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8화
제18편 상과 벌 (1)
다시 세상이 밝아졌을 때는 언제나처럼 고통이 몰려왔다.
숨이 막히고, 목이 불타는 것 같은 고통은 가히 끔찍했다.
나는 벽에 기댄 채로 눈을 감았다.
시간이 지나고, 통증이 가라앉자,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과거로 돌아왔으니, 메시지 창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내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 창은 여태껏 보아왔던 것과 다른 글이 적혀 있었다.
저장 시점을 설정하겠냐는 질문 대신, 적혀 있는 것은 내 자살에 관한 이야기였다.
<사망하셨습니다.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죽음의 원인이 능력 사용자 본인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것은 규칙을 어기는 것입니다. 편법을 방지하고자 벌칙을 부여합니다.>
자살하면 뭔가 문제가 있을 것 같더니.
역시 벌칙이 있었다.
설마, 앞으로 회귀할 수 없는 것은 아니겠지?
메시지를 보니 겁이 덜컥 났다.
그리고,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벌칙 내용이 나타난 것이다.
<이제부터 각 저장 시점은 한 번밖에 저장되지 않습니다. 회귀 후 새로운 저장 시점이 생성되기 전에 죽게 되면, 회귀할 수 없습니다.>
다행히 능력이 봉인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벌칙도 작은 게 아니었다.
저장 시점이 이제부터 1회 용이 된다는 말이었다.
결국, 한 시점에 두 번 죽으면 그대로 끝이라는 소리였다.
이어서, 벌칙 밑으로 메시지가 추가되었다.
<벌칙은 경험치가 누적되면 사라집니다. 앞으로도 편법은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가.
벌칙을 없앨 방법이 있다니.
하지만, 메시지가 말하는 경험치를 얻으려면 정말 위험한 싸움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마왕도 막막한데 이런 페널티라니.
거기다, 이번에 나타난 메시지 창은 전과 다른 느낌이었다.
전에는 기존에 입력해둔 자동 메시지라면, 이번에는 서비스 센터의 답변처럼 느껴졌다.
이건, 단순한 능력이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 대답을 하는 상대가 있었다.
나는 메시지 창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에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곳이 어디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제국 수도의 성벽 안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교단 본부로 가는 길.
나는 발레아와 제국 2 황자와 함께 교단 본부로 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너무 오래 벽에 기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발레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고, 비쩍 마른 2 황자도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는 중이었다.
“좀 전에 다쳤던 겁니까?”
황자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황자가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내가 회귀한 이 시점은 감옥에 갇힌 황자를 구한 바로 뒤였다.
예언가와 그녀의 호위, 그리고 황궁 집사장까지 죽인 뒤, 황자를 구한 바로 그 시점.
나는 이 시점을 저장해 놓았었다.
이 뒤에 많은 일 들이 있었다.
황제가 죽고, 좀비 거인 마물 왕을 처리하고, 많은 싸움 끝에 마왕까지 만나고…….
이 뒤에도 저장 시점을 저장하라는 메시지가 몇 번이나 더 나왔었지만, 모두 거절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잘한 일이었다.
말도 안 되게 강한 마왕을 생각하면 지금 시점도 아쉬울 따름이었다.
어쨌거나 시간은 있었다. 회귀도 남아 있고.
물론 그 회기가 1회 한정이지만.
다행히 그 1회 한정 시점도 벌칙을 풀지 않고 늘일 방법이 있었다.
다만, 지금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황자에게 괜찮다고 말한 뒤, 걱정하는 발레아의 손을 잡았다.
내가 갑작스럽게 손을 잡자, 발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발레아의 양손을 잡은 채로 그녀에게 말했다.
“다녀왔어요.”
엉뚱한 내 말에 발레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표정은 점차 다른 표정으로 변해갔다.
그녀도 내 말의 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환한 미소가 발레아의 얼굴 전체에 퍼져나갔다.
“어서 오세요.”
역시, 발레아는 이 시점에도 알고 있었다.
내가 회귀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녀가 알아차리는 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발레아는 똑똑했다. 그녀는 원한다면 모든 이들을 속일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계속 내 옆에서 지켜보았으니, 언제가 되었건 들킬 수밖에 없었다.
그게 내 생각보다 훨씬 빨랐을 뿐이었다.
더구나, 전생을 기억하는 나와 달리, 그녀는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것에 대한 고정관념이 없었다.
그녀가 보았을 때, 내 회귀 능력은 각성자의 또 다른 능력일 뿐이었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시간이 나면 전부 말해 줄게요.”
회귀 능력을 알게 된 이상, 모두 말해 줄 생각이었지만, 내 말에 발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말해도 돼요. 아니, 말 안 해줘도 괜찮아요.”
발레아는 내가 그녀에게 비밀을 이야기한 것만으로도 기쁜 모양이었다.
앞에서 황자가 우리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고,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짧은 대화였지만, 오랜 세월 비어 있었던 가슴 한 곳이 채워진 것 같았다.
‘그동안, 외로웠던 걸까?’
아마도 그랬을 터였다. 감정을 닫아건 것도 그래서였을 테고.
따지고 보면, 나도 마왕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계속 뭔가 가슴이 가득 찬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은 할 일이 있었다.
나는 황자와 함께, 교단의 대주교를 만났다.
대주교 조아나는 내가 황자를 데리고 온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하지만, 그 놀람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바로 안정을 되찾았다.
“샤를 백작님께서 하신 거니, 뜬금없이 2 황자님을 구해와도 놀랄 일은 아니죠. 백작님께서 내일 당장 마물 왕을 잡았다고 하시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조아나의 말에 발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듯, 대주교의 응접실에서 발레아와 조아나, 두 여성은 여유롭게 담화를 이어갔지만, 다른 한 사람은 그렇지 못했다.
감옥에서 구출되어, 교단에서 치유를 받고, 목욕과 식사까지 마쳐서 어느 정도 옛 모습이 돌아온 2 황자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황제가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사람들을 꾀기가 쉽지 않겠어.”
그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니, 벌써 황제에게 복수할 방법을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알게 될 일이었지만, 먼저 알려 주었다.
“내일 새 황제가 마물 왕들을 직접 처리하기 위해 친정을 떠날 겁니다. 사람들을 섭외하시려면 황제가 떠난 뒤에 하시면 될 겁니다.”
내 말에 2 황자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전에도 보았지만, 복수를 갈구하는 그의 눈은 꽤 무서웠다.
“정말인가?”
“틀리지 않을 겁니다. 믿을 만한 곳에서 들은 겁니다.”
내 말에 원래 정보망 중 한 명인 조아나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발레아는 찻잔을 든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믿을 만한 곳이에요.”
발레아까지 확답하자, 황자는 눈을 빛냈다.
“그럼, 내일까지 준비를 해 놓아야 하겠군.”
황자는 조아나에게 필기도구와 손님방을 빌린 뒤,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미리 섭외 명단을 만들 모양이었다.
“백작님의 말대로라면, 내일부터 바빠지겠네요.”
대주교 조아나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황자도 내일부터 바빠지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발레아와 저는 내일까지 다녀올 데가 있습니다. 그동안 황자를 부탁합니다.”
“어디를 가시는데요?”
조아나의 물음에 나는 먼저 발레아에게 양해를 구했다.
“괜찮죠?”
“네. 저야 아무 문제 없어요.”
발레아는 괜찮았지만, 사실, 나는 꽤 피곤한 상태였다.
회귀한 당일이라 정신도 힘들었고, 큰 싸움 뒤라 몸도 피곤했지만,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나는 조아나의 말에 대답했다.
“봉인지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네? 봉인지요?”
내 말에 조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지금 교단에 봉인지로 향하는 공간 이동진은 없는데요…….”
조아나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공간 이동진은 필요 없었다.
나는 바로 발레아에게 말했다.
“먼저 가서 바로 부를게요.”
이번에는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겠지만, 발레아는 신뢰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릴게요.”
발레아가 준비를 끝낸 것을 확인한 뒤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쪽, 봉인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셀린의 신전을 떠올렸다.
“전송.”
조아나와 발레아의 놀란 얼굴을 마지막으로 세상이 일그러졌다.
그 뒤에 수많은 광경이 포개졌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다른 장소에 서 있었다.
봉인지에 있는 폐허가 된 셀린의 신전이었다.
무너지고, 파괴된 지하 신전은 저번 삶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 온 시간은 달랐다.
몇 개월이나 빨리 온 것이었다.
나는 바로 서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한 여성을 떠올렸다.
“소환 발레아.”
내 말이 끝나는 순간,
화악.
발레아가 나타났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설마 여긴 셀린 신전인가요?”
발레아는 바로 알아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셀린 신전이에요. 발레아에게 설명할 게 많아요.”
앞으로의 일은 발레아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사실, 죽기 전에는 이렇게 빨리 일을 진행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회귀한 뒤에도 ‘장비 소환’ 능력으로 사람을 이동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고.
물론, ‘장비 소환’으로 본인의 전송과 다른 사람을 공간 이동시키는 것은 능력이 강화된 것이 아니라 개념을 확장한 것에 가깝긴 했다.
하지만, 개념만 깨달았다고 이렇게 쉽게 봉인지까지 공간 이동이 될 리가 없었다.
나는 발레아가 반가운 얼굴로 무너진 신전을 보는 동안, 정보창을 열었다.
< 기사형 영웅 능력자 >
< 사용 능력 >
- 육체 최적화 : 레벨 (50/?)
- 마나 회로 구축법 : 레벨 11
- 마나 감응력 : 레벨 11
- 장비 소환 : 레벨 3
- 마나 방출 : 레벨 3
< 비인가 능력 >
- 마나 유형화 : 레벨 4
- 사자 회귀 : 레벨 5 (벌칙 중)
-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 봉인 해제 중(0/3)
< 능력 부여 >
- 상태 보정 : 한계 이상의 신체
좀 전에 보고 깜짝 놀랐던 정보창이었다.
정보창은 죽기 전과 달라져 있었다.
물론, 과거로 돌아왔으니, 정보창이 전과 같을 리가 없겠지만, 문제는 이 정보창은 레벨이 낮아진 게 아니라, 더 올라있었다.
더구나, 저 망가진 글귀는 좀비 거인 마물 왕의 머리에 박혀 있던 검 파편을 얻은 뒤에 생겨난 것이다.
숫자는 다시 0 이 되었지만, 이 시간대에는 있을 수 없는 능력이 생겨난 것이다.
결국, 이건 모두 한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과거로 돌아와도 내 능력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내 경험도, 힘도, 능력도 죽기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거기다, 마지막 싸움으로 얻은 경험 때문에 능력은 더 올라가 있었다.
이건 사자 회귀 레벨이 올라 생긴 새로운 능력이 분명했다.
‘벌칙만 없었으면, 무한히 강해질 수 있었을 텐데…….’
이건 정말 아쉬웠다.
좀 더 일찍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어쨌거나, 이건 큰 도움이었다.
이제는 벌칙인 1회 한정 시점을 해결해야 했다.
시점이 1회 한정으로 바뀌었다면, 다음 시점을 빨리 만들어 놓으면 그만이었다.
그 와중에 경험치를 얻어놓으면 더 좋고.
나는 저번 삶에서 자동 저장 시점이 발동했던 곳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마물 기사와 해골을 죽였을 때였다.
발레아와 나는 셀린 신전을 빠져나와 마물 기사와 해골이 있는 황궁터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