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4화
제14편 영지 방어전 (2)
저택을 향해 날아온 비행 형 마물들을 전부 바닥에 떨어뜨리자, 도시를 공격하던 마물들은 모두 뒤로 물러섰다.
전에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던 마물들이었는데, 지금 도시를 공격하는 마물들은 제대로 된 전술을 사용하는 장군이 지휘하는 인간 병사들 같았다.
마물들이 물러갔지만, 환호성은 없었다.
도시 전체에 지친 한숨이 흘렀을 뿐이었다.
겨우 하루를 더 버텼다는 그런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발레아는 내게 인사를 한 뒤에 쓰러졌다.
몹시 놀랐지만, 다행히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거의 못 주무셨습니다. 마나도 매번 한계까지 쓰셨으니…….”
집사장의 말대로 발레아가 쓰러진 것은 과로와 마나 고갈 때문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나를 보고 긴장이 풀려서 쓰러진 것이었다.
나는 발레아를 안아 들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나타난 것을 보고 저택의 고용인들은 정말 기뻐했다.
마치 죽었다고 들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나를 반겼다.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어머니는 나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비추셨고, 플로라는 아예 울음을 터트렸다.
발레아를 그녀의 침실에 눕히려 했지만, 정신을 차린 발레아는 내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나는 집무실 소파에 발레아를 눕힌 뒤, 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을 맞이했다.
“벌써 석 달이 지났다고요…….”
“네, 영주님이 봉인지로 떠나신 지 90일이 지났습니다.”
해골에게 당해서 정신세계 속에 빠진 뒤, 정말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마물 기사를 재울 때도 수백 년이 흘렀다는 말을 듣고, 혹시나 했지만, 그 짧은 순간에 이렇게 시간이 지났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더 잠들어 있었으면, 이번 생에서는 이들을 보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전에 내가 굶어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지하 도시를 지나는 동안 유물 주머니에서 열심히 물과 음식을 몸속에 채워 넣었지만, 지금도 아직도 몸 상태가 좋지 못했다.
마나가 없었다면, 예전에 죽었을 터였다.
어쨌거나, 좀 더 늦었으면 영지에 있는 사람들을 못 만났을 정도로 지금 영지 사정이 좋지 못했다.
“영지가 마물들의 공격을 받은 지도, 벌써 2주가 지났습니다. 지금은 사방이 포위되어 매일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다들 열심히 막아내고 있지만, 버텨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헨 기사가 대표로 영지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병사들이나 영지민의 피해도 작지 않습니다만, 죽은 기사가 많습니다.”
내 명성을 듣고 찾아온 실력 좋은 자들만 가려서 받아들인 뒤, 내가 직접 훈련한 기사들이었는데…….
벌써 많이 죽어버린 듯했다.
“다른 영지들은 어떻습니까?”
내 물음에 우고가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피로스 왕국을 멸망시킨 마물들은 그대로 왕국 동부로 밀고 들어와 영지들을 무너뜨렸습니다. 사방에서 교전 소식이 들려왔고, 곧이어 연락들이 끊어졌습니다.”
우리 영지의 사정도 좋지 못했지만, 다른 곳은 더 엉망이었다.
“그레시아 영지도 한 달 전 구호 요청이 온 뒤로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내 고향 그레시아 영지도 예전에 마물들에게 짓밟힌 듯했다.
시몬 형과 형수는 잘 피했으려나…….
“그 뒤에 수도도 공격을 받고 있다는 연락이 왔고, 저희 영지에도 마물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영지민들을 이 도시로 불러들이고, 농성을 시작한 뒤로는 다른 영지의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마물들에게 도시가 포위를 당한 뒤에는 다른 곳의 소식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하늘을 날지 않고서는 다른 곳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조금 전에 하늘을 나는 마물들을 보니, 하늘도 안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도시에는 외부와 연락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을 텐데?
내가 왔다는 연락을 받고 바로 달려왔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레스티가 안 보이는군요.”
내 말에 집무실에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집사장이 대표로 내 질문에 대답했다.
“마물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딸린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며 도시를 떠났습니다. 경매장도 문을 닫고, 그곳에서 일하던 용병들도 같이 떠났습니다.”
이해한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집사장과 오헨 기사와 달리, 기사들은 그에 대한 불만이 상당해 보였다.
“처음부터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용병치고는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용병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하기야, 영주에게 생명을 바치기로 맹세한 기사들로서는 냉큼 달아난 것처럼 보이는 레스티가 마음에 안 들 수밖에…….
하지만, 나는 레스티가 이해가 되었다.
기사들과 달리, 그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다.
그의 주인은 셀린 여신이었고, 딸린 식구들을 구해야 한다는 그의 말도 변명이 아니었다.
셀린의 마지막 사제인 그에게는 셀린의 교인들을 지켜야 하는 사명이 있었다.
성기사인 내가 없으니, 그 혼자 교인들을 지켜내야 했을 터였다.
대전쟁 이후 수백 년간 교단 치하에서 몸을 숨기고 살아온 것처럼 지금도 그는 셀린의 교인들을 데리고 마왕과 마물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길을 떠났을 터였다.
“제국 소식은 아는 게 없습니까?”
“다행히 레스티가 떠나기 전에 말해준 게 있습니다.”
집사장의 말에 따르면, 제국은 한참 전에 수도를 잃고, 서쪽으로 도망을 친 모양이었다.
교단의 대주교가 황자와 몇몇 사람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달아났고, 지금은 제국 대부분이 마물의 손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마왕을 본 사람은 없답니까?”
“마물들 사이에 나타난 인간이 검을 휘둘러 성벽을 잘라낸 모양입니다. 마물보다 더 무서워 보이던 사람이라는데…….”
제국에서 돌아온 뒤, 주변 사람들에게는 마왕이 인간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었다.
레스티에게도 알려주어, 마왕이 나타나면 바로 위치를 알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이 안 맞을 줄이야…….
이런 상황에서는 마왕을 찾으러 가기는 불가능했다.
모두의 이야기를 들으니, 상황은 최악이었다.
이피로스 왕국과 제국이 무너지고, 공국들도 다른 나라들도 무너졌을 터였다.
왕국 수도도 지금까지 버텨내기 어려웠을 테고.
대륙의 서쪽은 아직 마물들에게 짓밟히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이제는 어떤 방법으로도 이 상황을 뒤집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마왕을 죽여봤자, 이제는 대세를 뒤집기는 어려워 보였다.
기억에서 본 마왕의 실력을 생각하면, 죽이는 것도 힘들었다.
최악의 상황을 전해 들었으니, 이제는 전세를 들을 때였다.
“마물들은 해가 뜨면 다시 공격하기 시작할 겁니다.”
그래서 해가 지자, 기사들이 저택으로 찾아올 수 있었다.
날이 밝으면 싸우고, 해가 지면 싸움을 멈추다니…….
이건 아무리 봐도 마물과의 싸움이 아니라, 사람끼리의 싸움이었다.
“이상하게 마물들도 급하지 않은 듯합니다. 열심히는 공격하는 것 같은데……. 마물들이 이런 짓을 하는 것이 웃기긴 하지만, 무리는 안 하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어진 우고의 말에 모두 한숨을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무리를 안 하려는 공격에 성문이 부서지고, 발레아가 죽을 뻔한 것이다.
그때, 조용히 있던 벤자민이 입을 열었다.
“저항이 거세니까, 포위해 놓고, 계속 공격하면서 말려 죽이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다른 영지들을 모두 점령할 생각이겠죠.”
말을 하는 벤자민도 많이 지쳐 보였다.
다른 이들의 말에 따르면 도시 방어에 벤자민이 큰 도움을 준 모양이었다.
영주 대행이던 오헨 기사가 싸우러 나가고, 그 뒤에 책임자가 된 발레아도 싸우느라 바빴으니, 벤자민이 나머지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벤자민이 말을 이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영주님이 준비해 놓은 물품이나, 백작 부인이 안 계셨으면, 도시는 예전에 무너졌을 겁니다.”
벤자민은 마지막 말을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마물에 뛰어난 전략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이 억울한 표정이었다.
집무실 소파에 발레아가 누워있으니, 몰려왔던 사람들은 할 이야기만 하고 바로 물러났다.
나는 소파에 누워있는 발레아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때, 잠든 것처럼 보이던 발레아가 입을 열었다.
“마물들은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
갑작스러운 말에 내가 의아해하자, 발레아가 다시 말했다.
“마물들은 뭔가를 기다리며 우리를 시험해보는 것 같았어요. 영주에게 바칠 만한, 쓸만한 물건인지 확인하는 집사 같았어요.”
예가 이상하긴 했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았다.
설마, 이곳을 포위한 마물들의 우두머리는 다른 마물왕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걸까?
아니면 마왕?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정보가 없으니, 모두 추측에 불과했다.
이번 삶에서 지금 할 일은 이 도시를 지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 할 일은 지친 발레아를 쉬게 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발레아 옆에 앉아 그녀가 다시 잠들기를 기다렸지만, 발레아는 자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나 잘했죠? 알렉스가 돌아올 때까지 열심히 영지를 지켰어요.”
“네. 정말 잘했어요.”
“너무 늦었어요. 아빠처럼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너무 늦어서 약속을 지키지 못 할 뻔했어요.”
“미안해요. 나도 이렇게 늦을 줄은 몰랐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줘요.”
나는 발레아에게 봉인지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셀린의 신전을 떠나, 황궁터로 간 일.
황궁터 지하에서 죽음의 신 사제와 마물 기사, 고대 제국의 황태자와 만난 일.
마물 기사와 싸우고, 죽음의 신 사제와 싸운 일까지.
이야기를 듣는 중간에 발레아가 잠들었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발레아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그렇게 발레아와 함께 집무실에서 밤을 보냈다.
다음 날, 나는 아침 일찍부터 영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에게 영주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이상으로 사기를 북돋는 게 없었다.
그 영주가 인기가 많고, 음유시인의 노래까지 나올 정도로 실력도 출중한 기사라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나는 창고에 있던 물품을 풀어 영지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을 격려해주고, 다친 사람을 찾아가 신검으로 치료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것이 거짓된 희망이라도 나는 거짓말을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 실패하더라도, 최대한 열심히 싸워 마물과 마왕의 약점을 알아내야 했다.
지금 내 거짓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나는 지독한 악당일 테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마지막 승리를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했다.
“이건 마왕과 다르지 않은 건가…….”
나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몰려오는 마물들을 맞이했다.
나는 그 뒤로 마물들과 싸웠다.
성문을 부수려는 마물들을 죽이고, 마물들을 지휘하는 것처럼 보이는 마물을 죽이기 위해 마물 떼 속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내가 돌아온 뒤로 전황은 달라졌다.
마물들은 성문을 부수지도 못하고, 해가 지기도 전에 물러섰고, 발레아가 영역을 펼치지 않는 날도 있었다.
죽는 기사들도 줄어들고, 부상자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도시의 분위기는 밝아지지 않았다.
싸움은 멈추지 않았고, 마물들도 포위를 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죽는 사람과 다친 사람이 줄어들었지만, 죽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 혼자서는 포위한 마물들을 모두 죽일 수 없었다.
더구나, 줄기는커녕 마물들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다른 영지를 박살 낸 마물들이 계속 포위에 합류하는 듯했다.
역시 발레아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마물들은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나는 마물들이 뭘 기다리는지 알게 되었다.
“마왕이 이 영지로 오고 있습니다.”
그 정보는 한쪽 팔이 잘린 레스티가 내게 알려준 것이다.
그는 마물들의 포위망을 뚫고 다시 도시로 돌아온 것이다.
“왜, 돌아왔지?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도 못 들었을 텐데.”
도시에는 셀린의 신도가 남아 있지 않아, 도시 밖에 있는 그가 소식을 들었을 리가 없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신도들을 피신시켜 놓았습니다. 신도를 보호하는 책무를 마쳤으니, 성기사를 도울 책무도 완수해야지요.”
그는 내가 이곳에 있건 없건 상관없었다는 표정이었다.
이래서 광신도들과는 엮이지 않으려 한 건데.
그들의 맹목적인 믿음은,
믿음이 없는 내게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이 정도 정보면 성 기사님께 도움이 되었겠죠?”
나는 그의 잘려나간 어깨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마왕이 온다면 이 무의미한 방어전에도 의미가 있었다.
나는 마왕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