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5화
제25편 돌파 (2)
지하 도시에서 몇백 년간 마나를 흡수한 언데드들이나, 머릿속에 검 파편을 꽂고 있던 마물 왕들과 달리.
이 유적에 오는 길에 모아온 언데드들은 계속 되살아날 수 없었다.
목이 잘리고, 사지가 분해되면 결국 움직임을 멈추는 것이었다.
이 언데드들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흙으로 돌아갈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단점들은 지금 이 상황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해골이 이끄는 언데드 군단은 마물 군단과 부딪쳐 서로를 죽여댔다.
언데드들은 이미 죽어 있었으니, 다시 죽는 게 아니라, 온몸이 썰리는 것이었지만.
당연히 숫자가 더 많고, 더 유연하게 움직이는 마물들이 언데드들을 압도했다.
하지만, 그런 압도적인 상황에서도 언데드의 숫자는 줄지 않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 공격한 언데드들이 계속 버텨서 숫자가 유지되는 게 아니었다.
끌어모았던 언데드들은 마물 군단과 마주치니 빠르게 소진되었다.
하지만 줄어드는 숫자만큼, 언데드는 계속 보충되었다.
언데드에게 죽어 넘어간 마물들이 다시 일어나 언데드 군단에 합류한 것이었다.
죽여도 죽여도 숫자는 줄지 않고, 언데드 군단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한참을 싸우는 중에 마물들이 썰물처럼 물러섰다.
그리고, 다른 마물들이 앞으로 나섰다.
저번 삶에서 본 적이 있는 마물들이었다. 마지막, 영지에서 싸울 때, 성문 앞에서 싸웠던 마물들이었다.
스스로가 공성추가 되어 성문을 부수려 했던 마물들.
온몸이 돌처럼 단단했던 마물들이었다.
돌 거인처럼 보이는 마물과 딱딱한 껍질을 가진 곤충형 마물들이 언데드 군단에 달려들었다.
콰직.
여태껏 잘 싸워왔던 언데드 군단이었지만, 새로 등장한 마물들에게는 속수무책이었다.
쾅! 쾅! 퍽!
시체가 된 언데드들의 몸은 돌같이 단단한 마물의 팔다리에 깨지고, 박살 났다.
언데드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해골이 가운데에서 열심히 언데드들을 지휘하고, 죽은 마물들을 되살리려 했지만, 기울은 대세는 되돌릴 수 없었다.
“역시 상성이란 게 있는 모양이네.”
대륙을 횡보하면서 사람들을 죽였다는 언데드 군단도 마물들을 상대하기는 부족했다.
하기야, 언데드 군단은 고대 제국의 삼 분의 일을 박살 냈지만, 마물들은 제국 자체를 멸망시켰었다.
평범한 싸움이라도 이기기 어려웠을 텐데, 상대가 이렇게 전술적인 행동을 해버리면 이길 방법이 없었다.
결국, 언데드들은 모두 부서졌다.
해골을 지키던 언데들들도 움직임을 멈추고, 마물들은 해골의 바로 앞까지 오게 되었다.
해골이 직접 싸워야 할 시간이 된 것이었다.
하지만, 해골은 싸우는 대신, 모습을 감췄다.
아니, 모습을 감춘 게 아니라, 내가 해골을 소환한 것이다.
내 옆에 나타난 해골은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겉으로 달라진 것은 없지만, 해골 주위의 마나가 약해져 있었고, 해골의 눈의 빛이 희미해져 있었다.
성물의 마나를 끌어다 쓰고 있었지만, 해골의 힘이 무한한 것은 아니었다.
천이 넘는 언데드들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언데드들을 계속 일으켰으니, 지칠 만했다.
그렇게 언데드 군단이 무너지는 사이, 나는 호숫가에 도착해 있었다.
마물들과 언데드가 싸우는 동안, 마나를 감추고 이곳 호숫가로 달려온 것이었다.
진형을 갖춘 채로 주위를 감시하는 마물들을 뚫는 것은 어렵지만, 한창 싸우고 있는 전쟁터를 가로지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적과 싸우느라 감시를 할 수 없었고, 호숫가를 지키던 마물들은 모두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그 덕분에, 내가 이 호숫가에 도착한 것을 알아챈 마물은 없었다.
거기다, 내가 숨어 있는 호숫가 바위틈 주변에는 마물이 없었다.
원래 마물의 둥지가 옆에 있었지만, 둥지에 있던 모든 마물이 싸우러 나가, 둥지는 텅 비어 있었다.
싸움이 끝났으니, 마물들이 다시 돌아오겠지만, 아직은 시간이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열심히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아쉽게도 마물들을 지휘하던 마물은 찾을 수 없었다.
“그 마물도 탑에 있는 거겠지?”
자유롭게 마물들을 움직이는 것을 보면, 마물들의 움직임을 모두 볼 수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높은 곳에서 내려다봐야 했다.
그리고, 이 주변에 높은 곳이라면 호수 중앙에 있는 탑밖에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호수 중앙에 있는 섬에 세워져 있는 탑이었다.
하지만, 탑이 섬을 거의 덮고 있으니, 섬 중앙에 탑이 서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쨌거나, 그 마물을 잡으려면 결국, 호수를 건너 탑에 들어가야 했다.
“여기는 봉인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는데…….”
황궁 터와 달리 이상한 마나가 퍼져있지도 않고, 탑 위에 굉장한 마나가 모여있지도 않았다.
그냥 오래된 탑만 호수 중앙에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었다.
탑에 도착할 때까지는 별문제가 없을 것 같았지만, 나는 손을 들어 서쪽을 가리켰다.
도착하면 부르기로 약속했으니, 약속을 지킬 때였다.
“소환 발레아.”
내 부름에 발레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평상복 차림의 발레아였지만, 이 황량한 곳에서도 그녀가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여기가 그 호수인가요?”
발레아의 물음에 나는 호수 중앙에 우뚝 솟아있는 탑을 가리켰다.
“네. 저 탑이 마왕이 갇혀 있는 탑입니다.”
내 말에 발레아는 탑을 보았다가, 호수 반대편을 확인했다.
마물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벌써 돌아오다니.
생각보다 복귀가 빨랐다.
“탑에 가려면, 서둘러야겠네요. 먼저 탑까지 길을 만들어야겠죠?”
“네. 부탁할게요.”
사실, 발레아가 없다면, 나 혼자 호수 중앙에 있는 탑에 가기가 쉽지 않았다.
수영하면 된다지만, 호수에 마물이 있을지도 몰랐고, 그 마물과 싸워야 할지도 몰랐다.
나는 물속에서 마물과 싸운 적이 거의 없었고.
내 검술은 물속에서 싸우기 위한 검술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주변에 하늘을 나는 마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탑에 가기 위해서는 발레아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호숫가로 걸어간 발레아는 지팡이로 호수의 끝자락을 꾹 찍었다.
지팡이 끝이 물에 닿는 순간,
촤아아아악.
지팡이를 중심으로 호수 물이 좌우로 갈라졌다.
“모세의 기적?”
“네?”
“아니에요. 그냥 감탄사예요.”
내 말에 발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감탄사이긴 했지만, 정말 모세의 기적을 보는 듯했다.
물론, 호수 전체가 반으로 갈라진 것은 아니었고, 일정 깊이부터는 천장이 물에 덮여 수중에 공기터널이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감탄사가 절로 나올 광경이었다.
그냥 물건을 부수는 데 마나를 쓰는 나와 달리, 발레아의 능력은 마법으로 불릴 만했다.
더구나, 지금은 시간을 들여 영역을 구축한 것도 아니었다.
발레아의 현실 조작 능력은 이제는 영역을 구축할 시간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발레아가 만든 수중 터널로 걸어 들어가기 전, 그녀가 우리 뒤에 서 있는 해골을 가리켰다.
“데려가는 건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쳐버려서 지금은 쓰기 어려운 해골이었다.
그렇다고, 지하 도시로 돌려보내기도 번잡했고.
“아뇨. 이 해골은 여기에 묻어두면 돼요.”
언데드가 숨을 쉴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니, 땅속에 묻어두면 그만이었다.
해골이 땅속에 있는 것은 훌륭한 자연의 섭리였고.
만약을 위한 전송 유물로도 안성맞춤이었다.
탑 밖으로 나오고 싶을 때, 해골을 땅 위로 나오게 한 뒤에 전송하면 될 터였다.
내 말에 발레아는 해골 쪽으로 반대편 손을 휘둘렀다.
해골이 서 있던 땅이 물컹거리기 시작했고, 해골은 늪처럼 변한 땅에 빨려 들어갔다.
땅속에 파묻히는 동안 무슨 이유에서인지 해골이 턱을 달그락거렸지만, 발레아도 나도 해골의 모습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해골은 그렇게 땅속으로 사라졌다.
굳어진 땅을 확인한 뒤, 발레아와 나는 호수로 향했다.
좌우로 갈라진 물의 벽.
그 벽은 조금 더 걸어가자 수중 터널로 변했다.
물 벽과 물의 천장 그리고, 그 뒤로 오가는 물고기들과 수초들.
마치 전생의 아쿠아리움에 온 것 같았다.
발레아와 나는 아쿠아리움에 구경을 온 연인들처럼 그렇게 호수 안을 구경하며 탑을 향해 나아갔다.
생각해 보면 이런 호수 중앙에 저런 작은 섬이 덩그러니 있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 작은 섬에 섬을 덮을 만한 탑이 높게 세워지는 것이 이상했고.
호수 바닥을 통해 섬에 도착하니,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원래 섬은 없었다.
섬이라고 생각했던 곳도 탑 일부분이었다.
섬에 탑이 세워진 것이 아니라, 탑은 호수 바닥에 세워져 있었다.
발레아와 나는 수중 터널 안에서 멍하니 탑을 올려다보았다.
작은 섬이라고 말했지만, 그건 섬이라고 생각했기에 작다고 말했던 것이었다.
섬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탑이면, 그 크기에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물 위에 나와 있는 탑도 낮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세계에서 볼 수 없는 높이의 탑은 아니었다.
하지만, 호수 바닥부터 세워져 있는 탑은 전생의 수백 층짜리 고층 빌딩을 보는 것 같았다.
고대 제국이 이 탑을 만들었다고?
호수 물을 다 빼낸 뒤에 이 거대한 탑을 세우고, 다시 물을 채웠다고?
고대 제국의 기술에 여러 번 감탄한 나였지만, 고대 제국이 이 탑을 세웠다는 것은 믿기가 쉽지 않았다.
“설마, 이 탑도 뭔가 비밀 같은 게 있는 건가…….”
아무리 봐도 평범한 유적은 아니었다.
유적을 보니, 마왕이 이 유적을 찾아온 것도, 마왕이 이 유적에 봉인된 것도 다 말이 되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이제 수면으로 올라가야 했다.
호수에 물을 다시 채웠다면 입구도 수면 위에 있을 테니.
그런 생각에 발레아에게 말을 하려 했지만, 발레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기 앞에 보이는 게 문 같지 않나요?”
발레아가 가리킨 곳에는 그녀 말대로 작은 문이 있었다.
이 거대한 탑과 어울리지 않는 작은 문.
조개와 따개비가 덮여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벽처럼 보이는 문이었다.
그 문은 사람 한 명이 고개를 숙여야 겨우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문을 보았는데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우리는 수면으로 올라가는 대신, 문에 다가갔다.
따개비를 걷고, 다시 살펴보았지만, 문이 맞았다.
나는 문에 손을 대고, 힘껏 밀어보았다.
역시…….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으로 두들겨보니, 두께가 장난이 아니었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쉽게 잘려 나갈 재질도 아니었다.
“역시 열리지 않는 걸까요?”
발레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머릿속으로 음성이 들려왔다.
기계적인 음성, 고대 제국 때의 말투였다.
[본 시설은 폐쇄되어 외부에서는 진입할 수 없습니다.]
음성은 문이 꿈쩍도 안 하는 이유를 들려주었다.
난감한 말이었지만, 나는 음성을 듣고, 유물 주머니에 들어있는 유물이 떠올랐다.
나는 주머니에서 검은 구슬을 꺼냈다.
주머니에서 구슬을 꺼내자, 구슬이 바로 말했다.
[도착했군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었다. 나는 바로 물어보았다.
“열 수 있겠어?”
[시설에 접근이 안 됩니다. 모든 연락에 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내 생각대로는 되지 않았다.
[……한 군데 연락되는 곳이 있습니다. 정면의 문에 저를 대보시겠습니까?]
에고의 말에 나는 정면의 문에 구슬을 가져다 댔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다시 탑의 음성이 들려왔다.
[12번째 예비 에고의 정식 사용자가 확인되었습니다. 시설이 폐쇄되었습니다. 정식 사용자라도 관리자용 통로 이외에는 시설에 진입할 수 없습니다.]
이 구슬로도 다른 곳으로는 탑을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관리자용 통로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당연히 나는 승낙했고, 다시 탑이 말했다.
[외부에 공기가 확인되었습니다. 문을 엽니다.]
탑의 말과 함께 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철컥.
기이이이잉.
작지만, 두꺼운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