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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천재는 무한리셋 중-465화 (465/563)

제465화

제15편 마왕 (1)

레스티가 가져온 포위망 바깥쪽의 상황은 내 예상 이상으로 암울했다.

카를로스 왕국 수도는 이 영지가 포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물들에게 점령당했다.

여왕도 공작도 소식이 끊어져서 생사를 알 수 없었고, 다른 귀족들과 백성들도 수도가 점령당할 때, 거의 다 목숨을 잃은 것 같았다.

소식이 끊어졌다는 말에 한 가닥 희망을 품어보긴 했지만, 그런 상황에서 어린 여왕도, 공작도 살기는 어려울 듯했다.

마물들에게 점령당한 것은 수도만이 아니었다.

왕국의 동부도 남부도, 서부도 이미 마물의 공격에 휩쓸려 버린 듯했다.

그리고, 북쪽까지.

“이곳에 오면서 공국이 멸망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잘 막아 내었던 공국은 제국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마왕과 그의 마물들에게 멸망했다.

레스티는 공왕과 공녀에 대해 따로 말하지 않았지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외부의 소식을 들을수록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회귀하면 다들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친한 이들의 죽음을 보고 듣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이었다.

나는 우울해하는 대신에 레스티를 칭찬했다.

“그래도 대단하군. 이런 상황에서 교인들을 피난시키다니.”

내 칭찬에 레스티는 울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신도들도 얼마 구하지 못했습니다. 교단의 공간 이동진까지 썼지만, 제대로 대피한 교인은 수백 명 정도입니다.”

교단에게 이단이라고 불리는 셀린의 교인들이 교단의 공간 이동진으로 피난을 가게 되다니.

다른 때였으면, 재미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 테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아마도 교단 대주교, 조아나가 직권으로 일을 벌였을 터였다.

교단의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 문제시할 게 분명했지만, 이제는 의미 없는 일이었다.

문제시할 교단의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도 별로 없으니…….

더구나, 황자와 피난을 떠난 조아나도 내 누이와 함께 소식이 끊어진 모양이었다.

남쪽의 작은 나라들이 아직 남아 있지만, 그들이 버티는 것도 잠깐일 뿐이었다.

“수백 명밖에 안 된다고 했지만, 그들을 피난시킨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야.”

적은 수나마 교인들을 구한 레스티에 비해, 나는 내 영지민들도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봉인지에서의 묶여 있던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이지만, 그것만으로 내 영지민들이 이곳에 갇힌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동안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언제가 되었건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알고 있으면서 영지민들을 너무 안일하게 방치한 것이다.

그러면서, 내 회귀가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기를 바라고만 있으니…….

되돌아보면 이번 삶은 영주로서 욕먹을 만했다.

“결국, 나는 이번 삶은 포기하고 있었던 걸까…….”

제국인들과 조직에게 내 정체가 밝혀지는 것을 개의치 않고, 영지에서도 싸울 준비만 하고 피난시킬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모르는 사이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따지고 보면, 매번 없어질 삶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일이었겠지.”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이어서, 내가 죽은 뒤에도 세상이 계속 유지 된다면.

결국, 세상은 마왕에게 멸망하게 될 뿐이었다.

반대로, 과거로 돌아가는 게 맞는다면, 없어질 세상에 괜한 심력을 쏟는 것일 테고.

그런데도 남겨지는 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결국, 자기만족일 뿐이겠지.”

하지만, 자기만족이기 때문에 더욱 그만 둘 수 없었다.

나 자신을 위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지쳐 쓰러졌던 발레아를 최대한 싸움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이런 성 방어전에서는 발레아의 영역이 훨씬 효율이 높고, 마물을 막으려면 나는 그녀보다 몇 배나 뛰어다녀야 했지만, 나는 차라리 내 몸을 혹사했다.

그녀가 안쓰러워서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따로 시킬 일이 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 * *

“마물의 대군이 도착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마왕이 온 듯합니다.”

내가 마왕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집무실에서 문서들을 외우고 있을 때였다.

내가 외우고 있던 것은 영지에 관련된 서류들이었다.

황실 금고에 들어 있는 유물 목록과 식량, 병기들의 재고, 죽거나 살아남은 병사와 기사들의 정보까지.

나는 다음 삶에서 유용하게 쓸 만한 것들을 외우고 있었다.

후안의 보고에 나는 문서들을 전부 태워버렸다.

마왕이 왔으니 이 문서들은 이제 필요 없었다.

회귀하게 될 때 가져갈 수도 없고, 혹시라도 마왕을 이긴다면 더욱 필요가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비를 착용했다.

유물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그 위에 건틀릿을 손에 끼웠다.

그리고, 신검을 허리에 차고, 반대편에는 단검을 꽂아 넣었다.

이어 등에는 대검을 메고, 마지막으로 손에는 검은 쇠뇌를 들었다.

처음으로 내가 쓰는 장비들을 몸에 착용한 것이었다.

전에는 유물 주머니에 담아 두고 썼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지금 나는 유물 주머니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나는 후안을 따라, 복도로 나갔다.

복도는 조용했다.

내 감각과 마나 감지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저택 안에는 우리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후안의 어머니도 플로라도 잘 있지?”

“네. 괜찮아 보였습니다.”

“가족과 같이 있게 하지 못해서 미안해.”

내 사과에 후안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영주님의 병사이지 않습니까. 더구나 가족을 지키는 일이니, 여기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후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맞았다.

영지의 기사와 병사들은 영지민과 가족을 지켜야 했다.

그리고 그건 영주도 마찬가지였다.

저택을 벗어나, 나는 텅 빈 도시를 지나갔다.

얼마 전까지 북적이던 도시였지만, 지금은 한적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웠다.

몇몇 골목에 숨어 내게 인사하는 이들은 전부 병사들과 자원한 영지민들이었다.

그들은 마지막 작업을 위해 이곳에 남아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 성벽으로 향했다.

성벽에 도착한 우리는 마지막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후안은 병사들을 지휘해야 했고, 나는 마왕을 마주해야 했다.

아마, 이번 삶에는 후안을 다시 보지 못하겠지.

나는 떠나는 후안의 뒷모습을 보고, 훌쩍 성벽 위로 올라갔다.

나는 중간에 한 번 발로 성벽을 밀어내고 바로 성벽 위에 올라섰다.

성벽 위에 있는 병사와 기사들은 모두 성벽 밖을 내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고와 미겔만이 내가 올라온 것을 바로 알아차렸을 정도였다.

“오셨습니까?”

하지만, 평범하게 말하는 우고의 목소리에 긴장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럴 만했다.

성벽 너머, 영지의 너른 벌판에 마물이 가득했다.

성벽과 거리를 둔, 원거리 능력이나 화살이 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 마물의 진형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지평선까지 다 덮여있는 것 같은데…….”

한 병사의 말대로 계속 모여드는 마물들 때문에 지평선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더 무서운 것은 저 엄청난 수의 마물들은 인간들처럼 진형을 갖춘 채로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건 마물들의 웨이브가 아니라, 대군단이었다.

마물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마물들이 다 모이기를.

그들의 왕이 나서기를.

엄청난 마물 군단을 보고 놀랐던 기사와 병사들은 시간이 지나자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계속 놀라고 있기에는 싸움이 너무 길었었다.

내가 오기 전에도 희망없이 하루하루 살아남았던 이들이었다.

“마왕이고 뭐고 간에, 여기서 살아남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그동안 잘 버틴 거죠. 다른 곳들은 예전에 끝장났다던데요.”

여유로운 대화들이 가볍게 이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엘로이사한테 먼저 청혼하는 건데.”

“맞아. 나도 알레조보다 먼저 로사에게 청혼할 걸 그랬어.”

“누구야! 이런 때에 내 마누라 이야기하는 게!”

가벼운 대화는 짓궂은 농담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말을 하는 사람도 버럭 화를 내는 사람도 결국, 서로를 보며 피식거릴 뿐이었다.

성벽 위는 무척이나 여유로웠지만, 이들의 여유로움은 반쯤 포기한 이들의 여유로움이었다.

어떤 이들은 마지막 남은 술을 들이켜고, 다른 이들은 가족들의 준 액세서리들과 교단의 조각상들을 쓰다듬었다.

그때, 내 옆에서 감탄사가 들려왔다.

“이런 광경을 볼 줄이야. 정말 대단하네요.”

발레아였다.

분명, 어머니와 함께 뒤에 남아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발레아를 쳐다보았다.

발레아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내 옆에 서 있었다.

내가 발레아를 보자, 발레아가 허리에 손을 얹고 입술을 내밀었다.

“흥, 이번에는 알렉스 말을 안 들어줄 거예요.”

그녀의 말에 내가 뭐라고 반박하려 했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나는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전에 저한테 약속한 거 있잖아요.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로. 알렉스와 같이 있는 게 내가 원하는 거예요.”

분명 발레아에게 그런 약속을 하긴 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었고.

한 번도 안 쓰고 있어서 까먹고 있었는데, 이럴 때 말할 줄 생각도 못 했었다.

“어머님도, 저택의 고용인들도, 영지민들도 전부 잘 있어요. 환기 구멍도 잘 확인했고, 비상구도 들키지 않게 잘 만들었어요. 식량도 충분하고 공간도 넓으니, 오래 버틸 수 있을 거예요.”

마물과 싸우는 대신 발레아에게 부탁한 것은 지하 대피소를 만드는 것이었다.

황실 금고 아래, 거대한 지하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 영지민들을 대피시킨 것이다.

답답하고, 힘들겠지만, 우리보다는 훨씬 더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마물들을 피해 살 수도 있을 테고.

입구를 저택 지하 황실 금고로 했으니, 혹시 알아차렸다고 해도 들어갈 수는 없을 터였다.

다만, 만약을 대비해서 황실 금고의 관리인으로 발레아와 함께 오헨 기사도 추가해 놓았는데, 아무래도 그게 문제였던 모양이었다.

발레아가 여기로 온 것을 보면.

“오헨 기사님이 잘하실 거예요.”

나는 발레아를 다시 보내지 않았다.

“이번에는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잖아요. 그렇다면 옆에 있어야죠.”

이번에는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누가 봤건 그건 거짓말이었으니.

그리고, 나도 발레아가 옆에 있기를 바란 것일지도 몰랐다.

“마왕과 싸워야 한다고 했잖아요. 내가 길을 열게요. 나보다 도움이 되는 사람은 없을걸요?”

발레아 말대로 그녀가 제일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고.

나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발레아가 내 팔짱을 꼈고, 우리는 멀리 마물 군단을 바라보았다.

그때, 마물 진영에서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마물들이 동시에 내뱉는 괴성.

크아아아앙!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마물 진영이 쭉 갈라졌다.

마물의 진영에 하나의 선이 생겨났다.

지평선에서 우리 도시까지 이어지는 선.

그 선 위에 한 사람이 올라섰다.

너무 멀어 확실히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게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마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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