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7화
제17편 마왕 (3)
검에서 빛이 터져 나오는 순간, 나는 이번 삶이 끝났다고 생각했었다.
그만큼 강력한 마나였고, 그만큼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빛이 사라진 뒤에도 나는 살아 있었다.
온몸에 고통이 가득했지만, 아직 팔다리가 온전히 움직이고, 몸에 구멍이 뚫리지도 않았다.
다만, 손가락 하나가 타는 듯이 아파 확인해 보니,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유물 반지는 까맣게 타버렸다.
그동안 방어막을 만들어 나를 지켜주었던 유물 반지였는데…….
이번 마왕의 공격은 너무 강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손을 털어 타버린 반지를 털어버리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는 처음 보는 집의 침실에 처박혀 있었다.
반대쪽 벽이 전부 무너져 있었다.
아마도 내가 저 벽을 부수고 들어와, 이 침실에 처박힌 모양이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몸을 살펴보니, 부러지고, 잘려 나간 곳은 없었지만, 멀쩡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 장비들은 무사히 내 몸에 걸려 있었다.
나는 쥐고 있던 대검을 등에 걸고, 허리에서 신검을 꺼내 들었다.
신검에 마나를 밀어 넣으니, 신검에서 변형된 마나가 다시 내 몸에 흘러들었다.
몸이 빠르게 좋아졌다.
이 치유 능력 때문에 신검은 꼭 가지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부서진 벽을 통해 집 밖으로 나왔다.
집 밖으로 나와보니, 멀리 박살 난 성벽이 보였다.
그토록 높고 튼튼한 성벽이 수십 미터 이상 무너져 있었다.
무너진 것은 성벽만이 아니었다.
성벽 안쪽 바닥까지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마왕의 공격은 성벽을 부수고도 저런 구덩이를 만든 것이다.
전술 핵탄두가 터졌으면 이런 광경일까?
정말 엄청난 광경이었다.
이런 공격 속에서 반지의 방어막만으로 내가 이렇게 무사했을 리가 없었다.
전부 발레아 덕이었다.
검이 성벽에 충돌하며 빛이 터지는 순간, 내 앞에서 벽이 솟구쳤다.
발레아가 성벽을 변형해 벽을 만든 것이다.
그 순간, 나도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성벽 안쪽으로.
마왕의 공격에 발레아가 만든 벽이 터져나가는 동안 다른 벽이 다시 솟구치고, 그 벽도 동시에 터져나갔다.
그렇게 벽들이 터져나가고, 성벽 너머로 몸을 날렸던 나도 결국 그 빛에 휘말려 버렸다.
그 결과, 나는 이렇게 한참 떨어진 도시 외곽의 집에 처박힌 것이다.
“다들 죽었겠지?”
성벽 자체가 사라져버렸으니, 나와 같이 있었던 이들이 살아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사람들에게 피하라고 했지만, 정작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나밖에 없었다.
죽은 그들은 만족했으려나.
목숨을 바쳐서 마왕을 끌어냈으니.
“만족했을 리가 없지.”
짝!
나는 손바닥으로 뺨을 갈기는 것으로 머저리 같은 생각을 털어버리고, 검을 뽑아 들었다.
박살 난 성벽 쪽에서 갑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마왕이었다.
그들이 목숨을 바친 것은 나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 믿음에 보답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죽음은 개죽음일 뿐이었다.
다시 회귀한다고 해도 그건 달라지지 않았다.
모두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나는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걸어오는 마왕을 보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발레아는 괜찮아요?”
조금 전 발레아는 마왕의 공격을 영역으로 막아 냈었다. 그녀도 영역으로 이 정도 공격을 막아 낸 것은 처음일 터였다.
당연히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계속 도울 테니,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다행히 바로 지면으로 발레아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크게 숨을 몰아쉬고, 마왕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박살 난 성벽을 넘어, 마왕은 천천히 도시로 들어왔다.
그가 다가올수록, 엄청난 마나가 나를 향해 밀려왔다.
아니, 그런 엄청난 공격을 해 놓고, 저런 무시무시한 마나라니.
아무리 봐도 실력 차이는 확연했다.
마물 왕들을 쓰러뜨리고, 제국의 검호들을 쓰러뜨리며, 나는 지금 이 대륙에서는 내가 제일 강할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다가오는 마왕을 보니, 그런 생각들이 얼마나 우스운 것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인간 사이의 최강자이거나, 마물 왕을 단신으로 쓰러뜨린 인간이라는 타이틀은 저 마왕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이해가 안 갔다.
마물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왔다고 해도 어떻게 저렇게 강해질 수 있는 것인지.
파편들의 기억을 훔쳐본 바로는 그 세상이 있었던 시기도 수십 년 이상은 아니었다.
정말, 그는 희대의 천재였던 걸까?
아니면, 처음 만들어진 용사는 다른 용사와는 다른 존재였던 걸까.
마왕이 어느 정도 다가오자, 이제는 온몸에 압박감이 느껴졌다.
분명 나에게 마나를 쏟아붓고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런 압력이라니…….
나는 입술을 깨물며 마나를 가득 피워올렸다.
타탁, 타탁.
피부 위에서 스파크가 튀어 오르더니, 조금씩 내 몸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몸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마왕의 마나를 밀어낼 수 있었다.
저렇게 먼 곳에서 생각 없이 흘리는 마나를 전력으로 막아 내는 데도 몸 주위를 벗어나지 못하다니…….
마나의 격차에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어쨌거나 마나를 밀어내자, 압박감은 사라졌다.
마나가 밀려나자, 마왕이 걸음을 멈추었다.
나와는 백 미터 이상 떨어진 거리.
하지만, 마왕에게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닌 듯했다.
그는 잠시 나를 지켜보더니, 입을 열었다.
“재미있군. 내 공격을 버텨 낸 건가?”
기억에서 들었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그 정도 실력이라니. 다행히 인간들의 실력은 수백 년 동안 쇠퇴만 한 게 아니었군.”
마왕은 마음대로 나를 평가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지금 덤볐다가는 그대로 죽게 될 터였다.
차라리, 그가 떠들게 놔두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그냥 듣고 있는 것도 내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럼 당신은 늙어서 피부가 그 모양인 건가? 마왕도 자기 몸 흉한 것은 남에게 보여 주기 싫었던 모양이지? 그렇게 꽁꽁 싸맨 것을 보니.”
이런.
말을 해 놓고,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적나라한 말이었다.
감정이 사라졌다는 마왕이지만, 이런 팩트 폭력은 참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마왕이 그 자리에 선 채로 검을 휘둘렀다.
휙. 휙. 휙.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좌우로 검을 내질렀다.
검이 휘둘러지는 순간, 검에서 마나가 튀어나왔다.
‘설마, 마나 방출?’
확실했다. 속도도 마나양도 달랐지만, 능력은 같았다.
여태껏 내가 써왔던 바로 능력이었다
펑. 펑. 펑.
공기가 터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마나들은 순식간에 내 앞까지 다가왔다.
엄청난 속도였다.
공기가 터지는 소리보다 마나가 먼저 도착한 것을 보니, 음속을 넘어선 게 분명했다.
나는 마나를 피해 몸을 날리며 대검을 비스듬하게 휘둘렀다.
눈으로 확인하고 검을 휘두른 게 아니었다.
마나를 느끼는 내 ‘마나 감응력’과 내 감각을 총동원해서 마나에 대검을 가져다 댔다.
카아앙. 카앙. 카아앙.
다행히 타이밍이 늦지는 않았다.
마나들은 대검의 날을 타고 비스듬히 좌우로 튕겨 나갔다.
“큭.”
제대로 튕겨냈는데도 충격이 엄청났다.
나는 몇 미터나 뒤로 밀려났고, 뒤쪽의 건물들이 반으로 잘려 나가 허물어지는 게 느껴졌다.
콰아앙. 콰아앙.
겨우 몸을 가누고, 급하게 마왕을 확인했다.
마왕은 그 자리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마왕은 담담하게 말했다.
“검술 실력도 괜찮군. 역시, 운이 좋은 게 아니었어.”
마왕은 내 말에 화가 난 게 아니라, 단지 시험을 해 본 것처럼 보였다.
젠장, 입맛이 썼다.
어린아이 장난에 필사적으로 몸을 비트는 개미가 된 기분이었다.
“제대로 찾은 것 같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겠지.”
마왕은 검을 내리고, 누군가를 불렀다.
“현자.”
지혜로운 사람이라니. 뭔가, 특이한 이름이었다.
마왕의 말이 끝나자, 마왕의 뒤에 인영이 나타났다.
로브를 둘러쓴 2m가 훌쩍 넘는 마른 이족 보행 마물(?) 이었다.
로브를 둘러쓰고 있어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로브 밖으로 보이는 저 체형은 인간으로 보기 어려웠다.
분명 저 로브 인영은 허리가 완전히 굽어진 이상한 형태의 인간형 마물이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없었던 마물이었다.
투명 능력을 쓰더라도 마나를 느끼는 나는 알 수 있었다.
마나도 지금 나타난 것을 보면, 이 마물은 공간 이동을 한 것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마물은 나타나자마자 인간의 말로 마왕에게 말했다.
인간의 말이었지만,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잠자리 날개가 떠는 듯한 목소리. 망가진 테이프에서 나는 듯한 목소리였다.
마왕은 개의치 않고, 검으로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인간이 네가 말하던 실력이 나쁘지 않다는 인간이 맞나?”
“네. 맞.습.니.다. 저. 인.간.이. 제.가. 확.인.한. 가.장. 강.한. 인.간.이.었.습.니.다.”
텔레파시도 아니고, 인간의 말을 하는 마물이라니.
마왕도 저 마물을 ‘현자’라고 불렀고.
설마, 저 마물이 마물들을 인간의 군대처럼 통솔해온 마물일까?
“수고했다. 다시 세웠다는 제국은 영 별로였는데, 이번 상대는 괜찮은 것 같군.”
“감.사.합.니.다. 그.럼. 편.히. 즐.기.시.기.를.”
로브를 둘러쓴 마물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사라졌다.
인간의 말을 하는 것도 그렇고, 발레아의 영역에서 저렇게 쉽게 공간 이동하는 것을 보니, 평범한 마물이 아니었다.
저 마물은 또 다른 마물 왕일지도 몰랐다.
나는 마물의 모습과 음성을 기억해두었다.
“그럼, 시작해볼까. 이번에는 제국 수도라는 곳처럼 지루하지는 않겠지.”
마왕이 검을 늘어뜨리고, 다시 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공기가 바뀌었다.
세상을 가득 짓누르던 마나가 들끓기 시작한 것이다.
가만히 있다가는 당할 뿐이었다.
나는 대검을 고쳐 쥔 뒤, 반대쪽 손에 신검을 쥐고, 마왕을 향해 몸을 달렸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내 모든 기술과 능력을 써서 마왕을 상대했다.
무기를 던지고, 소환하고, 검기를 뽑아 후려치고, 마나 방출과 알고 있는 모든 심법을 사용해서 마왕과 싸워나갔다.
위험할 때는 발레아가 지형을 움직여 나를 도와주었고, 환상까지 써서 마왕의 눈을 가리려 했다.
하지만, 마왕은 그 모든 공격을 여유 있게 받아쳤다.
내 공격을 전부 피하고, 되받아쳤고, 그의 모든 공격은 내 몸에 남게 되었다.
신검이 없었다면, 예전에 끝났을 싸움이었다.
아니, 마왕이 봐주지 않았으면, 첫수에 목숨이 날아갔을 터였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신검의 치유 능력은 점점 약해졌고, 발레아의 도움도 점점 줄어들었다.
결국, 한쪽 다리가 잘려 나가고, 팔 하나가 끊어지자, 신검의 치유 능력도 끝이 났다.
뒤로 넘어지는데, 뒤에서 누가 나를 받쳐주었다.
부드러운 몸이 나를 껴안았다.
발레아였다.
나는 그녀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발레아가 머리를 내 등에 파묻으며 말했다.
“보지 말아요. 옷도 얼굴도 엉망이에요.”
그녀가 말하는 동안, 등이 점점 젖어갔다.
옷이 붉게 물들어갔다.
전부 발레아가 흘린 피였다.
“이런 몰골을 보여 줄 수 없어서, 나올 수 없었어요.”
발레아는 마왕의 첫 공격에 이미 큰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빨, 빨리 신검으로…….”
“아뇨. 영역이, 마나가 망가졌어요. 치유 능력으로 고칠 수 없어요.”
그녀는 그런 상처를 숨기고 나를 도와준 것이다.
“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신검을 움켜쥐었다.
발레아는 편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곧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죠?”
암, 만날 수 있고말고.
“그때, 나도 기억했으면 좋았을 텐데…….”
고통 속에서도 나는 깜짝 놀랐다.
설마. 발레아도 알고 있었던 걸까?
그때, 마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미있군. 마지막 순간에 함께하는 연인이라니.”
마왕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 앞에 와 있었다.
“여자에게 미안하지만, 네 원대로는 되지 않을 거야.”
마왕은 발레아에게 사과하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렇게 좋은 소재를 만났는데, 그냥 죽게 놔둘 수는 없지. 부하로 만든 황태자가 죽은 것 같은데, 대신 너를 써야겠어.”
그가 내 목 대신 팔다리를 자른 것은 나를 살려놓기 위해서인 듯했다.
마왕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다가오는 그의 손에서 마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상황.
남은 손에 검을 쥐고 있었지만, 마왕의 손을 자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이건 안 하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발레아에게 말하며 힘껏 검을 휘둘렀다.
“잠시 뒤에 만나요.”
“네.”
서걱.
발레아의 대답과 함께 내 목이 잘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잘린 내 머리가 돌고 있는 거겠지.
조금은 커진 마왕의 눈이 보이고, 이어서, 목이 잘린 내 몸을 껴안은 발레아가 보였다.
그리고, 시야가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