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6화
제1편 호수의 탑
열린 문 안쪽, 탑 내부는 어두웠다.
발레아가 문 안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영역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아요.”
탑은 내 감각도, 마나 감응력도 방해하지 않았다.
발레아와 나는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고개를 숙이고, 문 안으로 들어가자, 등 뒤에서 작은 문이 닫혔다.
“영역을 해지할게요.”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뒤에 발레아는 수중 통로를 없애 버렸다.
문의 방수는 잘되어 있었다.
닫힌 문을 통해 한 방울의 물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어서 발레아가 지팡이 위로 불을 피워올렸다.
영역을 이용해서 허공에 불을 피운 것이었다.
평범한 영역 활용이었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마법과 다르지 않았다.
어쨌거나, 빛으로 통로가 밝혀졌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구에서의 전생을 기억하고 있어서인지, 나는 관리자용 시설이라고 하면 보일러에서 스팀이 뿜어져 나오고, 파이프가 가득한 그런 공간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 통로는 평범한 석조 건물의 통로처럼 보였다.
이음새가 정교하고, 마감이 잘된 석조 건물의 복도였다.
이 복도는 지금 지어지는 건물들과도 닮은 곳이 없고, 고대 제국의 유적들과도 달랐다.
차라리 전생의 대리석 마감을 한 복도와 비슷해 보였다.
그만큼 이 복도는 특색도 없고, 화려한 장식도 없이 깔끔하고 단조로웠다.
정면으로 쭉 이어진 통로.
나는 벽을 두들겨보았다.
턱. 턱.
돌처럼 보였지만, 질감도 소리도 낯설었다.
나는 벽을 향해 대검을 힘껏 휘둘러보았다.
깡!
불꽃이 흩날리며, 대검이 튕겨 나왔다.
힘만이 아니라 마나까지 밀어 넣었지만, 내 검은 벽을 가르지 못했다.
철로 만든 두꺼운 성문도 반으로 갈라 버릴 공격이었는데, 벽에는 작은 흠집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도 유물인가…….”
내 대검처럼 일종의 파괴 불가 능력이 부여된 것 같았다.
설마, 이 탑 전체에 이런 능력이 부여된 걸까?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마왕을 가둬 두기에는 안성맞춤이네.”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곳이라면 마왕이 탈출할 수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 마왕이 여길 빠져나가지 못한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
기억 속에서 본 마왕도, 직접 싸워 본 마왕도 이런 단순한 시설에 갇힐 괴물이 아니었다.
평범하게 가둔 게 아니라, 뭔가 더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가진 에고 구슬은 이 탑에 대해 더 알지 못했다.
단지, 이 통로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 뿐이었다.
[이 통로는 중앙 제어 시설로 이어집니다.]
그래도, 운이 좋았다.
아무래도 우리는 관리자 통로라 부르는 탑의 중심으로 향하는 뒷문을 연 것 같았다.
발레아와 나는 단조로운 통로를 계속 걸어갔다.
거대한 탑만큼, 통로도 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자, 우리 앞을 문이 막아섰다.
문에 처음 보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지만, 이 문도 평범한 문이었다.
발레아는 문에 손을 대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 문 안쪽으로는 영역을 펼치기가 힘들어요.”
나도 마찬가지였다.
문 안쪽으로는 감각을 펼치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문 안쪽에는 거대한 마나가 모여 있었다.
생명체의 마나와 달리, 안정된 마나였지만, 그 거대함은 내가 살아오면서 몇 번 보지 못한 크기였다.
그 강대함에 내 감각도 발레아의 영역도 문 안을 살필 수 없었다.
[이 안이 이 시설의 중앙 제어실입니다.]
에고 구슬의 말을 들으니, 문 안의 강대한 마나가 이해가 되었다.
“이 문도 열리려나.”
나는 에고 구슬을 문에 가져다 댔다.
쿵.
스르르르.
내 걱정이 무색하게 문은 쉽게 열렸다.
나는 바로 들어가지 않고, 안을 확인했다.
문 안쪽은 텅 빈 커다란 방이었다.
가득 찬 마나가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지만, 마나를 시야에서 지워 버리면, 그냥 텅 빈 방일 뿐이었다.
텅 빈 커다란 석실.
그 중앙에는 제단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고, 제단 위에는 커다란 검은 구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눈앞의 광경에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 석실을 어디서 본 것 같았다.
아, 생각났다.
이 석실은 에고 구슬을 얻었던 유적의 석실과 꼭 닮아 있었다.
물론, 그 유적의 석실은 넓이도 다르고, 놓여 있는 구슬의 크기도 달랐고, 이 정도로 깔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석실도 텅 비어 있었고, 제단에 검은 에고 구슬만 놓여 있었다.
내 생각을 에고 구슬에게 말하자, 구슬은 당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슷한 게 당연합니다. 용사 관리 체계의 예비 에고와 보조 시설들은 모두 이 중앙 시설을 흉내 내서 만들어졌습니다.]
이 시설이 그때 본 유적과 비슷한 게 아니라, 그 반대인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비슷한 방이라면 위험할 일도 없을 터였다.
나는 발레아와 함께 열린 문을 지나 석실로 들어섰다.
우리가 안에 들어가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황량한 석실 안에 강대한 마나가 뭉쳐 있을 뿐.
그 마나는 중앙의 검은 구슬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나는 제단에 놓인 구슬을 향해 다가갔다.
“조심하세요.”
발레아의 말에 손을 흔들어 주고, 구슬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제단에 놓인 구슬은 무척 컸다.
내가 가진 에고 구슬은 호두 크기였는데, 이 구슬은 사과만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구슬에 손을 올렸다.
손을 올리는 순간, 내 머리에 음성이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현재 이 시설은 폐쇄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요청 사항은 들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무척이나 기계적인 음성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이 탑의 에고 구슬도 아직 살아 있었다.
대답이 가능하다면, 물을 것이 많았다.
나는 이 시설의 에고에게 제일 먼저 ‘시설 폐쇄’에 관해 물어보았다.
“폐쇄되었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입니다. 현재 이 탑은 외부와 연결을 끊고, 대부분 기능을 멈추었습니다.]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전에 에고 구슬을 얻었을 때 에고 구슬이 중앙 에고와 왜 연락이 안 되었는지는 알게 되었다.
어쨌거나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했기에 나는 다른 것을 물었다.
“누가 이 탑을 폐쇄한 거지?”
[관리자 등급의 사용자가 지시했습니다.]
관리자 등급?
분명, 나도 관리자 등급이잖아.
물론, 예비 에고의 관리자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물어볼 만했다.
“나도 관리자 등급인데, 내가 폐쇄를 풀 수는 없나?”
[예비 에고가 관리자로 지정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본 에고도 예비 에고의 결정을 받아들입니다.]
에고 구슬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이게 된다고?
[폐쇄를 멈추시겠습니까?]
정말, 가능했다.
나도 이 시설을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럼, 바로 폐쇄를……. 아니 잠깐.”
나는 바로 승낙하려다가, 말을 멈추었다.
전생에 보았던 괴물 영화가 떠올랐다.
폐쇄된 시설을 가동하니, 문이 열려 괴물이 뛰쳐나오는 영화였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었다.
매번 꼬이는 인생이었다. 분명 뭔가 함정이 있을 터였다.
“폐쇄를 멈추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정지되었던 외부와의 연결이 활성화됩니다. 다른 시설들과 연락이 되고, 탑의 기능도 모두 정상 가동됩니다. 층간의 이동도 자유로워지고, 내부 통제도 가능해집니다.]
다른 유적들도 찾을 수 있고, 탑을 오르는 것도 쉬워진다는 건가?
하지만, 내부 통제가 가능해지다니…….
무척이나 불길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어찌 되었건 전부 좋은 이야기였다.
이 정도면 폐쇄를 멈춰도 될 것 같았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물어보았다.
“그 관리자는 왜 이 시설을 폐쇄한 거지?”
에고는 모를 가능성이 컸지만, 확인은 해 볼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에고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 시설의 마나를 다른 곳에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현재도 이 시설의 마나는 최소한을 제외하고 모두 다른 곳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른 곳?”
[시설의 최상층에 시설의 마나를 이용한 능력이 펼쳐져 있습니다. 당시 관리자는 이 능력을 ‘봉인’으로 불렀습니다.]
‘하. 하. 하.’
나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역시나였다.
폐쇄를 멈췄다면 큰일이 날 뻔한 것이다.
이제야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 관리자라는 이는 이 탑의 마나를 끌어모아 마왕의 봉인을 유지해 온 것이었다.
마왕을 봉인할 정도의 마나라니. 도대체 이 탑은 얼마나 많은 마나를 가지고 있었던 걸까.
지금 이 석실 안에 모여 있는 마나도 엄청난데, 이게 남겨진 마나라는 소리였다.
도대체 이 탑은 어떤 탑이길래.
분명, 평범한(?) 용사 연구소는 아니었다.
나는 탑의 정체가 더 궁금해졌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에고 구슬은 말을 이었다.
[본 에고도 폐쇄를 멈추는 것을 추천합니다. 현재 시설의 마나가 무의미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봉인으로 불리는 능력은 효력을 잃고 있습니다. 그 능력은 얼마 뒤에 소멸합니다.]
에고 구슬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곧 마왕이 봉인을 깨고 밖으로 나온다는 것을.
그렇다고, 에고가 말하는 것처럼 미리 봉인을 풀어 줄 생각은 없었다.
마왕이 봉인을 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무래도 처음 계획대로 해야겠어.”
“그럼, 다시 나가야겠네요.”
발레아와 나는 석실을 빠져나왔다.
우리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 탑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처음 생각대로 발레아가 만든 공기 방울을 타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팡!
공기 방울이 터지고, 우리는 섬에 올라섰다.
바위만 가득한 섬과 그 태반을 차지하고 있는 탑.
하지만 탑의 본모습을 봤기에, 내 눈에는 바위 섬이 가증스럽게만 보일 뿐이었다.
정면의 작은 평지를 제외하고 섬을 가득 채우고 있는 탑에는 커다란 문이 있었다.
마치, 이 탑의 정문처럼 보이는 커다란 문이었다.
사실 정문이기도 했고.
하지만, 문은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는지 이끼로 가득 덮여 있었다.
탑이 폐쇄되었으니, 열리지 않는 게 당연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발레아도 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탑 안으로 들어가려면, 좀 전에 나왔던 수중 문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나는 저 문으로 들어갈 생각도 없었다.
저 문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물 밖으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원래 목적인 마왕이 이 탑에 있는 것은 조금 전에 확인했다.
어떤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관리자라는 이는 탑의 마나를 이용해서 마왕을 수백 년간 봉인해 두고 있었다.
마왕이 탑에 있는 것을 확인했으니,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검의 파편을 다 모으는 일이었다.
검 파편은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 파편을 가지고 있는 마물은 이 탑에 있을 터였다.
바로, 저 위.
탑의 옥상이었다.
탑의 꼭대기에서 검은 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점들은 날개를 펴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모두 하늘을 나는 마물들이었다.
섬에 도착한 우리를 환영하는 마물들.
분명, 검 파편을 가지고 있는 마지막 마물왕이 보낸 마물들이었다.
나는 다가오는 마물들을 보고, 씩 웃었다.
탑 꼭대기까지 올라갈 방법이 없었는데, 잘되었다.
내게 있어 죽은 마물들은 좋은 운송 수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