이 생겨났다.
“피해!”
그 광경을 보고 나는 급하게 고함을 쳤고, 놀란 검호들이 급히 뒤로 몸을 날렸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검호들이 튕겨 나왔다.
분명, 내 목소리를 듣고, 다들 몸을 피했고, 저 빛으로 만들어진 검날에 닿은 사람은 없었지만, 여파만으로 다들 날아가 버린 것이다.
바닥을 구른 검호들은 바로 일어서지 못했다.
저 빛나는 검날은 평범한(?) 검기 같은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검호들이 바닥을 구르는 사이, 나는 성벽 아래에 내려섰다.
드디어 다시 마왕 앞에 서게 된 것이다.
다시 앞에 서보니, 저번 삶에서 느꼈던 압력이 다시 느껴졌다.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압력이었다.
저번 삶에서 마왕과 싸웠던 경험. 눈으로 이 거대한 마나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기억으로나마 마왕의 힘과 싸움을 볼 수 있었다는 것까지.
그 모든 것들이 내게 거대한 압력으로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압력을 웃음 한 번으로 흘려낼 수 있었다.
대단한 압력이자, 트라우마가 될 만한 기억이었지만, 수많은 죽음을 경험한 이에게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압력이었다.
나를 본 마왕은 손을 들어, 내 손에 들린 검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그 검은 내 검 같은데…….”
나는 대답 대신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조금 전에 썼던 능력이라, 어렵지 않았다.
검이 빛나고, 쓰러졌던 검호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일어났다.
모두 치료된 것이다.
그 광경을 보고, 마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 검이 맞군.”
[헛소리예요. 저는 한 번도 그를 주인으로 인정한 적이 없어요. 검의 능력을 쓴 적도 없었어요!]
마왕의 말에 정령이 머리가 울릴 정도로 고함을 질렀다.
“정령이 아니라는데. 검 능력도 쓰게 해준 적이 없다는데.”
나는 친절하게 정령의 말을 마왕에게 전해주었고.
“설마, 정령의 목소리가 들리나? 넌 정령에게 인정을 받은 건가?”
내 말을 들은 마왕은 검 대신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령의 인정을 받지 않아도 능력은 쓸 수 있지. 셋 정도로 부순 다음에 나뉜 능력을 강제로 쓰게 만들면 되니까.”
머릿속에서 정령의 비명이 다시 들려왔고, 나는 질린 눈으로 마왕을 쳐다보았다.
마왕과 이야기를 하는 사이, 멀쩡해진 검호들이 내 옆에 섰다.
“좋아. 그대가 왔으니, 이제 싸워볼 만하겠군.”
“내가 시선을 끌겠네.”
검을 치켜세운 투레 백작의 말에 마법사가 불길을 일으켰다.
노인도 투덜거리며 몸을 풀었고.
“틈은 안 보이지만, 그냥 당할 수는 없지. 나도 우격다짐으로 찔러 넣도록 하지.”
여검호도 굳은 얼굴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들의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검을 확인했으니, 잔챙이들은 치워야겠군.”
그동안 제자리에서 상대하던 마왕이 먼저 움직였던 것이다.
빛나는 검이 세상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