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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천재는 무한리셋 중-484화 (484/563)

제484화

제9편 확인

자작은 ‘적대자’라는 내 말에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노려보던 그는 잠시 뒤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제가 조직의 일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군요.”

“꽤 높은 자리라는 것도 알고 있죠.”

“……많은 것을 알고 계시는군요. 사실 당신이 조직의 계획을 망치는 속칭 적대자라는 의심은 저희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본인이 밝힐 줄은 생각 못 했군요.”

그의 말대로 이번에는 내 신분을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지금도 얼굴을 가린 것은 그런 생각 때문이었고.

하지만, 지금은 조직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었다.

그가 놀라건 말건, 나는 그가 알지 못하는 사실을 하나 더 알려 주었다.

“동부 영지에 똬리를 튼 다른 마물 왕도 이틀 전에 죽였습니다. 이제 제국 안에는 남은 마물 왕이 없습니다.”

조직이 그들의 일을 망친 나를 돕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입은 피해 이상으로 나 자신을 유능하게 보여야 했다.

어쨌거나 나는 신이 인정하는 유능한 재원이었으니, 내가 해온 일의 일부를 그에게 알려 주면 될 터였다.

“당신은 마지막 마물 왕을 죽이고, 마왕이 봉인을 풀고 나올 시기도 안다는 겁니까?”

“마왕이 봉인된 곳도 알고 있죠.”

“그건 예언가님도 알지 못하던 것인데……. 역시, 예언가님이 예지하지 못하게 된 것은 당신의 능력과 충돌한 거군요.”

사실, 예언 능력이 아니라 다른 능력 때문이지만, 내 능력 때문에 예언가가 예지를 못 하게 된 것은 맞았다.

“저에게 이 사실을 모두 말하는 이유가…….”

“곧 마물들이 쏟아져 나올 겁니다. 그 마물들과 싸우게 될 때, 조직도 힘을 써야 할 테니까요.”

내 말에 그는 인상을 쓰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는 저번 삶에서 여유로운 모습으로 나를 대했었는데…….

그때와 달리, 내가 대화를 주도하게 되니, 그의 반응도 달라진 것 같았다.

“……조금 기다려 주시죠. 돌아가서 상의를 해봐야 합니다.”

사실, 따로 상의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죽은 황제를 지원하던 세력은 집사장의 죽음으로 세를 잃었을 테고, 그 반대편 세력의 대표는 내 앞에 있는 자작이니까.

그렇지만, 여기서 그런 이야기까지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다음에 만날 약속을 잡은 뒤, 자작을 돌려보냈다.

자작이 돌아간 뒤, 나는 응접실 바깥 테라스로 나갔다.

제국의 황궁에 있는 객실이라서 그런지, 응접실과 그에 딸린 테라스가 무척 컸다.

테라스 안쪽 자리에 앉아 있으면, 응접실에서는 테라스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그 자리에는 대공녀가 앉아 있었다.

“제국에서도 정말 많은 일이 있었나 봐요.”

대공녀가 신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 앞에 있는 찻잔은 손을 댄 흔적이 없었다.

나와 자작의 대화를 듣느라, 다과를 즐기지 못한 것 같았다.

사실 자작도 귀족이니, 시야가 가려져 있다고, 테라스에 누가 있는지 모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자작은 대공녀가 테라스에서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내가 테라스와 응접실 사이에 마나 장벽을 쳐놓았기 때문이었다.

대공녀는 식은 차를 손에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께서 사실확인을 해달라고 하시긴 했지만, 이렇게 되니, 제가 말한다고 믿어 주실지 모르겠어요.”

이어서 대공녀는 찻잔을 들고, 그녀답지 않은 푸념을 늘어놓았다.

“2 황자님을 구한 뒤 제국 수도를 장악하고, 수도 앞에서 마물 왕을 쓰러뜨렸다는 것만 말씀드려도 제 말을 믿기 어려워하실 거예요.”

확실히, 그녀 말대로 쉽게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래도, 공국왕이 신뢰하는 대공녀가 말한다면 믿어 줄 것 같았다.

“그런데, 거기다가 백작님이 조직이라는 제국 뒤에서 수백 년간 암약한 세력과 어렸을 때부터 싸워온 ‘적대자’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지…….”

그녀에게 너무 많이 알려 준 거였나?

그래도, 나와 함께 조직과 싸워온 대공녀였으니, 그녀에게도 조직과의 거래를 알려 주고 싶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는 전부 말씀드리면 안 될 것 같아요. 제가 같이 경험한 것이 아니었으면 저도 믿기 어려웠을 거예요.”

그녀는 조직에게 납치될 뻔한데다가, 아니, 없어진 삶에서는 납치가 될 뻔한 게 아니라 납치되었었다.

거기다, 전쟁도 벌어졌었고.

그녀는 내가 일시적이나마 조직과 손을 잡는 것에 불만이 많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조직에 대한 분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나에게 화를 내지도 않고.

그녀는 내 행동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역시, 그녀는 왕실의 여성이자, 대공녀였다.

대공녀와 함께 제국 수도에 도착한 뒤, 나는 그녀와 함께 2 황자를 만났었다.

대공녀는 내가 바로 2 황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에 놀랐고, 내가 2 황자를 대하는 모습에 다시 놀랐다.

거기다, 내게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들은 뒤, 더 놀랄 게 없다는 표정을 지었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하루가 지난 오늘 다시 바뀌었지만…….

어쨌거나 2 황자는 계약한 대로 내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기로 했다.

사실 전폭적인 지원이라는 건 별거 없었다.

지금부터 기사와 병사들을 준비시켜서, 봉인지에서 마물들이 쏟아져 나올 때,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일 뿐이었다.

물론, 그동안 내 지시에 따라 주어야 했지만, 그게 제국에 이득이면 이득이지, 손해될 일은 없을 터였다.

다만, 2 황자는 이득이든 손해든 관심이 없어 보였다.

“곧 마물들이 쏟아져 나온다고? 마왕도 봉인을 깨고 나오고? 그게 사실이라면 재미있겠군.”

그는 오히려 마왕을 볼 수 있게 된 것이 반가워 보였다.

복수를 끝내고 나니, 목적을 잃어서인 것 같았다.

그래도, 약속도 잘 지키고, 할 일을 안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따로 조언 같은 것을 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조언을 할 위치도 아니었고.

그렇게 황자도 보고, 조직에서 나온 귀족도 보게 되었으니, 대공녀가 더 확인할 것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이제 볼일은 다 끝난 건가요?”

“몇 가지 남아 있지만, 대공녀님을 공국으로 돌려보내는 게 먼저입니다.”

발레아처럼 소환이나 전송할 수 있다면, 바로 공국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겠지만, 대공녀를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교단의 전송진이 공국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결국, 열심히 공국으로 날아가야 했다.

“그럼, 공국에 머물지는 않으시겠군요.”

대공녀는 내가 제국으로 다시 돌아올 거라는 말에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제국으로 오지 않더라도, 공국에 머물 시간은 없었다.

계획이 바뀌었으니, 만날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대공녀의 표정을 보니, 그런 이야기는 안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다행히 그녀는 내 대답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네요. 방금 만난 자작도 다시 만나기로 했죠.”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이해시킨 뒤, 입에 대지 않은 찻잔을 다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대공녀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대공녀가 일어난 것을 확인한 뒤, 나는 마음속으로 내 소유물을 소환했다.

요 며칠 내 발이 되어준 ‘사룡’을 소환한 것이다.

나는 얼른 대공녀와 함께 언데드 마물, 사룡에 올라탔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기 전에 사룡을 하늘 높이 날아오르게 했다.

몇몇 눈썰미가 좋은 사람들이 날아오른 마물을 본 것 같았지만, 이미 작아진 마물을 확인할 방법은 없을 터였다.

나는 마물을 남쪽으로 향하게 하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 등을 감싼 대공녀의 머리 뒤로 점점 작아지는 제국 수도 차르마니아가 보였다.

대공녀를 공국으로 데려다주고, 제국으로 다시 돌아와야 하는 이유는 무척이나 많았지만, 제일 중요한 이유는 한 사람을 만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방금 만났던 자작을 만나는 것도 중요했지만, 내가 만나려 하는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내가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은 바로, 황실 금고의 금고지기였다.

황자를 만났을 때, 아직 상처가 치료되지 않은 황자는 다른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황자의 머리를 아프게 한 것은 황실 금고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일이었다.

만사에 의욕이 없는 황자였지만, 황실 금고가 사라진 것은 그에게도 큰일일 수밖에 없었다.

황자가 의욕이 없다고 바보는 아니었다.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 황실의 가장 큰 재원이 사라졌으니, 불안한 게 당연했다.

그 금고를 빼돌린 것은 나였지만, 황자는 물론,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황실 금고가 사라지기 전에 내가 금고를 방문하기는 했지만, 기사이자, 용병인 내가 황실 금고를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아니, 한 명 정도는 의심하고 있을 터였다.

그건, 바로 저번 삶 때에도 내게 의문을 표했던 황실 금고의 금고지기였다.

그 의심이 확신이 되기 전, 그를 만나봐야 했다.

나는 공국에 대공녀를 내려준 뒤, 바로 제국으로 돌아왔다.

왕복 하루.

하늘을 나는 마물이 있기에 가능한 일정이었다.

다만, 그 일정은 급하게 만든 언데드에게는 무리한 일정이었다.

“그동안 수고했다.”

이름까지 지어 준 하늘을 나는 마물, ‘사룡’은 제국까지의 마지막 비행 후 흙으로 돌아갔다.

나는 허물어지는 언데드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에 음침한 골목을 나섰다.

골목을 나서자, 환한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밤의 차르마니아.

제국 수도는 오랜만에 안정된 치안 덕분인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제국 수도의 유흥가였다.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이 지나다니고, 고급스러운 마차도 지나갔다.

마물들이 동부를 쓸어버리고, 마물 왕이 수도의 코앞까지 온 게 바로 전이었는데, 이렇게 흥청거리다니.

사람은 정말, 과거의 일을 금세 잊는 존재인듯했다.

나는 용병 차림으로 왁자지껄한 거리를 걸어가다가, 거리 한쪽에 있는 조용한 골목 앞에 멈춰 섰다.

골목 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약속한 신호를 보냈다.

내 신호에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는 지금 저 술집에 있습니다.”

그는 달갑지 않은 얼굴로, 골목 안쪽을 가리켰다.

셀린의 신도였다면, 이렇게 불친절한 얼굴을 할 리가 없었을 텐데…….

아쉽게도 남자는 셀린 여신의 신도가 아니었다.

그는 셀린의 신도가 아니라, 교단의 신도, 교단의 정보원이었다.

얼마 전이었다면, 사람을 찾는 데 셀린 교단의 힘을 빌렸겠지만, 지금 셀린 신도들은 우리 영지로 대피를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다행히, 제국 수도는 교단의 안마당이었고, 마침 교단의 대주교는 내가 부탁(?)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 앞에 선 남자는 내가 누군지 모를 테니, 불친절한 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원하는 사람을 찾았으니, 내 앞에 선 남자가 어떤 표정을 짓던 상관이 없었다.

팅!

나는 그에게 금화 하나를 던져 주고,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밖과 달리, 골목 안은 조용했다.

지저분하지도 않았고, 골목 끝에 보이는 문도 무척 고급스러웠다.

거리의 술집처럼 간판이나, 문에 문구가 적혀 있지도 않았다.

간판이 없는 술집.

전생의 요정이나 바 같은 곳인 듯했다.

나는 문으로 향했다.

사실, 내가 금고지기를 만나는 이유는 황실 금고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물어볼 게 있었다.

예언가 가문처럼 오랫동안, 제국과 카를로스 왕국의 금고지기를 해온 그들이라면 알지도 몰랐다.

많은 인생을 살면서 계속 들려온 ‘거리의 현자’라 불리는 자를.

아마도, 금고지기는 그에 대해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근래 내 예감은 잘 맞으니, 이번에도 뭔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예감이 틀린다고 해도, 제국과 틀어지지 않으려면 어차피 그의 입을 막아야 했다.

어떤 방법이든.

그런 생각을 하며, 문 앞까지 걸어간 나는 곧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문 안쪽, 골목 전체에 마나를 가진 이들이 가득 숨어 있었다.

이 술집도 평범한 술집이 아닌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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