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3화
제8편 용사
마물왕이 쓰러진 뒤, 땅 위에 온전하게 서 있는 건물은 대공녀가 서 있는 성벽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마물왕이 박살 냈던 성벽과 내성, 마을뿐만 아니라, 그나마 온전했던 다른 성벽들도 마물왕이 날뛰는 바람에 모두 무너져 내린 것이다.
확실히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는 마물왕다웠다.
그리고, 그 마물왕의 공격을 모두 막아낸 성물 지팡이는 방어용으로는 최고의 무기였다.
더구나 그 단단한 마물왕을 두들겨서 박살 낸 내 새로운 검도 대단하긴 마찬가지였다.
싸움이 끝난 뒤, 대공녀는 놀란 눈으로 자신이 들고 있는 지팡이와 박살 난 마물왕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고, 나는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창을 바라보았다.
<예상한 위험을 이겨내었습니다. 경험치가 상승했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을 설정하시겠습니까?>
봉인지 황궁터 지하에서 본 메시지창 이후로 두 번째 보는 메시지창이었다.
제국 수도 앞에서 좀비 거인을 잡을 때 뜬 이후로 마물왕을 잡자 다시 뜬 것이다.
그러고 보니, 탑 옥상에 있던 마물왕을 잡았을 때는 이 창이 안 떴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강적을 쓰러뜨릴 때만 나오는 걸까?”
적이 전략을 잘 짜고, 수많은 병력을 지휘한다고 해도, 개인적인 무력이 강하지 않으면 인정해주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이런 저장 시점은 예전에 지정해 놓은 것일 수도 있었다.
대전쟁이나 그 이전에.
탑 위에 있었던 이종족 마물왕은 대전쟁 이후에 등장한 마물왕이었다.
그는 마왕이 봉인되면서 넘겨받은 검의 파편으로 마물들을 지휘하는 능력이 생겨난 것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토록 많이 죽고, 그만큼 많이 회귀했는데, 아직도, 이 ‘사자 회귀’ 능력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지 않았다.
어떻게 내가 이 능력을 가지고 있고, 이 능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오’라고 작게 이야기하고는 메시지창을 치워버렸다.
사실, 지금은 메시지창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허공에 정보창을 펼쳤다.
<기사형 영웅 능력자>
<사용 능력>
- 육체 최적화 : 레벨 (52/?)
- 마나 회로 구축법: 레벨 12
- 마나 감응력: 레벨 12
- 장비 소환: 레벨 4
- 마나 방출: 레벨 5
<비인가 능력>
- 마나 유형화: 레벨 5
- 사자 회귀: 레벨 5 (벌칙 중)
- 신의 용사: 레벨 1
<능력 부여>
- 상태 보정: 한계 이상의 신체
싸우는 도중에 몸 상태가 달라진 것은 정보창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정보창 수치 자체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보창에 적힌 능력들이 한 단계씩 올라가 있었다.
확실히 전보다 강해진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정보창에는 올라간 레벨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동안 알 수 없었던 문자로 표시되던 능력이 제대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신의 용사’.
나는 새로 등장한 능력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하지만,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신의 용사’라니.
이런 이름의 능력이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뭔가 대단한 능력을 얻게 될 걸로 생각했는데, 동화책에 나올 만한 유치한 이름의 능력이 등장할 줄이야…….
더구나, 다른 능력과 달리, 이름만 보고는 무슨 능력인지 알기도 어려웠다.
나는 정보창을 노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신의 용사라니……. 이게 무슨 능력이지?”
“네?”
내 말에 대공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대공녀에게 물은 것이 아니었다.
내 손에 들려있는 검의 정령에게 물은 것이었다.
떨떠름한 내 물음과 달리, 검의 정령은 무척이나 감격한 목소리로 내 말에 답해 왔다.
[역시! 새로운 주인님이 용사로 선정되신 거군요!]
‘선정? 그게 무슨 말이지? 이건 능력 이름이잖아.’
나는 대공녀에게 손을 저으며, 속으로 검의 에고, 아니 정령에게 물었다.
[그건 인간들이 강제로 능력을 나누어 놓고, 저를 흉내 내서 만든 에고라는 가짜 정령들이 제대로 표현을 못 해서 그런 식으로 나타난 거예요.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나는 드디어 유물의 유래와 용사에 대해 제대로 듣게 되었다.
정령의 말에 따르면, 원래 대전쟁 전, 고대 제국이 대륙을 모두 점령하기 전의 이 세상은 내가 전생에 읽었었던 판타지 소설의 세계와 닮아 있었다.
[신을 믿고, 신이 내려주신 성물로 기적을 행사해서 종교가 만들어졌어요. 저는 전쟁 신의 성물이고요.]
그리고, 이 대륙은 그 종교들을 국교로 삼아 번창했었다.
[그리고, 가끔 다른 차원과 경계가 흐려질 때 마물들이 넘어왔죠.]
강대한 마물들에게 인간들이 고통을 받자, 신들은 인간들에게 용사들을 내려주었다.
성물을 사용하고, 신의 능력을 쓰는 신의 사자들을.
신이 세운 용사들은 차원을 넘어온 마물들을 쓰러뜨려 사람들을 구원했다.
그리고, 그 신의 용사는 사람들을 모아 나라를 세웠다.
그건, 대전쟁 이후 용사들이 나라를 만든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 결과는 조금 달랐다.
[제 전 주인도 신의 용사였고, 제국을 창시한 초대왕이었어요.]
대전쟁 이후의 용사들과 달리, 홀로 등장했던 용사가 세운 나라는 대륙을 모두 점령한 것이다.
그 뒤에 그 나라는 제국을 선포하고, 인위적으로 성물과 신의 용사를 만들었다.
바로, 유물들과 자칭 용사들이었다.
유물들은 성물들처럼 강대한 능력을 지니지 못했고, 새로 만들어진 용사들은 신의 용사처럼 엄청난 기적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많은 숫자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제국과 황실은 만족해했었다.
정령의 말투가 바뀌었다.
[다만, 제국은 첫 용사만은 신의 용사와 같은 능력을 가진 용사로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성물이자 제국의 신물인 저를 첫 용사의 손에 쥐여주었고, 역사에 등장한 용사들의 능력을 모두 그에게 주입하려 했죠.]
정령의 목소리는 회한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성공했어요. 그는 신의 용사 이상으로 많은 능력을 갖추게 되었어요. 제국이 원하는 이상으로 계속 강해졌죠.]
이건 마왕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가 어떻게 마왕이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
나는 정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는 신의 용사가 될 수 없었어요. 신들이, 그리고, 제가 그를 용사로 인정을 안 했으니까요. 아무리 강해져도, 아무리 훈련을 이어가도, 그는 신의 용사가 될 수 없었어요.]
시간이 지나자, 제국은 그를 감당하지 못하게 된 모양이었다.
강해질수록 그는 더 말을 듣지 않게 되었고, 더 이상 실험과 훈련을 받지 않으려 한 것이다.
그래서 제국은 그를 버리기로 했다.
다른 양산형 용사들이 만들어지고 있었으니, 더는 그가 필요 없기도 했고.
[하지만, 제국은 그를 죽일 수 없었어요. 어떤 방법을 쓰든, 그는 최악의 상황에도 살아 나왔으니까요. 결국, 제국은 그를 마물이 사는 세상으로 날려 보냈어요. 그를 훈련하기 위해 마물을 불러오던 문을 통해서. 그 뒤에 제국은 문을 닫았고, 그는 그 세상에 홀로 남겨지게 된 것이에요.]
‘그럼, 그가 대화할 상대는 정령인 너밖에 없었던 건가?’
[아뇨. 그는 누구와도 대화하지 못했어요. 저는 그의 손에 쥐어진 뒤로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정령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정령은 마왕과 오래 같이 지내서인지, 마왕에 대해 연민을 느끼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런 점에서는 완고했다.
거기까지 들은 나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그도 용사가 되지 못했는데, 난 어떻게 된 거지?’
정령의 말에 따르면 마왕은 고대 제국의 힘으로 과거 신의 용사의 모든 능력을 이어받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그렇게 강할 수밖에…….
아무튼 그런 힘을 얻은 마왕도 신의 용사가 되지 못했는데, 양산형 용사의 후손이자, 파편에 불과한 내가 ‘신의 용사’라니.
나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내 물음에 정령이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설마, 용사가 능력으로 정해진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능력은 용사가 된 뒤에 신에게서 얻는 것이에요. 용사가 되는 것은 신의 뜻이에요. 용사는 인간을 지키기 위해 신께서 선택하신 인간이에요!]
하긴, 정령의 말대로였다.
이미 용사의 능력을 지녔는데, 다시 용사로 정해질 이유가 없었다.
확실히 이해되었지만, 사실, 의문이 다 가신 것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신을 믿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셀린의 성기사에다가 신도들에게 계속 도움을 받고 있는데도 이렇게 신을 믿지 않고 있는데,
처음 듣게 된 전쟁의 신은 나를 ‘신의 용사’로 선정해 버린 것이다.
역시, 선정 기준이 이해가 안 되었다.
아무튼, 새로운 능력이 생겼으니, 얼마나 도움이 될지 알아봐야 했다.
‘그럼, 신의 용사가 되었으니, 나도 마왕 이상으로 강해질 수 있는 거야?’
이어진 내 물음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
‘못 들었나?’
내가 다시 말하려 하자, 정령의 말이 들려왔다.
[그건……. 그가 마물의 세상으로 가기 전이라면 가능했었을 거예요.]
처음으로 머뭇거리는 정령의 대답은 원하던 답이 아니었다.
[그는 그 세상에서도 계속 강해졌어요. 많은 위험을 헤쳐 나가면서 그는 끝없이 강해져 갔어요. 더는 덤벼오는 마물이 없을 때까지…….]
마왕은 용사 이상으로 강해진 모양이었다.
용사의 검이기도 했던 정령이 한 말이니, 틀릴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래도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거지?’
[네.]
아예 방법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래도 이제는 방법이 보인 것이다.
이제 곧 마왕이 봉인을 깨고 모습을 드러낼 테고, 나는 아직 ‘신의 용사’의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지만,
아직, 시간은 있었다.
그것도, 남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그리고, 봉인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물들을 막아내고, 마왕의 걸음을 늦출 수 있다면, 그 시간은 더 늘릴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 준비해 놓았던 계약이었다.
제국의 2 황자, 황제 대리와의 계약.
그 계약 내용을 시행할 때가 되었다.
나는 ‘사룡’을 소환해, 대공녀와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목적지는 제국의 수도였다.
이틀 뒤.
황궁 접객실.
나는 투구까지 쓴 용병 차림으로 한 귀족을 만나고 있었다.
내 모습은 얼마 전 수도 앞에서 마물왕을 쓰러뜨렸을 때의 모습이었고, 내 앞에 앉아 있는 귀족은 몇 번이나 만나서 안면이 있는 귀족이었다.
물론, 저번 삶에서 만나서 그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는 제라르 차도프 자작.
조직의 수뇌 중 한 명이었다.
내 얼굴을 가린 투구를 보며 그는 입을 열었다.
“전에는 만나지 않으려 하더니, 갑자기 왜 만나자고 한 겁니까?”
내 정체를 알았던 저번 삶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물론, 그를 만난 이유는 다른 게 없었다.
봉인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물들을 상대하려면 제국은 물론, 조직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저번 삶처럼 허무하게 밀릴 수는 없었다.
더구나, 마물을 지휘하는 마물왕이 없는 지금이 기회였다.
나 혼자 상대할 수 없으면, 다른 기사와 귀족, 군대와 상대하면 되었다.
마왕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 조직이었으니,
“내가 조직에서 부르는 적대자이니까요. 조직을 파괴하고 예언자를 죽였고, 마왕이 봉인을 풀고 나올 시점을 알고 있는 다른 예언가이기도 하고요.”
사실, 예언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내 능력은 따지고 보면 예언과 다르지 않았다.
내 담담한 말에 자작은 몸을 움찔 떨었다.
저번 삶에서는 무척이나 대담해 보이던 사람이었는데…….
저번 삶과 다른 모습이 무척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