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9화
제19편 상과 벌 (2)
다시 보게 된 봉인지는 저번 삶에서 보았던 봉인지와는 많이 달랐다.
그때는 봉인지 밖으로 마물들이 쏟아져 나와 비어 있는 곳이 많았지만, 지금은 빈 곳을 찾지 못할 정도로 마물들이 가득했다.
분명, 얼마 전에 마물 왕들과 마물들이 제국으로 쏟아져 나왔는데, 봉인지는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황궁 터로 가는 것도 전보다 어려웠다.
전에는 마물들이 줄어들어서 싸우지 않고 봉인지를 가로질렀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마물들에게 들키지 않게 영역 사이로 이동해야 하고, 둥지를 피해 크게 돌거나, 마물들과도 싸워야 했다.
그래도, 황궁 터에는 전과 비슷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발레아 덕분이었다.
그녀가 나무와 지형을 움직여 마물들을 막고, 길을 만들어 준 덕분에 최소한의 싸움으로 봉인지를 주파할 수 있었다.
혼자 왔었으면, 분명 두 배 이상 걸렸을 터였다.
그렇게 도착한 황궁 터는 봉인지의 다른 곳과 달리, 적막했다.
전처럼 폐허가 된 유적에는 식물도 짐승도, 마물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전처럼 이질적인 마나만 낮게 깔려 있을 뿐이었다.
전에 생각한 것과 달리, 이 황궁 터에는 원래부터 마물들이 없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 황궁터에 깔린 마나 때문이었다.
전에는 이 이질적인 마나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지금은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조심해야 해요. 죽음의 신 사제가 성향을 바꾸어놓은 마나가 유적 전체에 깔려있어요. 경계를 넘으면 그 마나가 신의 규칙을 강요할 거예요.”
나는 발레아에게 주의를 주었다.
살아 있는 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죽은 자는 언데드로 부활하고, 부활한 언데드는 악신의 사제를 따르게 되는 규칙.
경계 앞에서 영역을 펼치려 했던 발레아가 고개를 저었다.
“대단한 힘이에요. 이 유적에서는 제 영역을 펼치기가 불가능해요.”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곳은 악신의 사제, 해골이 수백 년간 마물 기사의 마나를 뽑아 구축해 놓은 영역이었다.
발레아가 실력이 좋다고 해도, 그녀의 힘으로 단시간에 이 정도로 완성된 영역을 밀어낼 수는 없었다.
그런 것을 원하지도 않았고.
“그래도, 말했던 것은 될 것 같아요. 길지 않겠지만.”
오케이. 그 정도면 충분했다.
역시 발레아였다.
어찌 되었건 짧은 시간이나마 신의 영역과 겨룰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건 발레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일 터였다.
“그럼, 들어가죠.”
확인도 끝났으니, 이제 해골을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나와 발레아는 마나 속으로 들어갔다.
죽음의 마나가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황궁 터 중앙에서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찾고, 발레아와 함께 그 계단을 한참 동안 내려간 것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낡고 부서진 계단도 전과 다르지 않았고, 계단을 내려와 보게 된 지하 도시도 저번 삶에서 보았던 도시와 똑같았다.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앞선 삶에서 방문했을 때와 똑같이 미아라들이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그 언데드들은 우리보다 먼저 이 지하 도시를 방문했던 모험가와 용병, 제국 기사들.
이미 한번 상대했던 미아라들이었다.
“정말, 이곳에서는 죽지도 못하는 거군요.”
곤충 박제처럼 벽에 박혀 버린 언데드들을 살펴보며 발레아가 말했다.
그 미아라들은 모두 발레아가 만든 송곳에 꿰뚫린 언데드들이었다.
죽음의 신 영역 안이라 발레아가 영역을 펼치기는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싸울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길지 않은 시간, 그리고, 그녀가 직접 손을 댄 작은 영역은 그녀가 충분히 제어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녀는 건물 벽에 손을 짚어, 건물 벽 전체를 영역으로 만들었다.
그 뒤에 발레아는 골목길 사이로 달려드는 언데드들을 벽에 꿰어버린 것이다.
벽에 박혀 버린 언데드들은 온몸을 꿰뚫리고도 계속 버둥거렸다.
나는 그녀가 놓친 언데드들을 검으로 베어내며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다른 방법으로는 죽일 수 없었지만, 기사의 검이나 성검으로는 죽일 수 있어요.”
나는 손에 들린 기사의 검을 발레아에게 보여주었다.
전처럼 기사의 검에 몸이 잘린 언데드들은 다시 움직이지 못했다.
기사의 검은 이곳에 오기 전에 다시 소환해 두었었다.
내 앞에 있는 미이라들은 성검으로 충분했지만, 해골을 만나면 기사의 검이 필요했다.
기사의 검이 또 없어지면 여왕이 고개를 내저을 테지만, 그래도 그녀는 알아서 핑계를 만들어 줄 터였다.
거기다, 기사의 검을 소환해 버리면 왕국에 바로 돌아가기가 어려워지겠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기사의 검이나 셀린의 성검으로 다시 죽일 수 있다면, 다른 신의 성물이나 신관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레스티 신관은 되려나?”
그녀는 내가 벽에 박혀버린 언데드들의 목을 베는 것을 보며 말을 이었다.
“조아나 대주교나, 교단의 신관을 데려와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교단이 진짜 종교일지 알 수 있을 텐데……. 엘레나 사제도 같이 오면 좋을 것 같고…….”
천진난만한 발레아의 말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발레아는 정말 사랑스러운 여자였지만, 무서운 여자이기도 했다.
그냥 놔두었다가는 신관 시험을 이곳에서 치르게 될지도 몰랐다.
나는 빠르게 언데드들의 목을 자른 뒤, 도시 중심부로 달려갔다.
발레아와 같이 움직여서 그런지,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도시 중앙에 있는 높은 탑과 붙어 있는 큰 건물.
저번 삶에서 확인한 바로는 이 건물은 고대 제국의 또 다른 황궁이었다.
우리는 열린 입구를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전처럼 중앙 홀 안쪽에 해골이 된 황족들이 의자에 앉아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홀 중앙에는 전과 같이 마물이 된 황태자와 해골, 죽음의 신 신관이 대치하고 있었다.
저번에는 내가 이 홀 안에 들어오는 순간, 해골이 나를 쳐다보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당연했다.
이번에는 큐브, 악신의 성물을 가져오지 않았으니까.
성물 때문에 해골이 깨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걸 가져올 리가 없었다.
그 큐브는 지금 교단 대주교 방 금고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물론, 성물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해골이 깨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해골은 결국 움직였다.
홀 입구에서는 아니었지만, 해골과 마물 기사에게 가까이 다가가니 해골이 내게 고개를 돌린 것이다.
해골의 눈에 빛이 들어오고, 해골의 턱이 달그락거렸다.
그 뒤에는 말소리가 안 나온다는 것을 깨닫고 내 머릿속으로 말을 전할 터였다.
[이상하군. 왜 말이 안 나오지? 몸도 내 몸 같지 않고……. 아무튼 이건 들리나?]
이렇게 말이지.
해골의 말은 저번 삶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시간이 다르고 상황이 달라지면, 조금이라도 말과 행동이 달라지던데, 해골은 변화가 없었다.
죽음의 사제는 정말 죽은 것일지도 몰랐다.
저 해골은 사제가 남긴 에고와 비슷한 잔재일지도.
나는 전과 달리 해골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저번 삶에는 궁금한 게 많았으니, 해골의 물음에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지만,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알고 싶은 정보는 다 들었었다.
그리고, 시간이 없었다.
[이 영역에 멀쩡히 돌아다니다니, 죽음의 신 성도들인가?]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해골은 마물 기사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도 저번과 비슷한 말이었지만, 저번과 달리 해골은 틀렸다.
나는 관련이 없지 않았지만, 발레아는 죽음의 신과 아무 관계도 아니었다.
그녀가 이곳에서 무사히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은 그녀도 비슷한 영역을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괴물이 멀쩡한 것을 보니, 시간은 많이 지나지 않은 것 같군. 인간이 이곳에 들어온 것을 보니…….]
해골은 전처럼 주절거렸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대신 나는 발레아에게 말했다.
“발레아! 지금이에요!”
“네!”
내 말에 발레아가 손에 들린 지팡이를 땅에 꽂았다.
지팡이에서 강력한 마나가 퍼져나갔다.
발레아의 영역이 펼쳐진 것이었다.
이 홀 안은 도시 외곽보다 해골의 마나가 훨씬 더 강력했다.
이곳에서는 좀 전처럼 작은 영역이나마 그녀의 영역을 만들기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원한 것도 이곳에 그녀의 영역을 펼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원한 것은 짧은 시간이나마 이곳 홀 안에 죽음의 신 영역을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해골이 거대한 마나를 이용해서 더는 내 정신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큐브도 없고, 죽음의 신 영역의 도움도 없다면, 해골이 기사의 검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해골이 내게 정신 공격을 하지 못한다면, 그는 진짜 평범한 해골일 뿐이었다.
발레아가 마나를 퍼트리자 홀 전체에 스파크가 가득 피어올랐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세상이 흔들렸다.
발레아의 영역과 죽음의 신 영역이 부딪친 것이다.
예상대로 발레아의 영역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죽음의 신 영역도 빠르게 지워져 나갔다.
삽시간에 홀 안에 가득했던 죽음의 마나가 모두 사라졌다.
그 광경에 해골이 턱을 크게 늘어뜨렸다.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서둘러요. 오래 못 버텨요!”
동시에 힘겨운 발레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말에 나는 기사의 검을 움켜쥐고, 해골에게 바로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나보다 먼저 선수를 친 사람(?)이 있었다.
콱!
두꺼운 건틀릿이 해골의 목을 움켜쥐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해골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해골의 목을 잡은 것은 마물 기사의 건틀릿이었다.
죽음의 신 영역이 사라져서인가?
마물 기사가 생각보다 빨리 정신을 차린 것이다.
마물 기사는 해골의 목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아, 안 돼! 빨리 막아! 이 괴물이 다시 움직이면 막을 수 없다! 날 죽게 내버려 두면 안 돼!]
목이 잡힌 해골이 열심히 떠들어댔지만, 마물 기사는 개의치 않고, 검을 든 반대편 손으로 해골의 머리를 후려쳤다.
쾅!
폭음과 함께 해골이 박살 났다.
해골 머리는 뒤로 날아가고, 몸은 산산이 부서졌다.
[이, 이렇게 죽다니……. 말도 안 돼!]
해골 머리는 하늘을 날면서도 계속 떠들어댔다.
역시, 언데드는 일반 공격으로는 죽지 않는 모양이었다.
해골이 날아가는 동안 마물 기사는 부서진 해골 몸뚱어리를 열심히 부숴댔다.
그동안 쌓였던 감정이 많았던 것 같았다.
발로 밟고, 대검으로 계속 짓이기는 것을 보니, 마물 기사가 수백 년간 본 악몽은 내가 본 악몽보다 훨씬 더 끔찍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난동을 부리는 마물 기사를 그대로 놔두고, 벽에 박혀버린 해골 머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왜 안 죽은 거지? 설마……. 이미 죽은 건가? 언데드가 되어서 죽지 않게 된 건가?]
벽에 박힌 채로 해골은 계속 떠들어댔다.
나는 해골의 말에 이번에는 대답해 주었다.
“아니, 넌 지금 죽게 될 거야.”
말과 함께 해골의 머리에 기사의 검을 힘껏 찔렀다.
콰직.
해골이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검이 해골의 두개골을 뚫어버렸다.
[아, 그런가. 사람으로 죽게 되는 건가……. 다행이야.]
그 말을 끝으로 해골은 형체를 잃고 허물어졌다.
마물 기사 밑에서 계속 서로 달라붙던 몸뚱어리도 마찬가지였다.
해골 머리처럼 모든 뼈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나는 벽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크르릉.”
마물 기사도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2차전인가.”
나는 기사의 검 대신, 대검을 꺼낼 들고, 마물 기사에게 달려갔다.
쾅!
마물 기사와의 두 번째 대결은 첫 번째 싸움보다 더 빨리 끝났다.
이미 한 번 싸워본 경험에다가, 발레아의 도움이 있었으니, 더 빨리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물 기사는 심장이 뚫려 숨이 멈추었다.
나는 죽은 마물 기사의 투구를 벗기고, 머리 뒤쪽에 툭 튀어나온 검 파편을 꺼냈다.
전에 봤기 때문인지, 파편의 기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정보창에 파편 숫자가 1로 바뀌었다.
정보창을 확인한 뒤에, 예상대로 메시지 창이 나타났다.
<마물의 왕을 죽였습니다. 경험치가 상승했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을 설정하시겠습니까?>
아쉽게도 저번 삶에서처럼 경험치가 대폭으로 상승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저장 시점이 나온 게 어디인가.
나는 바로 ‘예’라고 대답했다.
“그럼, 다 된 건가요?”
내가 허공을 보며 대답을 하자, 발레아가 지친 얼굴로 물었다.
“한 가지 확인만 하고요.”
나는 마지막으로 유물을 소환했다.
“소환.”
내 손에 큐브가 나타났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큐브는 소환할 수 있었다.
죽음의 마나가 큐브 소환을 막지 않은 것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큐브에 조심스럽게 마나를 밀어 넣었다.
이곳에 다시 오지 않을 텐데, 마지막으로 확인은 해봐야 했다.
우우우웅.
마나가 흘러 들어가자, 큐브가 진동했다.
동시에 공간에 가득한 마나가 큐브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 멈춰.”
나는 바로 밀어 넣던 마나를 멈추었지만, 공기 중의 마나는 계속 빨려들었다.
순식간에 황궁 터에 있던 모든 죽음의 마나가 큐브에 빨려들었다.
마나가 전부 빨려 들어갔으니, 이 지하에 있는 언데드들은 모두 움직임을 멈춰야겠지만, 언데드들은 잘도 움직였다.
딸그닥, 딸그닥.
도시 안에 있던 언데드들이 홀로 들어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고대 제국의 기사도, 탐험가와 차르 제국의 병사들도.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내가 죽인 마물 기사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이들이 주인이 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