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1화
제6편 전쟁 신의 검 (1)
어디선가 본 듯한 용사와 내가 빙의한 마왕이 서 있는 곳은 거대한 홀처럼 보이는 텅 비어 있는 실내였다.
그리고, 단순하지만 낯선 원형의 벽은 내가 본 적이 있었다.
바로, 마왕이 갇혀있다는 탑 안에서 보았던 벽과 같은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마왕이 갇혀있는 탑 내부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광경은 마왕이 봉인될 때의 모습이려나?
“이런 얄팍한 수에 당할 줄은 몰랐군. 아니, 어쩔 수 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건가.”
내가, 아니 마왕이 앞에 선 용사에게 말했다.
“정말 힘들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어라?
용사의 표정과 말투가 전에 보았던 기억과 많이 달랐다.
그때는 이렇게 무뚝뚝하지 않았었다. 사람들을 대할 때도 무척 살가웠었다.
마왕 앞이라서 그런 걸까?
그의 말에 마왕이 피식 웃었다.
마왕답지 않은 그런 웃음.
한심한, 아니 안쓰러운 웃음이려나.
“그래서 결국, 이게 최선이라는 건가? 나와 같이 봉인 당하는 것이?”
마왕의 비웃음에 그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게 최선이었다. 우리는 마왕을 죽일 방법을 찾지 못했다. 봉인을 위한 더 좋은 방법도 찾지 못했고.”
용사의 말에 마왕이 양손을 펼쳐 탑을 가리켰다.
“이 봉인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잘 알 텐데. 이 탑에서 나오는 마나가 무한한 것도 아니고, 네 능력이 영원할 리도 없고.”
마왕은 마지막으로 용사를 가리키며 혀를 찼다.
“결국, 무가치한 희생일 뿐이야.”
하지만, 용사는 마왕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아니, 무가치한 게 아니다. 널 봉인하는 것으로 내 동료들은, 친구들은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용사들, 네 동료를 위해 멸망을 뒤로 미룬다는 건가? 너희 후손들이 어떤 지옥을 보게 될지 모르는데?”
“하지만, 널 봉인하지 않으면, 후손 자체가 존재하지 않겠지.”
비웃는 마왕과 침착하게 그의 말을 반박하는 용사였다.
마왕과 용사 사이에 이렇게 평화로운 대화라니.
다른 곳이나, 다른 때였으면,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을 터였다.
분명, 마왕이 약해지거나, 용사가 대단히 강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마왕이 손에 들고 있는 검을 가볍게 휘두르기만 해도 앞에 서 있는 용사 정도는 산산이 부서질 터였다.
하지만, 마왕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용사와 마왕 주변에는 두 사람을 덮는 반투명한 반구가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마나가 담겨 있는 반구였다.
마왕의 말에 따르면, 이 반투명한 구가 앞에 선 용사의 능력으로 만들고, 탑의 마나로 유지되는 봉인이었다.
탑의 마나로 유지된다는 말처럼 점점 진해지는 반구는 엄청난 마나를 담고 있었다.
어떤 방어막에서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마나였다.
대공녀에게 준 성물 지팡이가 펼쳤던 대단위 방어막도 이 정도 마나를 담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이 반구에 담겨 있는 마나가 정말 대단하긴 했지만, 마왕이 부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저번 삶에서 본 마왕의 공격은 튼튼하고 거대한 성벽을 한방에 무너뜨릴 만한 그런 힘을 담고 있었다.
차라리, 재질을 알 수 없는 이 탑이 더 튼튼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마왕과 용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마왕 앞에선 용사는 자신이 있어 보였고, 마왕도 용사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다만, 마왕은 이대로 끝낼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너와 이런 만담을 마지막으로 봉인될 수는 없지.”
마왕은 그렇게 말하며 힘껏 검을 휘둘렀다.
용사 쪽이 아니라 천장으로.
검에 담긴 거대한 힘이 하늘로 쏘아졌다.
번쩍.
강렬한 빛이 홀 전체를 감쌌다.
저번 삶에 보았던 성벽을 부쉈던 공격만큼 강렬한 빛이었다.
그런 강렬한 빛이었지만, 충돌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구가 부서지는 소리도, 탑의 벽이 깨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환한 빛만이 홀을 채우더니, 다시 원래로 돌아왔을 뿐이었다.
탑도 반구도 변하지 않았다. 마치 강렬한 섬광탄만 쏘아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또 해봐야 소용없다.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물리적인 공격은 전부 정지시킬 수 있다. 잠시 뒤에는 공격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도 정지되겠지. 너도, 네 다른 능력도, 마물을 조종하는 네 능력까지.”
용사의 말에 마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래 보이는군. 저 반투명한 구를 부술 방법도, 내가 나갈 방법도 없는 것 같군.”
하지만, 마왕은 별로 실망한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만족한 듯했다.
“하지만, 좋은 말을 해 주었어. 아직 내 다른 능력은 쓸 수 있다는 말이니까.”
말과 함께 마왕은 검에 마나를 다시 밀어 넣었다.
방금 전과 다른 마나였다.
과격하고, 거친 마나.
이건, 검에 힘을 불어넣기 위한 마나가 아니었다.
검에서 비명이 들려온 것 같았다.
아니 비명이 들렸다.
검이 붉게 타오르고,
카아앙.
검이 박살 났다.
파편이 되어 세 개로 나뉜 검.
셋으로 나뉜 검은 마왕의 마나에 붙잡혀 허공으로 떠올랐다.
“뭘 하려는 거지?”
용사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마왕은 용사의 물음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단지, 셋으로 나뉜 검을 향해 작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전송. 내 수하들에게.”
그의 말과 함께 셋으로 나뉜 검의 파편이 마왕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용사는 어떻게 된 일인지 몰랐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마왕이 마물 왕들의 머리에 검의 파편을 박아넣었다는 것을.
검이 사라지는 순간, 내 시야도 어두워졌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어리둥절했지만, 나는 곧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검의 기억이 끝난 것이다.
신기하게도 검의 주인인 마왕의 가장 강렬한 기억이 아니라, 검이 파괴된 그 순간을 보게 된 것이었다.
봉인의 마지막까지 보지 못하게 되어 아쉬웠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시 시야가 환해졌다.
대공녀의 응접실과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보고 있는 대공녀가 보였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이었다.
“방금 뭔가 이상했어요. 괜찮은 거죠?”
“네. 괜찮습니다.”
대공녀는 내가 멍해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란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어 그녀를 안심시키고, 방금 본 기억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사실, 검의 기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마왕이 봉인되었을 때를 보게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거기다, 봉인되는 순간에 마왕 앞에 서 있던 이도 예상치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 왕국의 초대 왕인 카를로스도 아니고, 차르 제국의 초대 황제도 아니었다.
그는 기억에서 보았었던, 내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용사였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 용사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
살아 있는 용사들만 역사에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왕이 봉인되는 곳에 같이 있던 용사였다.
카를로스 용사와 제국의 초대 황제인 빌헬름과도 친해 보였는데.
제국 도서관에도 왕국의 자료에도 그에 관한 내용은 남아 있지 않았다.
역시,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봉인 자체가 그의 능력과 연관된 것이라니.
‘그에 대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봉인되었는지도 알 수 있으려나?’
그런 생각으로 이어지게 되니, 기억이 빨리 끝난 것이 무척이나 아쉬워졌다.
좀 더 봉인에 대해, 용사의 능력에 대해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찌 되었건 마왕을 봉인시킨 능력이었다. 지금 막막한 나에게 도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나눈 대화.
뭔지 모르겠지만, 뭔가 걸리는 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이유에서 그렇게 느껴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시간을 들여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정리하고, 정신을 차리니, 대공녀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이런, 대공녀를 앞에 두고 딴짓을 하다니.
나는 바로 대공녀에게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잠깐 딴생각을 하느라…….”
“괜찮아요. 더 살펴보셔도 돼요.”
내 사과에 대공녀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고개를 젓는 대공녀의 얼굴은 피곤이 가득해 보였다.
아무래도 빨리 그녀를 쉬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검의 기억을 보게 된 덕분에 아직 하지 못한 검의 확인을 시작했다.
나는 바로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검의 겉모습은 완전하게 고쳐졌지만, 온전한 유물이라는 것은 외부가 멀쩡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마나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원래의 능력을 쓸 수 있어야만 유물이 제대로 고쳐진 것이었다.
더구나, 이 검은 파편 상태로도 세 마물 왕에게 수백 년간 엄청난 힘을 주었던 유물이었다.
사실, 성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때는 그게 의문이었다.
마왕의 검이라고 하지만, 파편이 되어서도 어떻게 그런 힘을 줄 수 있었는지 이해가 안 갔었다.
지금이야, 성물이라서 그랬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나는 검에 조심스럽게 마나를 밀어 넣어 검의 성능을 확인했다.
마나를 밀어 넣어도, 이 성물이 어느 신의 성물인지 알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파편 상태의 대단한 능력의 원래 모습은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검으로 계속 마나를 밀어 넣으니, 검에 빛이 흐르기 시작했다.
검이 작게 떨리고, 검날에 광채가 흐르기 시작했다.
어라? 어디가 잘못된 건가?
마왕의 기억에서 봤을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 검으로 대단한 공격을 하긴 했지만, 분명 검 자체는 별다를 게 없었는데…….
하지만, 지금 내가 쥐고 있는 검은 아름다운 광채 때문에 신이 내린 검처럼 보였다.
성물이니까, 신의 내린 검이 맞긴 했다. 신이 진짜 있다면.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이런 아름다운 광채가 아니었다.
이 검의 능력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검에 마나를 불어넣은 것만으로 다른 유물처럼 검의 능력이 떠오르지 않았다.
‘밖으로 가져나가서 성벽이라도 베어봐야 하나…….’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는데, 문득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대공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하녀가 들어온 걸까?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분명 방안에는 대공녀의 인기척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그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목소리는 발레아의 능력처럼, 에고들의 음성같이 머릿속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전쟁 신의 검. 검의 정령이에요. 반가워요. 새로운 용사님.]
그 목소리의 주인은 내 손에 들린 검이었다.
다른 에고들과 달리, 진짜 인간과 구별이 안 되는 목소리였지만, 분명 검이 말한 것이었다.
“검의 에고?”
[에고라니요! 정령이랍니다.]
내 말에 검의 에고, 아니 정령이 버럭 화를 냈다.
나는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나만 들리는 거였지.
사람 목소리와 다르지 않아, 계속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정령의 외침이 문제가 아니었다.
정령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이미 검의 광채가 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눈부시진 않았지만, 방안에는 신성한 빛이 가득 머물고 있었다.
다행히 대공녀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푹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