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9화
제14편 출정 (2)
부대는 동쪽으로 빠르게 움직였지만, 간간이 행군을 멈춰야 했다.
뒤늦게 부대에 합류하는 병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온 기사단이 투레 백작 앞에 서서 그에게 인사를 했다.
“로이부르크에서 왔습니다. 투레 백작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투레 백작 앞에 기사단이 정렬했고, 대표로 나선 기사가 투레 백작에게 인사를 했다.
훈련이 잘되어 있는 정예로 보이는 기사단이었다.
경례하는 기사는 물론, 백작 앞에 나란히 선 기사들은 모두 백작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여자도 아니고, 나이 든 기사에게 저런 눈빛이라니.
투레 백작이 얼마나 존경을 받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합류를 환영하네. 로이부르크의 기사들이면 큰 도움이 되겠군.”
투레 백작도 기사들을 보고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미안하군. 다른 때였으면 크게 환영 잔치를 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군.”
“괜찮습니다. 환영을 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도착한 뒤에 하기로 하세. 앞의 병사를 따라가게. 어디에 설지 알려줄 걸세.”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왕 살해자는 어디 있는지…….”
“또, 자네를 찾는 것 같은데…….”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는 투레 백작의 말에 앞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출병식 때, 일반인들과 귀족들 사이에서 외면을 받았던 것과 달리, 부대 내에서는 나를 외면하는 사람이 없었다.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유와 인기가 그 사람의 위치를 만들어주는 출병식과 달리, 마물과 싸우러 가는 부대에서는 실력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전생과 달리, 사람들 사이의 실력이 천양지차이기에, 병사와 기사, 전투에 참여하는 귀족들은 실력 우선 주의자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쉽게 말해, 마물은 일반 병사는 상대도 못 할 전차 같은 존재들이었고, 기사들은 그 전차들을 부술 수 있는 대전차 병기나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평범한 전차가 아닌 거대한 전함 같은 무시무시한 마물왕을 쓰러뜨린 전략 미사일 같은 기사가 있다면, 다들 그를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소문은 투레 백작과 같이 싸워서 쓰러뜨린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를 무시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당연히 내 지휘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없었다.
거기다, 마물왕과의 싸움을 본 기사들 사이에서 흘러나온 소문들이 내 입지를 갈수록 올려주었다.
투레 백작도 그런 소문을 부인하지 않았으니, 부대 내에서 내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지금처럼 다른 영지에서 온 기사들이 부대 내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알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나를 찾는 이유는 얼마 전 내가 다른 마물왕을 쓰러뜨렸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 소문은 차도프 자작, ‘조직’이 퍼트린 것이었다.
다른 영지들의 지원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으니, 내가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문제는 내 별명이 저번 삶에서처럼 ‘왕 살해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정말 왕이나 황제가 제일 싫어할 만한 별명이었다.
제국의 황제 대리나, 카를로스의 여왕과 사이가 좋아서 다행이었다.
왕 살해자라니…….
잘못했다간, 반역자로 몰리기에 딱 좋은 별명이었다.
별명은 영 마음에 안 들었지만, 어쨌거나 계속 합류하는 병력들을 통솔하기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앞으로 나서서 그들을 환영했다.
투구까지 쓴 갑옷 차림으로 인사를 받자, 기사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출정식 이후로 나는 투구를 벗지 않고 있었다.
이런 인사를 하려면 적어도 얼굴을 보여주는 게 예의였지만, 나는 얼굴을 보여주는 대신, 실력을 보여주었다.
“반갑습니다. 사고로 얼굴에 상처를 입어 투구를 벗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변명 같은 인사를 하며 기사들 쪽으로 마나를 풀어놓았다.
파파팟!
마나를 풀자, 기사단 주변에 스파크가 일었다.
기사들이 펼쳐놓은 마나와 내 마나가 충돌한 것이다.
“와아…….”
“이런 마나라니…….”
“이게 마물왕을 쓰러뜨리는 기사의 마나인가…….”
다른 때였으면, 시비가 걸릴 일이었지만, 기사들은 주변을 감싸는 스파크에 크게 감탄했다.
그들의 표정을 보니, 다들 내 얼굴이나 내 정체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어진 것 같았다.
역시,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 찬…….
아니, 아니, 실력 우선주의인 기사들다웠다.
이렇게 실력을 보여준 것도 처음이 아니었다.
조금은 유치한 실력 행사였지만, 기사들에게 인정을 받기에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
대신 각성한 귀족이나, 장교들에게는 잘 안 먹혔지만, 그들은 투레 백작 선에서 정리가 되니, 내가 나설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계속 이동하는 중에, 각 영지에서 몰려온 기사단과 귀족, 병사들이 합류하니,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부대의 규모가 두 배로 늘어나 있었다.
그렇게, 몇 주의 여행 끝에 부대가 도착한 곳은 제국과 봉인지가 맞닿은 곳에 있는 요새였다.
제국과 봉인지 사이에 만들어진 열 개의 요새 중 다섯 번째에 있는 요새.
초대 황제의 이름을 딴 빌헬름 요새였다.
초대 황제의 이름을 딴 것과 달리, 요새는 영 보기가 안 좋았다.
원래는 튼튼하고 멋진 요새였을 것 같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요새는 아무리 봐도 크게 반파되었다가 급하게 복구한 것 같았다.
투레 백작은 요새를 보며 혀를 찼다.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은 몰랐군.”
“여기 계셨었습니까?”
내 말에 백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가 쓰러뜨린 마물왕을 이 요새에서 마주쳤었지. 거기다 어느 정도 막아내기도 했고.”
투레 백작의 말에 나는 한참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아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을 터였다.
“그래 봤자, 뚫린 것은 뚫린 것이니까. 요새가 허술해 보이는 것도 그때 부서진 여파 때문일 걸세.”
백작의 말에 가슴이 조금 따끔거렸다.
이 요새가 뚫린 이유는 나 때문일 터였다.
내가 마물을 부르는 지팡이를 서쪽 평야에 묻어놓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마물왕은 멀리서도 나를 인식하고 나를 추적했으니.
요새의 병력으로는 마물왕을 막을 수 없었다.
나 때문에 박살 난 요새로 와서 마물을 막게 되다니.
어처구니없는 결과에 나도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때처럼 쉽게 길을 열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길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 최대한 피해를 줄 생각이었다.
저번 삶에서 마왕의 첫 등장은 제국 수도 방어전에서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전에 마왕이 나서게 할 생각이었다.
마물들을 쓰러뜨리고, 그 뒤에 앞으로 나선 마왕을 모두의 힘을 합쳐서 제지해볼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 기사들이나 하급 귀족들 이상의 능력자들이 필요했다.
바로, 제국이 자랑하는 검호들.
내가 태반을 죽인 그들이었다.
병력을 요새에 들인 며칠 뒤, 투레 백작은 성벽 위에 올라, 서쪽 길을 바라보았다.
병력들이 요새 안에 들어와 한가해진 길 위에 낡은 마차 하나가 요새로 다가오고 있었다.
투레 백작은 마차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저기 오는군. 저 노친네는 나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나도 투레 백작 옆에 서서 마차를 바라보았다.
검호가 온다고 해서 백작과 함께 성벽 위로 올라온 것이었는데, 다가오는 마차에서 느껴지는 마나는 무척이나 작고 왜소했다.
저 정도면 평범한 기사만도 못한 마나였다.
하지만, 나는 속지 않았다.
저 마나는 약하고 왜소해 보였지만, 실제로 약한 마나가 아니었다.
저 정도로 확실히 숨길 수는 없었지만, 나도 비슷하게는 할 수 있었다.
마차에 탄 사람은 지금 자신의 마나를 감추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내 이상으로 마나를 정교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마나를 볼 수 있는 능력자도 속일 수 있을 정도.
방향은 달랐지만, 검호다운 실력이었다.
“조직의 힘은 정말 대단하군. 고향에 박혀서 절대 안 나올 것 같은 이들도 다 나오게 한 것을 보면.”
그만이 아니었다.
아직 오지 않은 검호도 있고, 이미 와 있는 검호도 있었다.
모두 제국의 황위 계승전에 참여하고 싶지 않아, 은둔하거나 잠적했던 검호들이었다.
조직은 그들을 모두 불러낸 것이다.
황위 계승전이 아니라 마물을 상대하는 것이니, 검호들도 조직의 권유를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투레 백작의 말이 들려왔다.
“하기야, 마물왕을 둘이나 쓰러뜨린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검호는 없을 테니까.”
마물 때문이 아니었나?
설마, 찾아오는 검호들과 계속 대련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투레 백작의 말에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모여드는 검호들을 보며 나는 그동안 내가 죽인 검호들이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그들이 살아있다면 더 도움이 되었을 테니.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그 검호들은 나를 죽이려 했던 자들이었다.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그때의 삶을 반복하고 있었을 터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필요에 따라 적과 손을 잡았을 뿐이었다.
필요가 사라지면 원래로 돌아갈 뿐이었다.
“어찌 되었건 이렇게 도와주러 오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하, 그래 봤자, 저 검호들은 제국이 위험할 때 집에 틀어박혀 있었을 뿐이야. 정작 제국이 감사해야 할 것은 ‘왕 살해자’인 자네일세.”
투레 백작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 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제국을 위해서만 한 것도 아니고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마물 왕들을 쓰러뜨릴 때, 발레아가 돕기도 하고, 대공녀가 돕기도 했다.
그리고, 진짜로 제국을 위해 한 일이 아니었다.
나를 위해, 내 소중한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제는 가슴이 따끔거리지도 않았다.
나는 말을 이었다.
“검호분들이 오시고 있으니, 봉인지에서 나오는 마물과 마물왕은 여기서 막을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내가 생각해도 연기를 꽤 잘했다.
내 거짓말에 투레 백작도 주변의 기사들도 흐뭇한 표정을 지었으니까.
그렇게 요새에 검호와 병력이 모이는 사이, 봉인지가 변하기 시작했다.
* * *
마물들을 통솔하던 마물왕이 죽은 뒤, 탑 주변은 휑하니 비어버렸다.
호수 근방에는 아직 떠나지 못한 마물들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호수 중앙의 탑에는 마물이나 살아있는 짐승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탑 주변의 마물 사체들이 썩어가는 냄새를 풍길 뿐이었다.
그렇게 황량한 분위기를 가득 풍기던 탑이 어느 순간 분위기가 확 변했다.
탑을 보면 뭔가 위험하고,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호수 주위에 남아 있던 마물들은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탑을 바라보았다.
잠시 뒤, 호수 전체에 음성이 울려 퍼졌다.
[관리자가 만들어놓은 봉인이 파괴됩니다. 모두 마나 충격에 대비하십시오.]
그 음성이 끝나기도 전에,
콰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호수 전체에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큰 호수에 작지 않은 해일이 일 정도였다.
놀란 마물들이 물을 피해 사방으로 달려갔다.
그 때문에 마물들은 탑 꼭대기에 먼지가 피어오른 것을 보지 못했다.
절대로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탑의 옥상이 부서진 것이다.
큰 구멍이 뚫린 옥상.
옥상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옥상 난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옥상에서 보통 사람이라면 보이지도 않을 섬 위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하늘을 나는 시체 사이에 굴러다니고 있는 다른 시체를 찾아냈다.
남자는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는 벽을 박차 속도를 줄이지도 않고, 그대로 바닥까지 내려왔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사체들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그는 흩어지는 사체에는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단지, 그의 앞에 놓인, 마른 고목 같은 사체를 내려다보았다.
“검 파편이 없군. 누가 파낸 건가?”
그 마왕은 두개골이 보이는 마물의 시체를 확인한 뒤에 고개를 들어 서쪽을 바라보았다.
“설마, 검을 복구한 걸까? 그럼 좋겠는데……. 금방 알 수 있겠지.”
그 말 뒤에 마왕은 서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탑 주변에서 마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방으로 퍼져나갔던 호수의 물이 다시 돌아와 탑 주변의 시체를 쓸어갔고.
놀라 달아나던 마물들은 뭔가에 홀린 듯이 서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탑 주변의 마물들만이 아니었다.
봉인지의 모든 마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왕이 봉인을 풀고, 두 번째 대전쟁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