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1화
제16편 요새 방어전 (1)
출렁이는 숲 밖으로 마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숲 전체가 출렁거린 만큼, 쏟아져나온 마물은 성벽 앞 벌판을 덮을 정도였다.
눈을 감고 화살을 날려도 어느 마물이든지 무조건 맞을 것 같았지만, 요새에서 쏘아지는 화살은 없었다.
병사들이 쏘는 화살로는 마물들의 마나 장벽을 뚫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기다리고 있던 귀족들과 각성한 장교들이 앞으로 나서서 달려오는 마물들을 향해 능력을 쏟아부었다.
하늘에서 얼음덩어리들이 쏟아지고, 요새 위에서 쏘아진 불덩어리들이 달려오는 마물들을 강타했다.
콰콰콰쾅.
마치 인해전술로 쏟아져 내려오는 군대 위로 포탄이 터진 것처럼 달려오는 마물 곳곳에 불과 얼음의 폭발이 계속 일어났다.
거기다, 땅이 꺼지고, 바람까지 불어, 많은 마물이 전진을 멈추었다.
하지만, 쏟아져 나오는 마물의 수를 생각하면, 능력으로 막은 마물의 수는 많지 않았다.
더구나, 귀족과 장교들의 장거리 공격은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
짧은 공격이 끝나고, 귀족들은 모두 뒤로 물러선 것이다.
“뭐야? 왜 벌써 멈추는 건데?”
너무도 짧은 공격에 기사와 병사들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러서는 귀족들을 바라보았지만, 귀족들의 표정도 좋지를 않았다.
“젠장. 아직 마나가 남았는데…….”
그들이 원해서 물러난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능력을 펼친 귀족도 줄고, 퍼부은 시간도 짧은 것은 전부 내가 능력을 쓰는 것을 제한했기 때문이었다.
상황을 알고 있는 기사와 귀족들은 불만에 찬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그래도 내 명령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내 옆에 서 있는 검호들과 투레 백작이 모두 내 편을 들어주고 있어서였다.
“제국인이 아니라는 소문이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제국을 위해 이렇게 악명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말이야.”
노인의 말에 다른 검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의 말과 달리, 제국인이 아니라는 소문은 사실이었고.
사실, 따지고 보면 악명을 들을 만했지만, 내 말을 믿게 된 검호들은 모두 내 편을 들어주었다.
“저치들은 ‘왕 살해자’가 마왕용으로 남겨 둔 것이니, 이번에는 우리가 좀 더 힘을 써야겠군.”
노인이 요새 바로 앞까지 달려온 마물들을 보며 말하자, 검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마법사’라 불리는 중년 귀족이 성벽 난간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난간 앞에 서서 달려오는 마물들을 향해 손을 펼쳤다.
그의 손에 따라, 마나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의 몸에서 빠져나온 마나는 두 가지 형태로 변형되어 그의 손짓에 따라 지상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
그 말과 함께 변형된 마나 중 하나가 소용돌이로 변해 다가오는 마물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불.”
그가 다시 중얼거리자, 이번에는 다른 마나가 불로 바뀌었다.
소용돌이 위에 만들어진 불은 바로 소용돌이에 빨려들었다.
바람으로 만들어진 소용돌이가 순식간에 불의 소용돌이로 변했다.
크르르릉.
갑자기 생겨난 불 소용돌이에 놀란 마물들이 허겁지겁 뒤로 물러섰다.
‘마법사’가 마물 일부를 멈춰 세웠지만, 그는 거기서 끝낼 생각은 아닌 모양이었다.
“불의 벽.”
다시금 그가 말을 했고, 이번에는 소용돌이가 벽처럼 길게 늘어났다.
그의 말처럼 불의 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상당수 마물이 앞에 생겨난 불의 벽에 걸음을 멈추었다.
몇몇 마물들은 멈추지 못하고 불의 벽에 부딪혔고, 그 마물들은 불길에 휩싸여 바닥을 굴렀다.
역시, 환상도 아니고, 마나가 담기지 않은 평범한 불도 아니었다.
“불의 대지.”
‘마법사’는 계속 중얼거리며 손을 움직였다.
그의 말과 함께 불의 벽은 또다시 모양을 바꾸었다.
마물을 멈춰 세운 벽은 앞으로 무너져 멈춰선 마물들을 덮쳐버렸다.
벌판 한쪽이 불길에 덮여 버렸다.
크아아아아아!
불길에 휩싸인 마물들의 비명이 모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대단한 광경이었지만, 아직 ‘마법사’의 마법은 더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웨이브! 쓸어버려라!”
작게 속삭이던 그가, 외치듯이 소리치며 가지고 있던 마나를 터트렸다.
불로 만들어진 벌판에서 만들어진 불의 파도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놀란 마물들이 사방으로 피했지만, 많은 수의 마물들이 불길에 휩싸였다.
불길에 휩싸인 마물은 백이 넘어 보였다.
작은 마물부터 웬만한 집 크기의 마물까지.
마나가 담긴 불이라서 그런지, 마물들이 바닥을 뒹굴어도 불은 꺼지지 않았다.
몇몇 튼튼한 마물을 제외하고는 몸에 불이 붙은 마물들은 모두 목숨을 잃을 것처럼 보였다.
결국, 단 한 명의 공격에 백이 넘는 마물이 쓸려나간 것이다.
“남들과 달리 능력을 두 개나 얻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저렇게 다양하게 능력을 사용하게 된 것은 호르스트 백작 스스로의 능력인 거지.”
역시, 능력이 하나가 아니었다.
그런데, 두 개의 능력이라면, ‘바람과 불’이려나.
능력이 두 개라는 말에 나는 ‘지나가던 현자’가 떠올랐다.
설마, 저 검호도 그자가 능력을 추가로 일깨워 준 걸까?
어찌 되었건, 노인의 말대로였다.
남들과 다른 두 개의 능력을 가지고, 저렇게 다양한 공격을 하게 된 것은 전부 ‘마법사’의 실력이었다.
다만, 이런 공격을 계속 이어 나갈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마물들을 불에 구워버린 ‘마법사’는 창백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숨을 몰아쉴 만했다.
그의 몸에 있는 마나를 확인해 보니, 마나가 고갈되기 직전이었다.
대단한 위력을 보여주었지만, 그도 결국, 잠시 전선에서 물러서야 했다.
그가 리타이어 된 뒤에 노인이 훌쩍 성 아래로 뛰어내렸다.
마나를 모두 감춰서인지, 마물들은 아래로 내려선 노인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노인은 바닥에 내려선 뒤, 가지고 있던 세 검으로 주변의 마물을 찔러대기 시작했다.
푹. 컥. 푹. 컥.
마물들은 영문도 모른 채로 차례로 죽어 넘어갔다.
몇몇 마물들은 죽어가는 마물들을 보고, 노인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 마물들이 주변에 알리기 전에 모두 노인의 검에 찔려 바닥에 쓰러졌다.
그렇게 ‘마법사’가 백이 넘는 마물을 죽이고, 노인이 계속 마물들을 쓰러뜨렸지만, 아직도 요새로 달려오는 마물 전체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했다.
불의 웨이브와 노인이 있는 곳과 떨어져 있는 곳은 벌써 마물들이 성벽 아래에 도착해 있었다.
마물들은 성벽을 밟고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반파된 성벽을 다시 보수해서인지, 마물들은 부서지고 보수한 성벽을 잡고, 쉽게 위로 올라왔다.
그렇게 많은 마물이 성벽을 기어오르자, 여태껏 가만히 있던 여자 검호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올라오는 마물들을 보더니, 성벽 난간에 손을 올렸다.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를.”
오래간만에 듣는 그녀의 말과 함께 그녀의 손에서 마나가 피어올랐다.
그 마나는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내 눈에는 탁한 회색으로 보였다.
뭔가, 꺼림직한 느낌이 들었다.
그 꺼림직한 회색 마나는 성벽을 타고 폭포수처럼 아래로 흘러내렸다.
당연히 위로 올라오는 마물들은 그녀가 아래로 흘려보면 마나와 맞닿게 되었다.
“크릉?”
그녀의 마나와 닿게 된 마물들은 바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아래로 추락했다.
쿵. 쿵. 쿵.
물론, 전부 추락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 매달려 있는 마물도 많았다.
하지만, 아직 매달려 있는 마물들도 올라오고 있지는 못했다.
황당하게도 바닥에 떨어진 마물들은 몸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설마, 방어막이 약해진 걸까?’
그런 의문은 투레 백작이 바로 풀어주었다.
“지금이다, 떨어진 마물과 매달려 있는 마물들을 공격해라. 전보다 쉽게 마나 방벽을 부술 수 있다!”
매달려 있는 마물도, 지상에 떨어져서 다시 올라오지 못하는 마물도, 여자 검호의 마나에 닿은 마물들은 전부 약해져 있었다.
마물들은 떨어지는 충격을 완전히 막아 내지 못할 정도로 마나 장벽이 약해졌고, 성벽에 매달리지 못할 정도로 힘도 약해졌다.
병사와 기사들은 신이 나서 창을 던져대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던진 창은 마물들의 몸을 꿰뚫었고, 병사들의 던진 창도 전처럼 아무 효과가 없지는 않았다.
마나 방벽을 뚫지는 못했지만, 병사들의 창도 마물들을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었다.
병사와 기사들이 신이 나서 마물들을 떨구는 사이, 나도 대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성벽 위를 부탁드립니다.”
지휘자가 둘이나 성벽 위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제국 병사와 기사들을 지휘하는 것은 투레 백작이 훨씬 나았다.
원래부터 마왕이 오기 전까지 성벽 위는 투레 백작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내 말에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도 노인처럼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마왕에 대비하기 위해 능력자들을 뒤로 물려두었지만, 그 바람에 요새가 함락되기라도 한다면,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을 터였다.
다들 죽어서도 나를 따라다닐 테지. 그럴 수는 없었다.
적어도 여기서 마왕을 끌어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번 삶의 내 영지 때처럼 마물들을 최대한 줄여야 했다.
나는 아래로 떨어지면서 지상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부우우우웅.
거대한 검기가 내가 검을 휘두르는 대로 계속 검에서 튀어나왔다.
빛나는 선이 계속 지상으로 쏘아졌다.
촤아아악!
지상에 피로 된 선 하나가 그어졌다.
서걱!
바로 이어 그 뒤에 다른 선이 또 하나 생겨났다.
이렇게 마물들이 모여 있으니, 아무렇게나 휘둘러도 선 하나에 여러 마리의 마물을 잘라낼 수가 있었다.
저번 삶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역시, 통제를 받는 마물과 받지 않는 마물의 차이는 상당했다.
나는 다른 검호들이 막아서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마물들을 막아섰다.
썰고, 부수고, 잘라내고, 정신없이 움직이니, 언제부터인가 마물들의 압력이 낮아진 것이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내 주변에는 살아 있는 마물 대신 시체의 산이 쌓여 있었다.
마물들은 모두 멀찌감치 물러서 있었는데, 마물들의 눈에는 공포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상황을 보니,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해도 슬슬 넘어가고 있고, 다른 곳의 마물들도 숫자가 많이 줄어 있었다.
그렇게 싸움을 끝내고, 다시 성벽 위로 올라서니, 병사도 기사도,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져 있었다.
불만이 가득했던 귀족들도 질린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고,
지쳐 보이는 검호들도 감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물 왕을 쓰러뜨렸다는 걸로,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신위를 보여줄 줄 몰랐군. 내 사과를 받아주게.”
‘마법사’는 정중한 목소리로 내게 고개를 숙였고, 노인은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올리며 작게 웃었다.
여자 검호도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투레 백작은 홀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새의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검호들과 내가 성벽 아래에서 열심히 마물들을 쓸어버렸지만, 결국 성벽 위까지 올라온 마물도 많았고, 그 마물들을 모두 투레 백작이 상대하기는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수십 명의 기사와 수백 명의 병사가 첫날에 죽어 나갔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병력이 죽어 나간 우리 요새는 다른 요새에 비하면 무척이나 선방한 것이었다.
“3번 요새가 무너졌습니다.”
“7번 요새가 전멸했습니다.”
“10번 요새의 병력은 퇴각 중입니다.”
“2번 요새에서 구원 요청이 왔습니다, 병력은 반으로 줄고, 성벽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답니다.”
“1번 요새는…….”
다음 날 아침, 들려온 주변 요새의 소식은 전부 암울했기 때문이었다.
아침 회의에 다른 요새를 도와야 한다는 말들이 있었지만, 나는 그 부탁을 모두 거절했다.
지금은 무너지는 요새들을 도울 때가 아니었다.
이곳에 모든 검호를 모아 놓은 것도, 내가 여기 있는 것도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얼마 전 마물 왕들이 공격했을 때도, 이 요새에 검호들이 모여서 막아 내려 한 것처럼,
나는 이 요새로 마왕을 불러들일 작정이었다.
그러기 위한 배치였고, 그러기 위한 검호들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내 계획은 틀리지 않았다.
다음날 오후.
마물들의 움직임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던 마물들이 진형을 갖추고, 서서히 물러났다.
그리고, 엄청난 수의 마물들이 북쪽과 남쪽에서 이 요새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른 요새들을 무너뜨린 마물들이었다.
마물의 움직임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지 못했어도.
다른 곳의 마물들이 모여든다는 소식을 몰랐어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요새의 동쪽 숲 위로 거대한 마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동안 거대했던 마물 왕들의 마나가 왜소해 보일 정도의 마나.
마왕이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