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2화
제22편 반복 (3)
쿵.
어두운 밤, 죽은 거인의 시체 근처에서 보초를 서던 병사 중 하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게 무슨 진동이지?”
그의 말에 같이 보초를 서던 병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동? 아무것도 못 느꼈는데?”
진동을 느낀 병사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밤하늘도 그대로이고, 황량한 벌판도, 마물 왕의 시체도 그 자리에 있었다.
“착각한 건가?”
병사가 머리를 긁적이자, 다른 병사가 혀를 찼다.
“졸았던 거 아냐? 서서 자다가 악몽이라도 꾼 모양이지.”
동료의 말에 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가. 종일 긴장했더니 피곤하기는 하네.”
“그런 굉장한 싸움을 봤는데, 꿈을 꿀 수도 있는 거지 뭐. 나도 그런 거대한 괴물을 그렇게 쉽게 쓰러뜨릴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니까.”
두 사람은 낮에 보았던 대단한 전투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마물 왕의 거대함과 그 마물 왕과 싸운 투레 백작의 훌륭함. 그리고, 마물 왕을 쓰러뜨린 이름 모를 기사의 대단함까지.
그들은 모르겠지만, 옆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조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더구나 그들이 보고 있는, 누워 있는 마물 왕의 시체는 지금 멀쩡히 서 있었으니.
자신의 환상에 틈이 생겨서일까?
발레아는 마음에 안 드는 얼굴로 진동을 느낀 병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발레아의 영역으로도 이 거대한 마물이 움직이는 것을 계속 숨기기는 어려웠다.
나는 다시 움직이는 마물 왕이 내 말에 잘 따르는 것을 확인한 뒤에 머릿속으로 다른 마물 왕을 떠올렸다.
얼마 전 내가 죽인 마물 기사를.
“전송.”
말과 함께 일렁이는 배경과 함께 시야가 바뀌었다.
나는 다음 순간, 언데드가 된 마물 기사 앞. 지하 도시에 서 있었다.
마물 기사와 해골, 그리고 다른 언데드들은 내 지시대로 지하 도시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뭔가 남은 유물이 있는지 찾아보고, 외부에서 마물이나 사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감시하라고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수백 년간 죽음의 마나에 절여져 있어서인지, 이 도시 안에 있는 언데드들은 내 통제를 잘 따랐다.
마물 기사나 해골 신관은 스스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나는 이 도시에 언데드 하나를 더 추가했다.
“소환 좀비 거인.”
다른 이름이 있을 테지만, 내게는 이 이름이 가장 부르기 편했다.
이제 언데드가 되었으니 좀비라고 부르기에 더 알맞고.
쿠웅.
내 소환에 언데드 거인이 도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먼지가 일고, 근처의 건물 하나가 반파되었다.
어쩔 수 없었다.
지하 광장에 만들어진 도시니 빈 지역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래도 이곳은 다른 곳에서 본 적이 없는 거대한 지하 광장이었다.
웬만한 성벽도 넘어갈 수 있는 마물 왕이었지만, 그 언데드가 손을 들어도 천장과 상당한 거리가 있을 정도였다.
어찌 되었건, 남들이 모르는 이런 장소가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했다.
이 버려진 지하 도시는 나만의 요새, 나만의 병영이었다.
좀비 거인을 지하 도시에 남겨두고, 나는 다시 발레아 옆에 돌아왔다.
그 뒤에 우리는 수도로 돌아갔다.
발레아는 병사들에게 걸어놓았던 환상을 해가 뜨기 전에 거두어들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병사들에게 마물 왕이 녹아내리는 환상을 보여주었다.
병사들은 마물이 녹아내리는 광경에 놀라, 수도로 달려왔다.
하지만 그들이 다른 이들에게 알리기도 전에, 환상은 사라지고, 벌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다음 날, 마물 왕이 갑자기 녹아 없어진 것에 잠시 소란이 일었지만, 그 소란은 그날 발표된 제국 황제의 죽음에 묻혀 버렸다.
마물 왕에게 죽었다는 식으로 발표되었지만, 그 발표를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사람들은 그 발표를 믿는 척하며 일상으로 돌아갔다.
마물왕이 사라지고, 황제가 죽었다는 발표가 있자, 일상으로 돌아간 제국인들과 달리, 귀족들은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위기도 사라지고, 새로운 지배자가 등장했으니, 다시 줄을 서려는 것이었다.
나에게도 여러 사람이 찾아왔지만, 저번 삶과 달리, 그 사람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이름도, 얼굴도 숨겼는데, 만나줄 이유가 없었다.
그건, 차도프 자작도 마찬가지였다.
저번 삶과 같이 조직의 대표로 찾아왔겠지만, 나는 그를 만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 정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인지, 내가 거절하자, 바로 물러갔다.
지금은 조직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마왕이 봉인된 예상 유적도 조직의 도움으로 저번 삶에서 확인해 놓았으니, 이번에는 마지막 유적만 방문하면 될 터였다.
나중에 ‘조직’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때 가서 만나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나는 2 황자를 만나러 갔다.
그는 이번에도 소파 신세를 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는 발레아에게 정말 잘못 보인 듯했다.
내가 발레아에게 은근슬쩍 권유하기는 했지만, 두 번이나 저렇게 누워 있는 것을 보니, 조금 안쓰러운 느낌이 들 정도였다.
황자가 반가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나는 그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일이 끝났으니, 카를로스 왕국으로, 제 영지로 돌아가겠습니다.”
내 말에 황자는 놀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벌써 간다고? 이곳에 남아서 나를 도와줄 생각은 없는가?”
나는 황자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저번 삶에도 그랬지만, 제국에 남을 생각이 없었다.
나는 내 영지와 내 영지민이 좋았다.
그전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저번 삶에서 다시 한번 깨달았다.
거기다, 제국에 남아 있어 봤자, 이상한 소리만 들을 터였다.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황자의 양자가 되라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뭐, 이번에는 얼굴도 드러내지 않아, 그럴 염려는 별로 없었지만…….
스타는 이미 되어봤으니, 지금은 조용히 마왕을 상대할 준비를 할 생각이었다.
황자와의 계약은 예전에 끝내 놓았으니, 뒷일도 걱정이 없었다.
배반만 하지 말라는 저번 삶의 계약과 달리, 이번 계약은 몇 가지 내용이 더 추가되어 있었다.
내가 원하기 전에는 내가 누구인지 알리지 말라는 것과 마왕을 상대할 때는 내 부탁을 들어준다는 내용이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내 단호한 모습에 황자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렇게 황자와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방을 떠나기 전 황자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황궁 금고를 잠깐 보게 해주십시오.”
내 말에 황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필요한 유물이라도 있나?”
그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필요한 것은 황실 금고에 있는 한 가지 유물이 아니었다.
나는 황실 금고 전체가 필요했다.
“아닙니다. 구경만 하면 족합니다.”
“그런 거야 문제없지. 유물도 내주고 싶지만, 아직 황위에 오르지 않아 금고의 주인이 되지 못해서 금고에 있는 유물은 주지 못하거든.”
황자의 허락을 받고, 나는 그날 황실 창고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저번 삶에서 보았던 관리자가 다시 나를 맞이했다.
조직과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인지, 그는 나를 무뚝뚝하게 대했다.
“황자의 허락이 있더라도 함부로 유물을 만지거나 가지고 나가면 안 됩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으니 허튼짓은 하지 않으시기를.”
그는 저번 삶과 달리, 유물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번에는 유물을 만질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한번 본 기억은 다시 보지도 못하니.
나는 그에게 손을 흔들고, 제일 안쪽 방으로 향했다.
이 황실 창고의 중심부. 코어가 있는 곳이었다.
나는 황실 금고를 방문한 뒤에 바로 교단 본부로 갔다.
그곳에서 발레아와 교단의 대주교, 사제를 만나 건물 지하에 있는 공간 이동진으로 향했다.
나는 공간 이동진으로 가는 동안 대주교와 교단 사제에게 각각 반지를 건네주었다.
이 반지들은 황실 금고에서 가져 나온 게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었던 유물 반지들이었다.
방어막을 펼칠 수 있는, 평범하다면 평범한 유물 반지였다.
“두 사람 다 그 반지는 꼭 손가락에 차고 있어야 해요.”
반지를 받고 대주교와 사제, 셀린의 여신도 조아나와 엘레나 누나는 제일 먼저 발레아의 눈치를 봤다.
확실히, 전 같았으면 이런 상황에서 발레아의 표정이 좋지 않았겠지만, 지금 발레아의 표정은 무척이나 해맑았다.
내가 반지를 준 이유를 알고 있어서였기도 했지만, 그보다 내게서 저번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반지를 끼고 있으면, 만약의 상황에서 제가 도우러 올 수 있어요.”
두 사람에게 준 반지는 내 유물들, 내 소유로 인식된 반지들이었다.
원한다면 그 반지 옆으로 바로 날아올 수 있었다.
물론,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내가 바로 알 수는 없겠지만, 셀린 신도의 조아나라면, 레스티에게 알릴 방법이 있을 터였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두 사람을 돕기 위해 반지를 준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제국 수도에 편히 오기 위해, 유물을 남긴 것이었다.
그리고, 발레아에게 미리 말해준 이유도 이쪽이었다.
진실이 무엇이든,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두 여성을 남겨두고, 발레아와 나는 공간 이동진을 통해 카를로스 왕국의 수도로 돌아왔다.
수도에 도착한 뒤에 나는 바로 왕궁으로 달려가 여왕과 공작을 만났다.
그리고.
저번 삶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에게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제국의 황제가 죽고, 2 황자가 정권을 장악한 것. 제국에 넘어온 마물 왕들이 죽었다는 것과 마왕이 곧 봉인을 깬다는 것까지.
물론, 내가 말한 내용 중에는 제국에서 확인하지 않은 것들이 섞여 있었지만, 나는 직접 보고 들은 것처럼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했다.
어차피, 저번 삶에서 보고 경험한 것들이었다.
“몇 달 뒤에 마물들이 봉인지 밖으로 쏟아져 나올 겁니다. 마물들은 인간의 군대처럼 진형을 갖추고, 제국과 다른 왕국들을 차례로 무너뜨릴 겁니다. 이번에는 마물들의 웨이브가 아닙니다. 수백 년 전에 벌어진 고대 제국을 멸망시킨 대전쟁이 다시 벌어지는 것입니다. 2차 대전쟁입니다.”
내 말에 두 사람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공작은 물론, 여왕까지도 반신반의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두 사람을 이해했다.
직접 당하지 않는 이상, 내 말을 믿기 어려운 게 당연했다.
나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기 어려웠을 테니.
어쨌거나, 나는 알고 있는 사실들을 두 사람에게 말하고, 유물들을 건네주었다.
공주에게, 그리고……. 공작에게도.
“그리고, 버티기 어려우면 저희 영지로 오십시오.”
그렇게 두 사람에게 말을 남기고, 발레아와 나는 영지로 향했다.
내 옆에서 말을 달리는 발레아의 표정이 무척이나 밝았다.
영지에 도착하면, 발레아를 백작 부인으로 삼겠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영지에 가서도 할 일이 많았다.
발레아를 백작 부인으로 발표하고, 결혼 선물로 황실 금고도 옮겨와야 했다.
그리고, 영지 지하에 대피소도 건설해야 하고, 마왕이 봉인된 유적도 찾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전에 영지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저번 삶에서 약속한 대로.
같이 최후를 맞이했던 이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그들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피로연을 거하게 열어야겠어.”
핑계도 충분하니, 모두가 놀랄 만한 잔치를 벌일 생각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영지를 향해 힘차게 말을 달렸다.
멀리 영지가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