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6화
제16편 마왕 (2)
벌판에 가득한 마물 가운데 작은 인간이 서 있는데도 성벽 위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그에게 모일 수밖에 없었다.
“저건 아무리 봐도 사람이 아닌 데요…….”
긴장한 미겔의 목소리가 모두의 마음을 대변했다.
마물 떼 안에 홀로 서 있는 갑옷을 두른 인간은 기세만으로 그를 본 모든 인간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사실 단순한 기세가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한 마나가 그를 두렵게 만든 것이다.
수많은 마물의 마나를 오히려 뒤덮는 강대한 마나.
다른 마물 왕의 마나들도 그의 마나에 비할 수 없었다.
도시에 펼쳐져 있는 발레아의 영역과 황실 창고에서 꺼낸 유물들이 없었다면, 평범한 병사들은 두려운 게 아니라, 미쳐버렸을지도 몰랐다.
마왕이 선두에 나오니 마왕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낡은 갑옷으로 온몸을 두르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의 몸은 갑옷에 꽁꽁 싸여, 겉에서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갑옷 아래의 피부는 마나 충돌로 뭉그러져 있다는 것을.
마왕이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찌릿!
성벽 위에서 마왕을 살피던 이들이 놀라 뒤로 몸을 뺐다.
마왕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이런 기세를 느끼게 되다니…….
마왕의 몸에 빙의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마왕은 잠시 이쪽을 보다가 손을 들어 올렸다.
평범한 동작이었지만, 우리는 모두 마왕의 치켜든 손을 바라보았다.
마왕은 치켜든 손을 앞으로 뻗었다.
성벽을 향해. 우리를 향해.
그리고, 마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앙!
크륵, 크륵.
케엑, 케엑.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마물 군단이 모두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피투성이 늑대들이 앞으로 내달렸다.
거대한 벌레들이 꿈틀거리며 다가왔고, 거대 마물들이 성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마물이 각자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고, 성벽을 향해 진군했다.
거대한 해일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이게 진정한 마물들의 파도, 마물 웨이브였다.
지축을 울리는 마물들의 괴성 속에 우고 기사의 담담한 말이 들려왔다.
“마지막 싸움이 되겠군.”
그의 말에 미겔이 씩 웃었다.
“이런 자리가 마지막이라면, 기사의 마지막으로는 최고인데요.”
“그게 그렇게 되나.”
우고도 마주 웃고는 검을 다시 쥐었다.
다른 기사들도 피식 웃은 뒤, 모두 검을 뽑아 들었다.
그들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 앞에 미겔이 나서서 검을 가슴에 대고 내게 말했다.
“주군으로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항상 즐거워 보이던 그의 얼굴에는 진심만이 담겨 있었다.
척. 척. 척.
미겔의 말에 이어 다른 기사들도 가슴에 검을 대고 말했다.
“영광이었습니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병사들도 창을 세우고 그들의 말을 따라 했다.
“영광이었습니다.”
이 성벽 위에 있는 모두가 내게 마지막 경례를 한 것이었다.
이렇게 모두 경례했지만, 경례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영광이었습니다.”
“영광이었습니다.”
이 성벽에서 시작된 외침은 양옆의 성벽에서도 들려왔고, 텅 빈 도시에서도, 성문에서 반대편 성벽까지 계속 이어졌다.
뜻밖의 인사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나는 이런 인사를 받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동안 내가 한 모든 일은 나를 위해서 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영지를 부흥시킨 것도, 식량을 쌓고, 병사들을 훈련한 것도.
마지막까지 모두와 함께 이곳에 남아 마왕을 맞이한 것도.
반복하는 내 삶을 위해 해온 일일 뿐이었다.
나는 이 영지에 남게 된 이들에게 미안했고, 이들이 마지막까지 도망가지 않아서 감사할 뿐이었는데…….
잠시 멍하니 그 광경을 보고 있자, 옆에서 발레아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꽤 멍청한 표정이 된 모양이었다.
나는 표정을 다잡고, 검을 뽑아 들어 가슴 앞에 세웠다.
그리고, 나는 마나를 담아 말했다.
“나도 모두에게 감사한다. 곧 다시 만나면 내가 모두에게 술 한 잔을 사지.”
내 목소리가 마나를 타고, 도시 전체로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내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그들은 죽어서 다시 만날 때를 이야기한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정말 다시 만날 때 모두에게 감사를 표할 생각이었다.
해일같이 마물들이 밀려오고 있지만, 도시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저도 영광이었어요. 그럼, 이따가 봐요.”
발레아도 내게 손을 흔들고는 성벽 아래로 스며들었다.
거대한 해일이 점점 다가왔다.
마물들의 괴성과 발소리가 귀를 때렸다.
모두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갈 때, 우고 기사가 검을 치켜들고 외쳤다.
“마지막 싸움이다! 모두 버텨라! 마왕이 움직이게 해야 한다!”
이런 마물 대군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마물 군단에 휩쓸려 끝내는 것이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목적일 리도 없었다.
이곳에 남아 있는 이들의 목표는 한가지였다.
바로, 마왕이 움직이게 하는 것.
그리고, 마왕과 내가 싸우게 하는 것.
그들은 내게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다.
내가 부탁한 것이었고,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은 것도 나였다.
헛된 희망에 가까웠고, 복권 확률보다도 낮은 확률이었지만, 그들은 믿고 있었다.
내가 뭔가 보여 줄 것이라고.
그리고 난 보여 줄 생각이었다.
이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었다.
“와!”
“싸우자!”
병사들과 기사들이 우고의 말에 힘차게 소리를 질렀지만, 그 소리는 마물들의 괴성에 묻혀버렸다.
이어서, 마물들이 성 아래에 도착했다.
쿵. 쿵. 쿵.
엄청난 소리와 함께 성벽이 흔들렸다.
끼이이익.
동시에 두꺼운 강철로 만든 성문에서도 철이 우그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대검을 빼 들고, 크게 외쳤다.
“성문 쪽은 내가 간다!”
“제가 따르겠습니다.”
나는 뒤에서 미겔이 따라오는 것을 느끼며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성문 앞에 마물이 가득 모여 있었다.
전에 봤던 돌 거인뿐만 아니라, 게를 닮은 거대한 마물들도 같이 성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나는 대검에 마나를 가득 모은 뒤, 힘차게 지상을 향해 휘둘렀다.
‘마나 방출’.
많이 쓰지 않아 다른 능력보다 레벨이 낮았지만, 상관없었다.
부족한 능력은 내 강력한 마나와 심법으로 충분히 채울 수 있었다.
더구나, 다른 이들과 달리, 나는 내가 쏘아내는 마나를 볼 수 있었다.
어느 곳으로 쏘아내야 할지, 얼마나 쏘아야 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콰앙!
폭음과 함께 대검에서 마나가 뛰쳐나갔다.
거대한 선이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퍼억!
선에 걸린 돌 거인과 게 마물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잘려 나갔다.
한순간에 성문 앞이 텅 비어 버렸다.
“저도 좀 남겨 주시죠!”
내 뒤에서 성벽을 타고 내려오던 미겔이 내게 소리쳤다.
나는 웃고 말았다.
어차피 싸울 마물은 가득했다.
방금 비워낸 성문 앞도 내가 바닥에 내려서는 동안 다시 채워졌다.
쿵.
바닥에 내려서 보니, 뒤쪽의 성문을 제외하면 사방에 마물이 가득했다.
나는 달려오는 마물들을 향해 힘차게 대검을 휘둘렀다.
시간이 지나고, 성문 앞에 마물들이 가득 쌓여갔다.
나는 틈나는 대로 성문을 미겔에게 맡겨두고, 위험한 곳을 도와주었다.
성벽에 올라가 마물들을 베어내고, 다른 성문을 돕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 혼자의 힘으로는 쏟아지는 마물 군단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성벽 일부가 함락되어 마물들이 도시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다른 쪽 성문도 부서져 마물들이 도시로 쏟아져 들어왔고.
너무 심한 공격들이라 발레아도 전부 대응하기가 힘들었다.
부서진 성문은 발레아가 아예 막아버렸지만, 이미 도시로 들어와 흩어진 마물들은 처리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마물들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마물들이 들어간 건물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쾅! 쾅!
도시 곳곳에서 화염이 치솟고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이 폭발들은 도시에 남아 있던 병사들과 지원자들이 한 일이었다.
마나를 사용하는 귀족과 기사들 때문에 화약을 사용하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화약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얼마 없는 화약을 계속 모아왔고, 얼마 전 그 화약을 도시에 남은 병사들과 지원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도시에 마물들이 들어오면 그 화약으로 건물을 무너뜨리라는 지시와 함께.
화약에는 마나가 담기지 않아, 마물이 상처를 입지는 않겠지만, 건물에 묻혀버린 마물들이 쉽게 빠져나오기는 어려울 터였다.
잘하면 건물에 묻혀 죽을 수도 있고.
사실, 마물을 잡는 것은 부차적이었다.
그들에게 폭탄을 안겨주어 건물을 부수게 한 것은 도시 지하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도시를 폐허로 만들어 도시가 비었다는 것을 숨길 생각이었다.
자폭한 이들은 폐허가 된 도시에 남아 있던 영지민들로 보일 테고…….
잘 될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았다.
모두 내 만족을 위해.
외곽의 건물들이 차례로 무너져 마물들의 진입을 막자, 마물들이 넘어오는 게 더뎌졌다.
진입이 막히자 성벽 위의 싸움은 더욱 치열해졌고, 더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병사들도, 기사들도.
반대쪽 성벽과의 연락도 끊어지고, 후안의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내가 성벽 위에 올라온 뒤로, 성문을 지키고 있던 미겔도 마물들에 파묻혀 더는 보이지 않았다.
“물러서지 마! 한 마리라도 더 잡아 죽여!”
피투성이가 된 우고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턱 한쪽이 깨져나간 탓에 그의 목소리는 귀에 마나를 집중해야 겨우 들을 수 있었다.
우고도, 아직 살아 있는 다른 이들도 이미 죽은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모두 죽어가며, 마물을 막아 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마물에 휩쓸려 모두가 쓰러질 듯이 보일 때, 한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왕이……. 마왕이 움직였다!”
덤벼오는 마물의 목을 잘라버리고, 나도 성벽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기사의 말이 맞았다.
성벽에 달라붙어 있던 마물 무리가 좌우로 갈라져 길을 만들고 있었다.
처음 마왕이 등장했을 때 보여 주었던 길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싸우는 도중에 이런 통제가 가능하다니.
이건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됐다! 마왕이 움직였다!”
“다른 마물들을 막아! 영주님과 마왕의 싸움에 다른 마물들이 끼어들지 못하게 해!”
우고도, 다른 기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마물들을 밀어냈다.
덕분에 내 주위에는 마물들이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마왕의 길은 똑바로 내가 있는 성벽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있는 성벽으로는 더는 마물들이 올라오지 않았다.
마물들이 물러서자 기사들은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대신 마왕은 점점 속도를 올렸다.
천천히 달리다가, 이제는 포탄처럼 쏘아졌다.
다가오는 마왕과 함께 마왕 주변의 마나가 점점 거대해져 갔다.
딱 봐도 불길한 마나.
나는 고함을 질렀다.
“모두 피해!”
내 말에 주변의 기사들은 웃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도대체 어디로 피하냐는 표정들이었다.
하긴, 피할 데가 없었다.
그리고, 너무 늦었다.
성벽에 다가온 마왕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마왕의 손에 들린 검에서 거대한 빛이 솟구쳤다.
그의 손에서 성벽보다 더 거대한 빛의 검이 생겨났다.
나는 그 검을 보고, 제국 수도의 성벽을 마왕이 부숴버렸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때도 이 능력을 썼던 걸까?
마왕은 빛의 검을 아래로 내려쳤다.
콰아아앙!
검이 성벽과 부딪쳤고, 세상에 빛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