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0화
제5편 마왕의 검 (2)
검의 파편을 수리해 달라는 말에, 대공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왕의 검이라니……. 이런 걸 가져와서 수리하라고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네요. 설마 마왕이 봉인을 풀고 나오기라도 하나요?”
나는 대공녀의 푸념 섞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며칠 전에 봉인지에 있는 마왕이 봉인된 유적을 확인했습니다. 봉인이 깨지기 직전이었습니다.”
내 말에 대공녀가 입을 크게 벌렸다.
황당한 표정.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대공녀가 더듬거리며 다시 물었다.
“농,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정말인가요?”
“네. 사실입니다. 한두 달 안에 봉인이 깨질 겁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회귀 전 봉인지에서 마물이 쏟아져 나왔던 때가 그때쯤으로 알고 있었다.
이번 삶에서 마물 왕을 죽이는 등, 전과 다른 일을 꽤 많이 해놓았지만, 그리 달라지지는 않을 터였다.
내 말에 대공녀는 급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아버지께 말씀드려야 하잖아요.”
“이 검을 맡기고 공왕을 뵐 생각입니다.”
이왕 공국에 왔는데, 마왕에 대해 알리지 않고 그냥 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게 공국에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공왕께서 제 말을 믿어 주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아…….”
내 말에 대공녀는 신음을 내뱉었다.
나에 대해 잘 알고, 나와 같이 다녔던 대공녀도 내 말에 깜짝 놀랐었다.
대공녀도 그런데, 공국왕이나 다른 사람들은 내 말을 믿기는 어려울 터였다.
내 말을 어느 정도 믿어 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공국의 기사단과 군에 비상을 걸고, 주위의 소식을 확인해 볼 테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대비가 될 리가 없었다.
그래도, 대공녀를 봐서라도 말을 안 해 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이곳에 남아 공국을 같이 지켜줄 수도 없고…….
결국, 내가 대공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내 소유였던 지팡이 성물을 그녀에게 주는 것.
그녀를 위한 안전장치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그럼 서둘러야겠네요. 나는 바로 이 검을 수리할 테니, 아버지를 만나고 오세요. 그때까지 끝내놓을게요.”
마왕이 쓰던 대단한 검인 데다가, 박살 나서 세 개로 분리된 유물이었지만, 대공녀는 자신이 있어 보였다.
그동안, 그녀도 실력을 쌓은 듯했다.
대공녀는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집사를 불러 공국왕을 접견할 수 있는지 알아 오게 했다.
대공녀가 직접 부탁을 해서인지, 나는 바로 공국왕을 만날 수 있었다.
전에 공국왕을 만났던 그 접견실에서 공국왕을 다시 만났다.
처음 이 접견실에서 공국왕을 봤을 때, 왕이 보여준 기백과 카리스마는 무척 놀라웠었다.
카를로스 왕국의 왕이나 두 왕자에 비해 훨씬 더 왕다웠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공국왕은 그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내 시간은 많이 지나갔지만, 처음 공국왕을 만났을 때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았는데…….
그때와 달리, 공국왕에게서는 기백도 카리스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들에게 실권을 넘겨줘서인지, 아니면 카를로스 왕국의 왕이 되는 것을 포기해서인지, 그의 눈에서 더는 야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공국왕이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지만, 상관이 없었다.
나는 그저 마왕이 부활할 거라는 것을 알려 줄 뿐.
하지만, 공국왕은 내 생각과 다른 듯했다.
“샤를 백작이 아닌가. 어서 오게. 프리다가 계속 기다리던데, 좀 더 자주 오지 않고. 그래도 제일 먼저 프리다를 찾은 것을 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공국왕이 제일 먼저 한 말은 나와 대공녀에 대한 말이었다.
그녀와 나 사이를 오해한 것인지, 아니면 일부로 꺼낸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말에 나는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만, 이번에 공국을 방문한 것은 일이 있어서입니다.”
내 말에 공국왕의 눈썹이 찌푸렸다. 내 말에 공국왕이 기분이 나빠진 모양이었다.
나는 공국왕이 화를 내기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
“한두 달 안에 마왕이 부활할 겁니다. 봉인지에 있는 봉인 유적도 확인했습니다. 원하신다면 제국에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물론, 아직 제국에는 알리지 않았지만, 공국왕이 확인하기 전에 제국에도 알릴 생각이었다.
2 황자와는 계약이 되어 있었고, 이제껏 예언을 들어왔던 조직도 내 소식을 외면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저는 제국의 요청으로 봉인된 마왕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마왕이 봉인된 장소를 찾게 되어 마왕이 봉인을 풀 시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제국에 전해주기 전에 공국과 대공녀에게 알리기 위해 공국에 들린 것입니다.”
사실, 제국, 아니 조직의 요청을 받은 것은 저번 삶에서였다.
마왕이 언제 봉인을 풀게 되는지 알게 된 것도 저번 삶에서 내가 직접 듣고 보았었고.
공국에 온 것도 마왕의 검을 복구하기 위해서였고.
그렇게 내 말의 대부분은 거짓말이었지만, 그래도 그 안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봉인지에 있는 탑에 대해 공국왕에게 설명해주었고, 내 이야기를 들은 공국왕은 나를 노려보았다.
아직도 전 같은 카리스마나 기백은 보이지 않았지만, 공국왕을 처음 봤을 때처럼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이런 황당한 말로 내 말을 피해 가려는 것은 아닐 테고……. 뭔가 다른 이득을 위해 꺼낸 거짓말로 보기에도 너무 황당한 말인데…….”
확실히, 너무 엉뚱한 말이긴 했다.
공국왕은 옥좌를 두들기며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거지? 제국이나 카를로스 왕국에 합병이라도 하라는 건가?”
공국왕의 반쯤 비웃는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공국은 그 방법밖에 없을지도 몰랐다.
그것도 그리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사실, 대안은 없었다. 그리고, 어떻게 할지는 공국이 결정할 일이었다.
“저는 단지 공녀님과의 인연 때문에 왕께 말씀드리는 것일 뿐입니다.”
내 말에 공국왕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렇게 말하니, 마냥 무시하기도 어렵겠군. 제국으로 간다고 했으니, 붙잡아 두고 확인할 수도 없고.”
다행이었다.
제국 이야기를 안 꺼냈으면, 공국왕이 나를 붙잡아 두었을지도 몰랐다.
잡혀 있을 생각은 없었지만, 일이 무척이나 귀찮아졌을 터였다.
“그럼, 저는 아직 공녀님과의 약속이 있어서…….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공국왕은 잠시 고민하더니, 나를 내보냈다.
접견실을 나오자, 안에서 공국왕의 고함이 들려왔다.
“왕세자를 불러! 기사단장도 부르고!”
처음 공국왕을 보았을 때 들었던, 카리스마 넘치는 그때의 음성이었다.
아무래도 그때의 공국왕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나는 공국왕에게 붙잡힐까 봐 최대한 빨리 대공녀의 방으로 돌아왔다.
하녀가 연 문으로 응접실을 들어가자, 눈앞에 검이 놓인 탁자가 보였다.
기억에서 보았던 바로 그 검.
세 개의 파편으로 나뉘었던 마왕의 검이었다.
대공녀가 검을 고친 것이었다.
고쳐진 검 뒤로 소파에 반쯤 누운 대공녀가 보였다.
지치고 힘든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녀는 억지로 버티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금도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검을 보며, 나는 대공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내 말에 프리다는 나를 째려보았다.
“잘못했으면 고치지 못할 뻔했어요. 이 검은 평범한 유물이 아니었어요!”
대공녀의 말에 나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마왕의 검이니 당연히 평범한 유물일 리가 없었다.
더구나, 그건 내가 미리 말해줬었고.
그런데, 평범한 유물이 아니라니?
다행히 대공녀는 내 의문을 바로 풀어주었다.
“이 검은 성물이에요. 평범한 마왕의 검인 줄 알고 능력을 썼다가, 큰일 날 뻔했어요.”
“성물이라고요?”
이번에는 내가 놀랄 차례였다.
마왕의 검이 성물?
성물이라면 분명 제국이 만든 유물이 아닌 신에서 받았다고 전해지는 신, 종교의 유물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 성물을 마왕이 가지고 있었다고?
더구나, 그 성물이 파편이 되어 마물들에게 힘을 주었다고?
신과 성물에 대한 상식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녀 이상으로 나도 놀랐지만, 우선 그녀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위험하게 만들었군요.”
“……백작님의 잘못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다 해결되었으니 문제는 없었고요.”
감사하게도 대공녀는 내 사과를 받아주었다.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되셨나요? 아버지, 왕께서는 뭐라고 하셨죠?”
“다행히 어느 정도는 믿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나름의 조치는 취하실 것 같습니다.”
대공녀는 내 말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내 얼굴을 보고 난 뒤에 바로 어두워졌다.
“그걸로는 소용없는 건가요?”
또 들킨 건가.
나름대로 연기를 잘한다고 항상 생각해왔는데, 역시 친한 사람들에게는 안 먹히는 모양이었다.
“지금이야 알 수 없죠. 하지만, 보통 준비로는 어려울 겁니다.”
사실, 어려운 정도가 아닐 터였다.
마물들을 통솔하는 마물 왕을 죽여놓았지만, 그것만으로 공국이 버텨 낼 리가 없었다.
내 말에 대공녀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백작님이 이 이상 도움을 주시기는 어렵겠죠.”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닌 포기한 듯한 음성.
나는 탁자 구석으로 밀려난 나무 지팡이를 가리켰다.
“체력을 회복하면 제가 선물한 지팡이를 제일 먼저 수리한 뒤에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마세요.”
“네? 떼어놓지 말라고요?”
내 말에 공녀가 몸을 일으켰다.
공녀의 얼굴이 빨갛게 변해버렸다.
이게 몸을 가누기도 어려운 그녀가 바로 몸을 일으킬 정도의 말이었나?
아무래도 오해를 살 만한 말을 또 해버린 것 같았다.
나는 다시 그녀에게 설명했다.
“제 소환 능력이 강화되었습니다. 제 소유였던 물건으로 제가 이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위험해지게 되면 바로 달려오겠습니다.”
지팡이의 방어막이라면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 그동안 소식을 듣고 달려올 수 있을 터였다.
공국 상황은 가끔 들려서 확인하면 될 테고.
내 말에 대공녀가 바로 지팡이를 손에 쥐었다.
“네. 마나가 차면 바로 고칠게요!”
그녀는 나를 보며 굳게 다짐했다.
분명 이번에는 제대로 설명한 것 같은데, 대공녀의 표정은 조금 전과 다르지 않았다.
붉은 얼굴도 그대로였고.
왜 그러는지 잘 이해가 안 되었지만, 내 말을 잘 따라주겠다고 하니, 더 할 말이 없었다.
대공녀에게 지팡이에 관해 설명했으니, 이제는 검을 확인해 볼 차례였다.
마왕의 기억에서 봤을 때와 똑같은 검.
아니, 수리가 되어서인지 검은 더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지금 보니, 성물이라고 말한 게 이해가 될 정도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검을 집어 들었다.
검을 손에 쥐고, 조심스럽게 마나를 불어넣었다.
과연 고쳐진 검은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
기대감에 찬 채로 검을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다시 검의 기억을 보게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세상이 밝아지기를 기다렸다.
잠시 뒤, 세상에 밝아졌다.
예상했던 대로 나는 다시 마왕에 빙의해 있었다.
하지만,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예상치 못했던 사람이었다.
전에 다른 유물의 기억을 봤을 때 보았던 용사.
양옆에 카를로스의 초대 왕과 차르 제국의 초대 황제를 대동하고 있던 용사,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용사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