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5화
제10편 금고지기 (1)
골목에 숨어 나를 주시하는 시선과 마나들.
적어도 기사급은 되어 보이는 마나들이었다.
조용히 볼일만 보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쉽게 끝나기는 어려울 듯했다.
더구나, 조직과 관련된 곳이라면 당장은 그냥 부수기도 애매했다.
어쩔 수 없이 우선은 상대를 평범하게 만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마나를 숨기고, 기세도 가라앉힌 뒤, 평범한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안쪽에는 건장한 남자가 서 있었지만, 용병 차림인 나를 막지는 않았다.
그렇게 입구를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눈앞에 생각지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분명, 교단의 정보원은 이곳이 제국 수도에만 있는 특이한 술집이라고 했었다.
확실히, 그 말대로 특이한 곳이긴 했다.
나도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곳은 본 적이 없었다.
내부는 생각보다 컸다.
밖에서는 여러 채로 보였던 건물이 사실은 하나의 건물이었던 모양이었다.
내부의 모습은 그동안 보아왔던 왕국과 제국의 술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안쪽에 무대가 있어, 연주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주변에는 술과 차를 마시며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벽 쪽에는 나무 칸막이들로 반쯤 가려진 자리들도 있고.
이 세상에서 처음 본 광경이었지만, 나는 분명 이런 장소를 알고 있었다.
전생에 보고, 들었던 살롱이 딱 이런 모습이었다.
물론, 내가 직접 경험했던 깔끔한 현대적인 살롱은 아니었다.
영화나 소설에서 보았던 르네상스 때의 살롱 같은 느낌이랄까.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이 세상은 왜 이리 뒤죽박죽인지…….
마나라는 게 존재하고, 대단한 문명을 이룩했던 고대 제국이 있다지만, 이렇게 시대에 안 맞는 것들을 보게 되면 매번 머리가 아팠다.
대륙의 중심지이자, 거대 제국의 수도여서 이런 술집이 생겨난 것이겠지만,
전생에서나 보았던 광경을 다시 보는 것은 묘한 감흥과 함께 떨떠름한 기분을 들게 했다.
그렇게 입구 앞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자, 곱게 차려입은 여자가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처음 오시는 건가요? 혹시 약속이 있지 않으시면 저와 합석하시겠어요?”
평범한 유혹처럼 말이지만, 나는 속으로 웃고 말았다.
마나를 풀풀 풍기면서 그런 말을 하다니…….
기사 정도로 마나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평범한 여성은 절대 아니었다.
왜, 입구에서 제지하지 않나 했더니, 안에서 사람을 붙여 체크를 하는 모양이었다.
이것도,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무척 낯설면서도 재미있게 느껴졌다.
어떻게 될지, 한번 따라가 보고 싶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만나기로 한 분이 저기 계시는군요.”
나는 멀리 칸막이 뒤에 반쯤 모습을 드러낸 남자를 가리켰다.
홀로 술을 들이켜는 남자. 바로 황실 금고지기였다.
예상과 달라서였을까?
내 말에 여성은 눈살을 조금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설마, 저분을 아시나요?”
평범한 질문처럼 가장했지만, 말속에 심문의 의도가 여실히 느껴졌다.
아직은 깽판을 칠 생각이 없었기에, 나는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황궁 일로 알게 되었습니다.”
내 말에 여성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일이 있으신 분을 잡았네요.”
그렇게 말을 하고, 여성은 빠르게 물러섰다.
동시에 사방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사라졌다.
이제야 신원 확인이 끝난 모양이었다.
평범하게 신분 확인이나 출입증을 확인하면 될 텐데 이게 무슨 장난 같은 일인지…….
물론, 그렇게 했으면, 내가 이곳을 들어오기가 훨씬 귀찮아졌을 테지만.
어쨌거나 나는 어이없는 광경에 고개를 저으며, 홀로 술을 들이켜고 있는 금고지기를 향해 걸어갔다.
창고 안에서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음침해 보였던 금고지기였지만, 여기서 보니, 훤칠한 중년 신사였다.
다만, 세상의 고난을 다 뒤집어쓴 것 같은 표정으로 술을 마시고 있으니, 로브를 벗어도 어두운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나는 술을 마시고 있는 그의 앞에 앉았다.
고개를 든 그는 내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내 용병 복장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그 복장은……. 당신은 설마, 얼마 전에 황실 금고에 왔던 용병입니까?”
역시, 투구로 가려진 내 얼굴은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때 입고 있던 갑옷은 알아보았다.
분명, 평범한 용병 갑옷일 텐데.
그는 굳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젊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는데……. 그 젊은 얼굴은 아무리 봐도 카를로스 왕국의 젊은 백작인 샤를 백작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군요.”
예상대로였다.
역시, 그는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나를 보고 바로 샤를 백작을 말할 리가 없었다.
저번 삶에서야 마물 왕과 싸우는 도중에 투구가 벗겨져서 그는 물론이고 수도에 사는 모든 사람이 내 정체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황실 금고를 방문했을 때는 그에게 내가 누구인지 알려 주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는 저번 삶과 달리, 나에게 왕국 창고에서 사라진 검에 관해 묻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내가 다녀간 뒤에 황실 금고가 사라져 버렸으니, 그는 검이 사라진 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는 술잔을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술 깨는 능력도 가지고 있는 걸까?
술 때문에 붉게 변했던 얼굴도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그는 작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카를로스 왕실 창고에서도 저주받은 검이 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왕실 국보인 ‘기사의 검’도 사라졌다가 나타난 적이 있었다는군요. 제국의 황실 금고가 사라진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일이겠지만, 뭔가 비슷하지 않나요?”
상대는 뭔가 대단한 일을 말하는 양 내게 말했지만, 나는 저번 삶에서 이미 들었던 말이었다.
아니, ‘기사의 검’ 이야기는 처음이려나.
어쨌거나, 나는 그의 말에 놀라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내가 왜 이곳까지 당신을 찾아왔을까.”
내 말에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가, 바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설마, 당신의 정체를 내가 알 것 같아서 온 건가?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알고.”
그는 내가 어떻게 그걸 알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그는 조직, 아니 나와 만났던 자작과 가까운 사이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자작과 가까웠다면, 내가 마왕의 부활을 예언했다는 것을 들었을 텐데.
물론 나야 저번 삶에서 들어서 안 것이었지만, 그걸 말해 줄 생각은 없었다.
대신 나는 그럴듯한 이유를 댔다.
“카를로스 왕실 창고지기와 당신은 비슷해 보였으니까.”
“……그걸로도 알 수가 있는 거였군.”
상대는 내 말을 바로 수긍했다.
자신들도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그동안은 비슷해도 상관이 없었을 터였다.
왕실 창고와 황실 금고에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테니.
이제 그런 사람이 나오게 되었으니, 이들도 문제를 고치려 할지도 몰랐다.
물론, 황실 금고가 없어졌으니 의미 없는 일이겠지만.
상황을 깨달은 그는 양팔을 쭉 펴서 주변을 가리켰다.
“그럼 이제부터 어쩔 생각이지? 나를 죽이기라도 할 건가? 하지만, 이곳은 평범한 술집이 아냐.”
설마, 조직의 비밀 거점쯤 되는 걸까?
그동안 수도에 있는 조직의 거점은 다 때려 부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남아 있었나?
하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어떻게 황실 금고로 들어가게 되었는지 듣지 못했나?”
“…….”
알려진 내 능력만으로도 비밀스러운 거점이 이곳을 박살 내는 것은 물론, 그의 입을 닥치게 할 수 있었다.
재미있게도 어느 순간부터 그와 나는 반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황실 금고를 사라지게 만든 범인이라고 확신하게 되니, 반말하게 된 거였고, 나야 그가 반말하는데 존댓말을 해 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협박하기에는 무척이나 편해졌다.
사실, 협박해서 비밀을 지키게 하는 것보다, 물리적으로 입을 막는 게 편할 수도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뒷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테니.
하지만, 당장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내 협박에 그는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우리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칸막이도 쳐져 있었고, 내가 열심히 방음벽을 펼쳐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쪽을 바라보더니, 침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은 관계없는 사람들이다.”
조금 전하고 백팔십도 달라진 말.
그의 가라앉은 분위기 덕에 비웃을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나로 끝내……. 끝내 주십시오.”
“비밀만 지키면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정말입니까?”
이런, 다시 거북한 자리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이런 멋진 곳을 난장판으로 만들 수 없었다.
나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참아 내며, 장사꾼처럼 가슴에서 문서 한 장을 꺼냈다.
교단의 대주교에게 여러 장 받아둔 계약서였다.
물론, 신관의 보증이 필요한 계약서였지만, 그건 걱정 없었다.
나는 일필휘지로 서로 간의 계약 내용을 적고, 그에게 서명하게 했다.
“여기에 서명하면, 제가 바로 교단에 가서 계약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강제성이 없는 계약이긴 하지만, 계약이 깨진 것과 당사자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으니, 큰 문제는 안 될 겁니다.”
계약 대상자가 마물 왕을 직접 쓰러뜨린 귀족이자 기사였다.
어겼다는 것과 상대가 어디 있는지만 알 수 있다면, 직접 해결이 가능했다.
그건, 나는 물론이고, 금고지기도 잘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는 몇 번 표정이 바뀌었다가, 결국, 문서에 서명했다.
그와 내가 서명을 한 뒤에도 신관 앞에서 서명했을 때처럼 문서에서 빛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럼, 나는 바로 교단에 등록하러 가겠습니다. 이제 계약했으니, 비밀을 지키리라 믿겠습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경고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내 말에 계속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런 그를 남겨두고, 걸음을 옮겼다.
나는 술집을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살롱을 닮은 술집을 둘러보았다.
들리는 음악도 달랐고, 분위기도 세련되지 않았지만, 잠시 회한에 잠길 만했다.
나는 그렇게 술집을 둘러보다가, 조금 전 금고지기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곳을 보게 되었다.
그곳에는 내가 이 술집에 들어왔을 때, 맞이했던 여성이 있었다.
나이 차이가 꽤 나던데,
애인이었을까.
하지만, 여성 쪽은 그가 있는 곳에 시선도 주지 않고 있었다.
살짝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젓고는 술집을 빠져나갔다.
내가 술집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금고지기도 술집을 빠져나왔다.
그는 골목 밖에서 기다리던 마차에 올라탔고, 마차는 급하게 거리를 주파해나갔다.
나는 근처 건물 옥상에서 달려가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예상대로였다고 할까.
틈을 보여 주었더니, 이렇게 냉큼 달려들다니.
저 금고지기는 내가 교단에서 계약을 처리하기 전에 누군가에게 내 정체를 말해 주려고 저렇게 달려가는 것일 터였다.
물론,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계약은 그 자리에서 체결되었다.
내가 계약을 처리할 능력이 있는데, 남에게 처리해 달라고 할 이유가 없었다.
단지, 그를 속였을 뿐.
이제 사냥감이 먹이를 물었으니, 둥지로 향하는 사냥감을 따라갈 때였다.
사실, 그가 어디로 갈지는 알 수 없었다.
그 현자와 관련된 곳으로 갈 수도 있고 전혀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었다.
물론, ‘현자’라 불리는 사람에 대해 알아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조직’과 연관된 곳으로 갈 터.
얼마 전 2 황자의 쿠데타를 도와주는 동안, 조직의 많은 거점을 부수고 사람들을 처리했다.
모두 연판장에 있는 내용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곳 술집처럼 연판장에 모든 내용이 나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조직의 핵심. 수백 년을 이어온 조직의 내부는 그런 연판장에는 나와 있지 않았다.
그런 곳을 찾기 위해서는 수백 년간 황실 금고와 왕실 창고를 담당한 이들을 이용해야 했다.
‘현자’라는 자도 마찬가지였다.
제국과 왕국, 왕실과 귀족들과 연관이 있던 그는 분명, 조직의 깊숙한 곳과 연관이 있었다.
조직과 손을 잡기로 한 이상, 조직에 대해 확실히 알아내야 했다.
저번 삶에서 정보를 얻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다.
당장, 힘을 합쳐 마왕을 상대할 동료인데, 알지 못하고 의심스러운 구석을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 동료가 직전까지 서로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적이라면.
적이 동료가 되었으니, 다시 적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왕과의 일이 끝나고, 제대로 마무리하려면 조직의 모든 것을 알아내 두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