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9화
제4편 마왕의 검 (1)
아쉽게도 옥상에 있던 죽은 마물들은 언데드로 만들 수 없었다.
안개가 사라져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옥상 바닥에 부패 독이 남아 있었다.
옥상에 있던 모든 마물들은 잠깐 사이에 모두 썩어버렸다.
마지막 이 종족, 아니 마물 왕도 마찬가지였다.
마왕의 검 파편을 머릿속에 넣어두었던 다른 마물 왕과 달리, 오래된 나무를 닮은 마물은 썩어버린 나무처럼 부스러졌다.
결국, 나는 하늘을 나는 언데드를 타고 탑에서 벗어난 뒤, ‘전송’을 통해 영지로 돌아왔다.
영지는 좋게 말하면 활기차고, 나쁘게 말하자면 소란스러웠다.
발레아가 거대한 지하 공간을 만들어 놓았지만, 지하 도시가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살 수 있게 그 지하 공간을 바꾸는 것은 사람의 손이 필요했다.
시간이 부족하니, 많은 사람이 필요했고, 그 사람들은 내가 소환해 놓은 황실 금고에서 꺼낸 금은보화를 써서 우리 영지와 주변 영지에서 끌어모았다.
덕분에 도시는 유입된 사람들로 무척이나 혼잡했다.
거기다, 주변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영지에 와 있던 벤자민이 돌아온 내게 한 무더기 서류를 안겨주며 주변 귀족들의 분위기를 이야기해 주었다.
“예상대로 주변 영지에서 항의가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벤자민의 말에 오헨 기사가 눈썹을 찡그렸다.
아니면, 내가 벤자민에게 받은 서류를 그에게 바로 넘겨줬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벤자민은 내가 서류를 오헨 기사에게 전부 떠넘긴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왕실에도 항의가 들어가는 모양입니다. 여왕님이 막아 주고 계신 것 같지만, 다른 귀족들이 그 항의에 점점 많이 가담하는 것 같습니다.”
이어진 벤자민의 한숨 섞인 말에 내가 반문했다.
“영지전을 하려는 영주는 없겠죠?”
내 말에 벤자민이 고개를 내저었다.
“있을 리가 없죠. 주변 영지가 항의하는 이유도 우리 영지가 주변 영지에 영지전을 걸까 봐 항의하는 건데요.”
오헨 기사도 자신 있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영지 주변, 백작님까지 싸우신다면, 왕국 북부에서 우리 영지와 싸울 수 있는 영지는 없습니다. 공국이 우리 영지와 싸우겠다면 모를까.”
사실, 공격이 아니라 방어라면, 공국이나, 왕국 전체가 달려들어도 버틸 수 있었다.
방어의 신인 발레아가 있기 때문이었다.
저번 삶에서 마지막까지 버텨서 영지에 마왕이 오게 한 것은 발레아의 덕이 컸다.
“다만, 수도에서 소환령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여왕님도 공작님도 귀족들의 말을 막을 수 있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요.”
이어진 벤자민의 걱정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소환령이 떨어지기 전에 일이 벌어질 테니까요.”
이번에 탑을 방문해서 알게 되었다.
봉인되었던 마왕은 외부의 도움 없이 봉인을 풀고 빠져나온 것이다.
탑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파악이 안 되는데, 봉인을 강화하고, 망가진 봉인을 수리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결국, 지금은 마왕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마물들이 봉인지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도 막을 수 없었다.
마물을 지휘하는 마물 왕을 죽였으니, 전보다 싸움은 쉬워지겠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물 일부와 마물 왕 셋이 봉인지 밖으로 나온 것으로, 제국 동부가 쑥밭이 되었다.
이번에는 마물 전체와 마왕이 봉인지 밖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내가 마물 왕을 지휘하는 마물 왕을 죽인 것은 단지, 인간이 멸망되지 않을 가능성을 아주 조금 올렸을 뿐이었다.
결국, 마왕을 처리해야 했다.
그건 내 유물 주머니에 들어있는 파편들.
마왕의 검 파편에 달려 있었다.
나는 영지의 상황을 확인하고, 바로 움직였다.
출발하기 전 나는 저택 테라스에서 발레아와 인사를 나누었다.
“다녀올게요. 영지를 부탁해요.”
이번에는 혼자 다녀오기로 했다.
봉인지를 가는 것도 아니었고, 공국에 다녀올 뿐이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소환’이나 ‘전송’도 있으니, 같이 갈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영지에는 발레아가 필요했다.
이제 마무리 중인 지하 도시도 발레아가 움직이면 훨씬 빨리 완성될 터였다.
더구나, 내 수하들이나 우리 영지민들은 나보다 발레아를 더 따랐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본모습을 보이지 않고, 항상 친절하게 대하는 발레아였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신뢰하면서도 어려워하고, 조금은 무서워했다.
덕분에 발레아만 영지에 있으면 영지는 걱정 없었다.
나는 발레아에게 인사를 하고, 2층 테라스에서 뛰어내렸다.
동시에 손을 아래로 뻗어 내 소유물을 ‘소환’했다.
“소환 사룡.”
떨어지는 내 몸 아래에 하늘을 나는 언데드 마물이 소환했다.
탑을 떠날 때, 언데드로 만들었던 마물이었다.
탑을 벗어난 뒤, 이 언데드들은 황궁 터 지하 도시에 보내 두었었다.
원래 지하 도시에 있는 언데드들과 달리, 오래 움직이지 못하는 언데드였지만, 짧게 쓰기에는 이 언데드만 한 게 없었다.
하늘을 나는 것만큼 빠르고 유용한 것은 없었다.
사실 용이라기보다는 피막 달린 도마뱀에 가까운 마물이었지만, 언데드는 나를 태우고,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목적지는 공녀가 있는 공국.
사룡은 공국이 있는 북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 * *
발레아는 테라스에 서서 점점 작아지는 알렉스를 계속 지켜보았다.
알렉스가 점점 작아지자, 세상이 점점 회색으로 돌아갔다.
다른 색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발레아는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알렉스가 없는 세상은 단조로운 회색빛 세상일 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발레아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을.
태어났을 때부터 아버지의 도구로 사람들을 죽이며 자라왔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정상이 아닌 아버지의 피를 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둘 다일 수도.
어찌 되었건, 그녀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항상 회색빛이었다.
그녀 주변의 물건이나 식물이나 동물, 마물이나 인간도 모두 회색빛으로 보일 뿐이었다.
모두 다르지 않았다.
발레아는 그들을 왜 구별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길가의 꽃보다 왜 인간을 중요시해야 하는지,
왜 인간을 죽이는 마물을 죽여야 하고 동물을 먹는 인간은 보호해야 하는지.
다른 인간의 감정에는 왜 공감해 주어야 하는지도 이해가 안 되었다,
주변의 사물 모두를 장악해버리는 그녀의 능력, ‘영역’이 이렇게 강해진 것도 사실, 그녀의 이런 정신 상태 때문일지도 몰랐다.
다만, 발레아는 자신이 남과 다른 것을 알고 있었고, 무척이나 똑똑했다.
자신이 다른 것을 다른 사람에게 숨길 만큼.
덕분에 아카데미에서나 수도에서는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영애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발레아 자신이 살아남으려는 방편일 뿐이었다.
그녀에게는 아카데미와 수도에서도 세상은 오직 회색빛이었다.
그런 발레아에게 알렉스는 회색빛 세상 속에 홀로 빛나는 존재였다.
아버지가 죽고, 그를 아버지 대신 자신을 이끌어 줄 존재로 결정한 순간부터, 알렉스는 회색빛 세상 속에 홀로 빛났다.
그리고, 그가 보여 주는 색과 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렬해지고 아름다워졌다.
그리고, 그 빛은 결국 발레아를 선택해주었다.
거기다, 자신이 숨기고 있던 비밀을 발레아에게만 알려 주었다.
이건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 누구도 발레아에게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알렉스의 능력이 아니더라도, 발레아는 자신이 온전히 그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알렉스를 홀로 보내 준 것은 발레아가 이곳에 남아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지하 도시를 완성해야 했다.
영지민들을 대피시키기 위한 시설들을 완성 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발레아는 그녀의 영역으로서의 도시를 완성 시킬 생각이었다.
발레아는 알렉스의 비밀, 회귀를 듣고,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모두 알렉스가 소중히 생각하는 영지민이었지만, 어차피 알렉스가 죽게 되면 없어지게 될 터였다.
마왕에게 죽지 않더라도, 알렉스가 회귀하면, 없어질 존재들.
그들은 자신이 알렉스의 것인 것처럼 영주인 알렉스의 것이었다.
그리고, 대륙의 어떤 영주보다 너그러운 영주인 알렉스였기에, 그들이 알렉스를 돕게 하는 것은 부인인 그녀의 몫이었다.
당연히 지하 도시는 알렉스를 위한 것이었고, 그를 위한 ‘영역’이었다.
그녀의 영역, ‘지하 도시’를 완성하게 되면, 도시에 들어온 영지민들은 자신도 모르게 영주인 알렉스를 도와주게 될 것이었다.
발레아의 영역을 통해, 그들의 작디작은 마나와 생명력을 알렉스에게 건네주게 될 것이다.
모두 홀로 빛나는 알렉스를 위해.
발레아는 미소를 띤 채로, 지하 도시로 내려갔다.
* * *
날개가 멀쩡한 놈으로 골라서인지, 죽은 용, ‘사룡’이라 이름을 지어 준 언데드는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공국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보게 된 공국이었지만, 하늘에서 본 공국은 마치 어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오랜만에 본 것이 아니었다.
흘러간 시간으로 따지면 얼마 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공국에 왔을 때는 예언가에게 이야기를 들은 제국과 조직의 기사들이 내 영지로 쳐들어오기 위해 공국을 찾았을 때였다.
그때, 제국군은 공국에게 길을 비켜달라고 했었다.
그리고, 나와 언데드에게 쓸려나갔었지.
물론, 그 일들은 이제 없었던 일이 되어버렸다.
그때 일을 기억하는 사람도 나밖에 없었다.
결국, 다른 사람들은 제국 사절단이 돌아왔을 때를 내 마지막 방문으로 기억하고 있었을 터였다.
나는 왕국 성문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언데드 마물은 공국 북쪽으로 날아가게 했다.
북쪽 성벽 밖의 울창한 숲은 언데드를 숨기기에 딱 좋았다.
쿵.
내가 성문 앞에 내려서자, 기사들이 놀라 검을 뽑아 들었다.
“누구냐!”
“감히! 왕궁 앞에서 난동이라니!”
다행히 둘 다 아는 기사들이었다.
나는 소리치는 기사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입니다.”
내 말에 두 기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알렉스……. 아니, 샤를 자작!”
“이제 자작이 아니잖아! 샤를 백작님!”
“아, 맞다. 백작님이 되셨지.”
둘 다 예전에 함께 싸웠던 기사들이었다.
둘 다 내 작위 때문에 조금 어색해했지만, 반가운 얼굴은 그대로였다.
나도 그들과 회포를 나누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먼저 할 일이 있었다.
“공녀님께 연락드려주시겠습니까? 샤를 백작이 찾아왔다고.”
“아, 넵. 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기사의 말에 병사 한 명이 본성으로 달려갔다.
허가는 바로 떨어졌다.
허겁지겁 달려온 집사가 나를 공녀의 방으로 안내했다.
응접실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공녀가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오랜만이에요.”
그녀의 말과는 다른 뜻이겠지만, 정말 오랜만이었다.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인지,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하던데……. 저야 일없이 방문하는 것이 좋지만, 이번에도 일이 있는 거죠?”
오랜만이었지만, 공녀는 그대로였다.
그녀의 조용한 말투도, 편안한 분위기도.
나도 오랜만에 그녀와 담소를 나누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일이 먼저였다.
나는 가슴에 손을 넣어 유물 몇 개를 꺼냈다.
검의 파편 세 개와 살아 있는 것 같은 나무 지팡이였다.
“한쪽은 의뢰고, 다른 하나는 선물입니다.”
내 말에 공녀는 황당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둘 다 보통 물건이 아닌 것 같은데……. 더구나 이 검은 완전히 부서졌잖아요.”
멀쩡했으면 여기로 가져올 리가 없었다.
공녀는 나를 노려보더니,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이번에도 내력도 모르는 물건은 아니겠죠?”
그녀의 말에 나는 먼저 선물이라고 말한 지팡이를 가리켰다.
“신의 성물입니다. 보호막 쪽 능력이 있는 유물입니다. 공녀님이 쓰시면 좋을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나는 공녀가 그 지팡이를 잘 사용하는 것을 이미 보았었다.
사라진 세상에서 그녀는 그 지팡이로 성벽 전체에 방어막을 쳐서 언데드들을 막아 냈었다.
내 말에 공녀는 화들짝 놀랐다.
“성물을 선물로 가져왔다고요?”
곧이어 공녀의 뺨이 붉어졌다.
설마 오해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
분위기가 이상해질까 봐 나는 바로 나머지 물건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리고, 이 검은 마왕의 검입니다.”
“네?”
붉어졌던 공녀의 얼굴이 바로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니, 조금 창백해졌나?
아무튼 효과 만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