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8화
제13편 출정 (1)
“능력을 일깨워 주는 현자? 아, ‘그’를 말하는 건가?”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지. 예언가와 비슷하다고 할까. 하지만, 예언가는 자주 보아서 그러려니 했는데, 그는 몇 년 혹은 몇십 년 만에 보게 되어도 전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라, 정말 신기했지.”
“그도 예언가처럼 늙지 않는 유물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건지도.”
“지금도 나는 물론이고, 조직에 있는 다른 원로들도 그에 대해서는 확신을 못 하고 있지.”
“조직원 중에 원로이거나, 중책을 맡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그를 아는 사람은 없어. 소문을 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을 최대한 숨기고 싶은 듯했지.”
“그도 조직에 속한 사람이긴 하지만, 조직에 매여 있지는 않았어. 차라리 조직과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위치랄까.”
“그는 조직을 통해서 각성을 연구, 발전시키고, 조직은 그 결과를 이용하는 거지.”
“조직은 물론이고, 제국, 대륙의 귀족들이 이 정도나마 용사들의 능력을 쓰게 된 것은 그의 연구 때문일 거야.”
아쉽게도 죽은 노인도 ‘능력을 일깨우는 현자’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았다.
그나마 조직에 속해 있는 이가 맞다는 것과 무척이나 오래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생각보다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다만, 존경이야 노인이 조직에 속한 입장이었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터였다.
노인의 말에 따르면,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 왜 그런 일을 하고 있는지는 조직을 더 털어봐도 알 수 없을 듯했다.
많지 않을 정보였고, 더 알아내기도 어려워보였지만, 그래도 이정도 정보라도 얻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그나마 끈 하나 정도는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니.
계속 파다 보면 결국 꼬리를 잡을 수 있을 터였다.
다만, 지금은 더 파볼 때가 아니었다.
황제가 계약을 따르기로 한 이상, 이제부터는 마물과의 싸움을 준비해야 했다.
나는 불타는 장원을 뒤로하고 황궁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조직도 제국의 치안대도 수도 밖 장원이 불탄 것을 나와 연관 짓지는 못했다.
조직안에서는 장원이 불탄 것 때문에 말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황궁 금고가 사라진 이상, 장원과 노인의 가치는 많이 사라졌었기에, 말들은 금방 사라졌다.
그리고, 봉인지의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있다는 접경지의 연락이 온 덕에, 조직은 마왕이 봉인을 깨고 다시 나온다는 내 예언(?)을 믿어주었다.
조직이 믿어 주고, 힘을 실어준 덕에, 황제가 약속한 지원은 빠르게 실현이 되었다.
죽은 전 황제가 얼마 전 마물왕을 처리하는데, 황실 기사단 태반을 날려 먹었지만, 제국의 힘은 황실 기사단만이 아니었다.
아직 황실 기사단 안에 2 황자파도 남아 있었고.
어쨌거나, 마물을 막기 위해 병력을 내놓으라는 황제 대리의 명령에 귀족들과 영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기사단과 하위 귀족, 영지병을 내놓았다.
지시가 생각보다 훨씬 잘 먹혀들어 가는 모습에 황자가 어리둥절했지만, 이건 모두 조직의 힘이었다.
조직에 속하는 귀족들이 주변에 힘을 쓰기 시작하니, 제국의 귀족들이 모두 움직이게 된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제국을 다스리는 것은 황제지만, 제국을 뒤에서 지배하는 것은 조직이라는 말이 여실히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주 동안 병력을 모은 결과, 수도 앞 평야에는 거대한 군대가 모이게 되었다.
수도의 귀족과 주변 영지에서 모은 군대와 기사단들이었다.
짧은 시간에 모인 병력이었지만, 제국이라서 그런지, 내전 중에 본 카를로스 왕국의 병력보다 훨씬 많았다.
거기다, 아직 병력이 다 모인 것도 아니었다. 연락이 늦거나 멀리에서 오게 된 병력들은 아직도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그들을 전부 기다릴 시간은 없었다.
이곳에 모인 병력은 오늘 출발하고, 이곳에 도착하지 못한 병력은 중간에 합류하게 될 것이었다.
출발하는 당일, 성문 밖 벌판에는 모여든 많은 병력만큼 가문마다 다른 문양이 그려진 갑옷들이 마구 섞여 있고, 영지들을 나타내는 깃발들이 수십 개나 펄럭이고 있었다.
저렇게 섞여 있는 병력을 어떻게 지휘할지 걱정이 절로 드는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차르마니아의 남쪽 성벽 앞 벌판에 사람이 가득했다.
출병 준비를 끝낸 기사와 병사들도 많기는 했지만, 이 넓은 평야를 채울 만한 수는 아니었다.
이 평야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병사들이 아니라, 수도 차르마니아에서 출병식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 제국인들이었다.
너른 벌판을 가득 채운 것을 보면, 수도 안에 있는 제국인들은 다 나온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출병 준비를 마친 군대와 출병식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제국인들 앞에는 높은 단상이 서 있었다.
출병식을 진행하기 위한 단상이었다.
단상 앞에는 의자에 앉은 귀족들이 있었고, 단상 위에는 몇몇 사람이 올라와 있었다.
황제 대리인 2 황자와 몇몇 귀족과 기사.
그리고, 멋진 갑옷을 차려입은 내가 서 있었다.
시간이 되자, 먼저 병력을 지원한 영주와 귀족들이 차례로 나와 축사인 듯한 자기 자랑을 한 뒤에, 황자가 앞에 나섰다.
소란스러웠던 벌판이 조용해졌다.
이윽고, 황자가 입을 열자, 음성을 증폭하는 유물이 2 황자의 목소리를 벌판 전체에 퍼트렸다.
“마물과의 전쟁 이후, 폐허 위에 세워진 제국은 수백 년간 대륙을 지배하며 번영을 해 왔었다. 그 번영은 모두 마왕을 봉인하고, 봉인지에 마물을 몰아넣은 대전쟁 때의 용사들과 병사들의 희생 덕분이었다.”
아마도 그의 연설은 다른 이가 써 준 연설인 듯했다. 만사가 귀찮은 그가 저런 연설을 할 리가 없으니.
하지만, 내막을 알지 못한다면 꽤 훌륭한 연설이었다.
“우리 제국은 그 희생을 잊지 않았고, 마물을 막아내야 한다는 사명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내 형, 황제께서도 얼마 전에 수백 년 만에 봉인지에서 쏟아져 나온 마물왕들과 마물들을 처리하다가 목숨을 잃으셨다.”
어라, 다른 사람이 쓴 게 아니라, 직접 쓴 연설이었나?
멀리서 음성만 들으면 모르겠지만, 바로 뒤에서 보고 있으니 알 수 있었다.
저건 분명 전 황제를 비꼬는 말이었다.
“형님의 희생 덕에 우리는 제국을 공격한 마물과 마물왕들을 모두 쓰러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물들의 침공은 거기서 끝난게 아니었다.
지금 다시 봉인지에서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려 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2 황자의 연설은 전 황제를 비꼬는 말 말고도 무척이나 훌륭했다.
“그리고, 나는 그 마물들이 다시금 제국을 짓밟게 둘 생각이 없다!”
진심이 담겨 있는 듯한 고함과.
“지금부터 나와 황실, 제국의 기사, 귀족과 군대는 죽은 형, 황제의 뜻을 따라 마물들을 막을 생각이다.”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호소,
“바로 오늘! 우리의 군대와 기사들은 수도 앞에서 마물왕을 쓰러뜨린 두 기사의 지휘를 받으며 봉인지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따르게 하는 외침까지. 2 황자의 연설은 전생에 들었던 독재자의 연설 같았다.
황자는 연설 마지막에 단상에 앉아 있는 나와 늙은 기사를 가리켰다.
마물을 쓰러뜨린 두 기사.
그것은 나와 투레 백작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전 황제를 모신 것 때문에 자택 연금이 되거나 고향으로 내려가게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또 이렇게 싸우러 가게 될 줄이야……. 이건 분명 자네 때문이겠지?”
옆에 앉아 있던 투레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내게 말했다.
나도 같이 일어서며 투레 백작의 팔을 힐끗 쳐다보았다.
저번 삶과 달리, 이번 삶에서는 그의 양팔이 온전했다.
멀쩡한 검호, 그것도 이렇게 호흡이 잘 맞는 기사를 써먹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 이 부대의 지휘관으로 그를 2 황자에게 추천한 것은 나였다.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마물왕을 쓰러뜨렸다지만, 정체도 모르는 외부인이 제국의 군대를 지휘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
황제에게 지휘를 약속받았지만, 외부의 시선을 가려줄 사람은 꼭 필요했다.
그 일에는 투레 백작이 안성맞춤이었다.
다행히 투레백작도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는 2 황자의 손짓에 따라 앞으로 나서며 작게 대화를 나누었다.
“네. 제가 추천했습니다.”
“다른 곳에서 병력 지휘는 해 봤나?”
“네. 다른 이들에게는 피해는 주지 않을 겁니다.”
사실, 나는 전쟁 경험도, 부대를 지휘한 경험도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특히 마물과 싸운 경험은 아마도 대륙의 누구보다 많이 있었을 터였다.
투레 백작은 앞에 선 관중들을 향해 인사를 하며 내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옆에서 구경이나 해야겠군. 그동안 자네에게 빚을 진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는데, 이번에 좀 갚을 수 있겠군.”
마물왕과 같이 싸운 뒤로 투레 백작은 내게 빚을 진 것처럼 느껴진 듯했다.
마물왕은 내가 다 잡은 것이었는데, 영광은 그가 더 많이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저번 삶과 달리, 내가 정체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싸움을 본 사람 중에 실력이 있는 기사들은 내가 더 활약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평범한 병사들은 그런 것을 구별할 눈이 없었다.
저번 삶에서는 내가 샤를 백작이라는 것이 알려져서 기사들이 내 실력을 열심히 알렸었지만,
이번 삶에서는 내 정체를 모르는 기사들이 입을 닫은 덕에 평범한 사람들의 환호는 투레 백작에게 가게 되었다.
지금 사람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황자가 나를 소개할 때는 크지 않던 박수 소리가 투레 백작을 소개할 때는 벌판 전체가 터져나갈 정도로 커졌다.
많은 병사와 제국인들이 투레 백작의 이름을 계속 외칠 정도였다.
확실히 투레 백작이 내게 미안해할 만했다.
그래도, 그 덕분에 내가 지휘를 맡은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투레 백작이 실질적으로 이 군대를 지휘하는 것이고, 마물왕을 같이 쓰러뜨린 나는 명예직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그 반대였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출정식이 끝나고, 봉인지의 마물들을 막기 위한 제국의 군대가 제국인들의 환호를 받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 희망에 차서 기쁜 얼굴로 부대를 배웅하고 있었고, 길을 떠나는 기사나 병사들도 걱정하는 기색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앞으로 다가올 일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선두에 서서 부대를 이끄는 나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닥칠 일을 말해 주지 않았다.
말해도 바뀔 것은 없었다.
어차피, 이들은 쏟아져 나오는 마물들의 발을 붙잡고, 수를 줄이기 위한 병력일 뿐이었다.
내 영지까지 올 마물들의 수를 줄일 병력.
이들에게 그 사실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