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4화
제24편 돌파 (1)
봉인지로 오기 전, 나는 전에 한 것처럼 저택 지하에 제국의 황실 금고를 소환했다.
전에는 딱 황실 금고를 소환할 공간만 만들었지만, 이번에는 거대한 지하 공간의 입구에 황실 금고가 자리 잡았다.
다른 사람들도 놀랐지만, 황실 금고를 보고, 집사장과 오헨 경은 입을 딱 벌렸다.
황실 금고를 보기 전까지 집사장과 오헨 경, 그리고 관료들은 영지의 재정 때문에 걱정이 많았었다.
축제에 엄청난 돈을 풀고, 영지민들을 불러들이고, 왕국 전체에서 자재와 식량을 끌어모으는 데 가지고 있는 돈을 전부 쏟아부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건만, 그들로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걱정은 황실 금고가 도착한 순간 모두 사라졌다.
유물을 제외하고도 제국 황실이 수백 년간 모아온 금은보화가 금고의 여러 방에 가득 쌓여 있었다.
내가 그동안 모아온 재화와 영지의 세금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건……. 왕국 아니 대륙의 모든 식량을 사도 될 것 같은데요.”
집사장도 금고에 쌓인 금은보화를 보고, 그런 말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전까지일 뿐이었다.
그 뒤에는 이런 금은보화는 가치가 뚝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두 달 동안 최대한 끌어모으세요. 소문이 나도 괜찮습니다. 마물들이 쏟아져 나올 때, 많은 사람이 도망쳐 올 수 있을 테니까요.”
내 말을 집사장도 오헨 경도 순순히 따라주었다.
황실 금고까지 보여주니, 그들도 마왕이 다시 돌아올 거라는 내 말을 완전히 신뢰하게 된 것이다.
나는 황실 금고를 소환한 뒤에 마지막으로 왕국 수도로 이동했다.
얼마 전 여왕에게 반납한 ‘기사의 검’으로 내 몸을 전송한 것이었다.
바로 봉인지로 가지 않고, 수도로 향한 것은 수도에 벤자민이 도착할 시간이어서였다.
다행히 길은 엇갈리지 않았다.
나는 저번 삶에서처럼 중앙 홀에서 벤자민을 만났고, 다시 한번 그를 설득했다.
같은 말과 같은 대답.
한 번 해봤기에 벤자민의 설득은 어렵지 않았다.
벤자민은 자리를 내려놓고, 바로 내 영지로 오기로 했다.
그의 확답을 들은 뒤에, 나는 바로 봉인지로 향했다.
‘전송’으로 도착한 곳은 전에 왔었던 반파된 지하 신전이었다.
셀린의 신전.
저번 삶에서도, 얼마 전에도 왔었던 신전이었다.
버려진 이 신전을 이렇게 자주 방문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아니, 이 종교와 오래 연관이 될지도 예상치 못했었다.
나는 기울어져서 벽에 기대고 있는 여신의 조각상에 고개를 숙인 뒤, 주변을 살폈다.
얼마 전에 왔을 때, 발레아가 뚫어 놓았던 지상으로 향하는 동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마물들이 이 안으로 들어올까 봐, 떠나면서 내가 메워버리라고 했으니, 보일 리가 없었다.
발레아가 없어서 그 동굴을 다시 만들 수 없었지만, 괜찮았다.
저번 삶에서 이곳에 왔을 때도 발레아가 없었지만, 쉽게 빠져나갔었다.
나는 ‘신검’을 꺼낸 뒤, 마나를 불어넣었다.
신검을 통해 이 신전에 남아 있는 셀린 여신의 힘이 담긴 물건들이 느껴졌다.
파괴된 조각상들과, 망가진 유물들.
그리고, 잠들어 있는 골렘들이 느껴졌다.
나는 골렘들을 깨웠다.
구구구궁.
땅이 흔들렸고, 잠시 뒤에 벽을 뚫고 골렘들이 나타났다.
“지상으로 구멍을 뚫어.”
내가 신검으로 발레아가 뚫어 놓았었던 벽을 가리키자, 골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수십의 골렘들이 벽을 부수고, 길을 내기 시작했다.
저번 삶에도 본 광경.
나는 골렘들을 따라, 다시 만들어진 동굴을 통해 지상으로 올라갔다.
동굴 밖, 봉인지는 얼마 전 발레아와 왔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아직, 마물들의 마나가 가득 느껴졌지만, 그때와 달리, 어딘가 혼란스러운 분위기였다.
뭔가 들떠있는 듯한 분위기가 밀림과 숲에서 흘러나왔다.
마물들도 마왕이 봉인을 깨고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하늘에 출렁이는 마나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밖으로 나와 대기하고 있는 골렘들을 다시 신전 유적으로 돌려보냈다.
동굴 안으로 사라지는 골렘들을 보니, 무척이나 아쉬웠다.
혹시나 해서 다시 다시 테스트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골렘을 따로 소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하 도시에 있는 언데드나, 다시 살린 좀비 거인도 소환할 수 있어서 골렘도 시도해 본 것이었는데, 골렘은 소환해도 내 옆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 골렘들은 내가 아니라, 이 유적에 일부로 인식되는 모양이었다.
골렘은 오래전 마물 왕의 싸움에서도 상당히 도움이 되었던 동료였었는데, 아쉽게도 이번에는 같이 싸우기 힘들 것 같았다.
나는 골렘들이 동굴을 무너뜨리는 것을 확인한 뒤에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봉인지는 대륙의 동쪽 끝.
고대 제국 수도의 폐허 위에 만들어져 있었다.
수도의 폐허 위라지만, 봉인지는 웬만한 왕국과도 같은 크기를 자랑했다.
폐허 위에 수백 년간 쌓여온 밀림은 대부분의 폐허를 덮어버렸고, 이제 남은 것은 숲과 밀림, 그리고 오랜 세월에도 파괴되지 않은 유적들이었다.
물론, 그 유적들은 대부분 지하에 있었다.
지상은 대전쟁과 세월, 자연을 버텨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상에 있는 모든 유적이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접근하기 어려운 곳. 파괴되기 힘든 곳의 유적은 아직 남아 있었다.
전에 방문했었던 봉인지 해변의 섬. 교단의 성지이자, 고대 황실의 별장도 그런 유적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는 곳도 지상에 남아 있는 유적이었다.
그 유적은 봉인지의 남쪽, 고대 제국 수도 남쪽에 있는 거대한 호수에 있었다.
정확하게는 호수 중앙에 있는 섬에 유적이 있었다.
호수 안의 섬이었지만, 이곳도 섬이라서 그런지, 지상의 유적이 파괴되지 않았었다.
아주 멀리서도 섬 위로 우뚝 솟은 탑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그 탑에 가 보지 못했었다.
모험가들과 용병, 조직과 제국의 기사들이 직접 가 보지 못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 호수를 에워싼 마물들이 너무 많고,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빤히 보이는 호수 중앙의 탑과 호수를 둘러싼 엄청난 수의 마물들.
당연히 조직은 그 탑을 유력한 후보로 여길 수밖에 없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호수의 탑보다 황궁 터를 더 유력하게 생각했었다.
물론, 내가 틀렸지만.
내가 호수의 탑을 뒤로 미룬 것은 그 탑이 용사와 관련된 유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탑은 선택의 탑입니다.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모르지만, 호수의 검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용사가 될 이를 선정하고, 능력을 개화시켜주는 용사 연구소입니다.]
그리고, 그 유적은 내가 가지고 있는 에고 구슬이 잘 알고 있었다.
[12번째 예비 에고인 저의 본체가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용사 연구소에 마왕이 봉인되어 있다니.
마왕이 용사였다는 것을 알기 전에는 마왕이 용사들을 없애기 위해 쳐들어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마왕 자신이 용사였으니, 그곳을 다시 찾아갈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감정을 잃은 마왕이 분노한 채로 자신을 용사로 만든 기관을 쳐들어갈 리도 없을 테고…….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왕은 옛고향을 찾아간 모양이었다.
그것도, 제국을 멸망시킨 뒤에.
호수에 가까워질수록 밀림도 숲도 점점 줄어들었다.
마물의 둥지도 늘고, 지나다니는 마물도 점점 늘어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물 몰래 움직이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발레아를 데려오면 좋을 것 같았지만, 아직 그녀를 데려올 수 없었다.
최대한 자주 영지에 다녀온 바로는 지하 도시를 만들기 위해 아직 발레아의 능력이 필요했다.
설비나 뒷마무리는 사람들이 하겠지만, 땅을 파고, 공간을 만드는 것은 발레아가 해야 했다.
지팡이를 쓰고, 오랫동안 영역을 펼쳐놓았다고 해도, 그런 거대한 공간을 하루아침에 만들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당장 발레아가 없더라도 나아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나가던 마물들에 들켜 싸움을 하게 된 나는 마물들을 죽인 뒤, 가슴에서 큐브. 죽음의 성물을 꺼냈다.
항상 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검은 마나를 뿌렸던 죽음의 성물은 조용히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대로 죽은 마물들을 깨울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다른 능력을 사용했다.
“해골 신관 소환.”
내 말과 함께 언데드가 된 죽음의 신관이 내 앞에 소환되었다.
로브를 입은 해골은 내게 고개를 숙였고, 나는 해골에게 명령했다.
“죽은 자들을 움직여라.”
해골은 말없이 내 명령에 따랐다.
해골이 뼈다귀만 남은 손을 들어 올렸고, 죽은 마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억. 크루룩.
괴기한 울음소리를 토해내며, 시체들이 몸을 일으켰다.
해골 신관이 언데드들을 일으킨 것이었다.
성물을 가진 나도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내가 하는 것과 해골이 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인간의 기억이 모두 날아가 수동적인 언데드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가 오랜 세월 쌓아온 능력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물에 대한 통제력과 운용 능력. 그리고 검은 마나의 활용까지.
더구나 나는 직접 싸워야 했으니, 언데드들은 해골 신관에게 맡기는 편이 나았다.
“가자.”
나는 언데드들을 이끄는 해골 신관을 데리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숨지도 않고, 언데드들에게 싸움을 미루지도 않았다.
나는 덤벼오는 마물들은 직접 죽인 뒤, 해골에게 넘겨주었다.
해골은 내가 죽인 시체를 되살렸고, 그의 언데드들은 점점 숫자를 불려갔다.
숫자가 늘자, 주변의 관심을 더욱 끌게 되고, 마물들은 더 많이 모여들었다.
당연히 속도가 늦어졌지만,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나는 결국, 탑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멀리, 커다란 호수와 호수 중앙에 우뚝 솟은 탑이 보였다.
그리고, 벌판 사이사이 보이는 마물들의 진영도 보였다.
마물이 사람처럼 진영을 차리고 있다니…….
이곳까지 오면서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예상했었다.
저번 삶에서 영지를 공격한 마물들을 보고, 또, 마왕과 함께 나타난 인간의 말을 하는 마물을 보고, 예상한 일이었다.
수많은 마물이 마왕을 따랐지만, 마물들을 사람처럼 움직인 것은 마왕이 한 일이 아니었다.
기억에서 본 마왕은 나와 같은 기사이자, 능력자일 뿐이었다.
그에게서 전략적인 식견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었다.
마물들을 지휘한 것은 마왕과 함께 나타난 인간의 말을 하는 마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마물이 마왕의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왕이 등장하자마자, 마물들이 군단으로 움직였다고 했으니, 같은 곳에 있었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저 탑에는 마왕이 있을 터였다.
이번에는 잘 찾아온 것이었다.
인간들처럼 자리를 잡고 있던 마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온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마물들이 움직이자, 마치 벌판의 수풀이 출렁이는 것 같았다.
벌판 가득한 수의 마물이라더니.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인간처럼 움직이는 마물들로 가득 찬 벌판.
사람들이 호수 근처로 가는 게 불가능할 만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마물들의 시야를 피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혼자서 저 마물들을 뚫고 호수까지 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물론, 나는 혼자서 갈 생각이 없었다.
혼자서 갈려면, 이렇게 준비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다가오는 마물들을 보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내 뒤에는 해골 신관이 서 있었다.
그리고, 신관 뒤에는 죽은 마물, 언데드들이 서 있었다.
수백, 아니 천이 넘는 언데드 마물들.
저 마물 부대들을 뚫기 위해 내가 준비한 병력이었다.
사실, 달려오는 마물들도 내가 아니라, 내 뒤에 서 있는 언데드들을 보고 달려오는 것이었다.
달려오는 마물들을 보고, 검을 치켜들었다.
“길을 뚫어.”
해골 사제가 뼈다귀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고, 언데드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아아앙!
철컥. 철컥.
마물들이 달려들었고, 언데드들이 썩어버린 다리로 내달렸다.
콰아아앙!
곧이어, 마물 군대와 언데드 마물들이 정면에서 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