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2화
제12편 죽음의 사도와 사자 회귀자 (2)
죽음의 신 사제가 주입한 기억이 다시 내 기억으로 덮여가기 시작했다.
죽음으로 가득했던 기억들이 소중한 기억들로 대체되었고, 조금 전에 잃어버렸었던 기억들도 하나둘 다시 살아났다.
다행이었다.
기억이 영원히 지워진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내 기억이 회복되고, 사제의 기억이 밀려 나가니, 사제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건 말이 안 돼, 이 건 한 사람의 인생이잖아! 같은 시간대의 기억들이 이렇게 겹겹이 쌓여 있는 게 말이 될 리가 없잖아!”
내가 평범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면 그의 말도 틀리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인생을 살지 않았다.
사제는 분노한 얼굴로 내게 손가락질을 했다.
“설마, 인생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는 말인가!”
조금 다르긴 했지만, 사제가 이해한 것도 많이 틀리지는 않았다.
“설마, 넌 시간의 사제? 아니면, 제국은 시간의 신 유물도 해석해 냈다는 거냐!”
분노한 얼굴로 마구 떠들던 죽음의 사제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시간의 사제?”
설마, 사제는 내 ‘사자 회귀’ 능력을 알고 있었나?
나는 그의 말을 더 듣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는 더 이상 내 의문을 풀어 줄 수 없었다.
되살아 난 내 기억으로 세상이 가득 차게 되자, 반대로 그의 머리 주변은 점점 어둠에 덮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어둠은 내 기억을 먹어 치운 어둠과 똑같았다.
사제는 모여드는 어둠에 손을 내저으며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역류는 안 돼! 내 기억을 가져가지 마! 이 기억이 없으면 나는 그냥 죽은 뼈다귀일 뿐이야!”
비명을 지르는 사제를 보니, 죽음의 사제가 왜 처음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직접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그가 내 정신세계에 직접 접속했다는 말이었고, 그러면, 그 자신도 나처럼 공격을 당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이 세계에 익숙하고, 걸맞은 능력을 가진 그가 내게 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겠지만, 결국, 결과는 이렇게 되었다.
“안 돼! 나는 죽음의 신의 마지막 사제다. 내 이름은……. 내 이름이 뭐지?”
그는 발버둥을 치며 기억을 되뇌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수록 어둠은 더욱 깊어졌고, 자신을 잃어갔다.
중년처럼 보였던 사제는 점점 나이가 들었다.
머리가 하얘지고, 피부가 말라갔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잊고.
“나는 신의 사제……. 내가 믿는 신은……. 내가 믿는 신은……. 나는 누굴 믿은 거지?”
믿는 신도 잊었다.
그리고, 그는 내가 기억에서 본 노인이 되어 있었다.
“나는 왜 여기 있지? 나는……, 나는……. 누구지?”
노인은 결국, 자신을 잃어버렸다.
그 순간, 세상이 무너져내렸다.
사제가 만든 세상이 부서지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사제의 모습도 변해갔다.
인간에서 해골로.
살아 있는 사람에서 언데드로.
사제가 해골로 돌아간 그 순간, 나도 원래의 장소로 돌아왔다.
바로, 황궁 터의 지하 도시로.
내 앞에 로브를 입은 해골이 멍하니 서 있었다.
“…….”
해골은 말을 하지 못했다. 눈에서 발하던 빛도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조금 전까지 나를 놀리던 죽음의 사제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내 앞에 있는 것은 단순한 해골, 언데드일 뿐이었다.
나는 다시 돌아온 것을 확인한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 날 뻔했어.”
솔직히 이번에는 정말 위험했었다.
그냥 죽게 되는 것이었으면 차라리 걱정을 안 했을 텐데.
죽지 않고 인격을 빼앗겼다면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지…….
최악의 경우, 과거로 돌아가는 정신은 어느 쪽일지도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이기긴 했으니까.”
마왕이 봉인된 유적을 찾으려다가, 엉뚱한 고생을 한 셈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쓸데없는 고생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 저기 있다.”
나는 주변을 살펴, 먼지에 덮여 있는 검의 파편을 찾아냈다.
다만, 파편이 굴러가 있는 홀 구석으로 걸어가면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뭔가 이상한데…….”
뭔가, 홀 내부가 전과 달라진 것 같았다.
고대 제국 왕가의 해골도, 사지가 잘린 마물 기사도, 완전히 언데드가 된 사제 해골도 다 그 자리에 있는데 뭔가 꺼림직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위험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나는 파편을 챙기고, 위화감이 왜 생기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고름과 먼지에 덮여 있었지만, 검의 파편이 맞았다.
좀비 거인 마물 왕의 머리에서 뽑아냈던 검 파편과 문양도, 크기도, 부러진 부위도 딱 맞았다.
따로 맞춰볼 필요도 없었다.
마왕의 기억에서 본 검의 파편이 확실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검을 집어 들었다.
세상이 어두워졌다.
여러 번 경험해봤고, 이미 각오도 해 두었기에 시야가 어두워지고, 다시 밝아진 뒤에도 놀라지 않았다.
조금 전 겪은 일에 비하면 놀랄 거리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놀랄 거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기하게도 다시 밝아진 세상에서 내가 본 광경도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있었던 지하 도시의 중앙 홀.
내가 빙의해 있는 자도 중앙 홀 가운데에 서 있었다.
지금 보고 있는 지하 건물과 중앙 홀은 조금 전 보았던 그런 낡고 버려진 곳이 아니었다.
반짝이는 바닥과 아름다운 조각들이 가득 찬 아름답고 화려한 곳이었다.
다만, 그 아름다움과 달리, 지금 이곳에는 피 내음이 가득했다.
밖에서는 마물의 괴성과 비명이 들리고 있었고, 이 홀 안에도 시체들이 쓰러져 있었다.
시체들은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들이었다.
그래도 이곳에 시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안쪽 계단 위 단상에는 왕관을 쓴 노인과 중년의 여성이 앉아 있었고, 그 양옆에도 화려한 옷을 입은 젊은이들이 앉아 있었다.
다들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멀쩡해 보였다.
그들 앞, 내가 빙의한 자 앞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판금 갑옷을 차려입은 거대한 기사였다.
처음에는 고름에 덮여 있지 않아서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 덩치와 갑옷을 보고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조금 전에 내게 사지가 잘려 나간 마물 왕.
그는 마물 기사였다.
아니, 지금은 아직 마물 왕은 아닌 것 같았다.
갑옷 사이로 고름도 보이지 않고, 투구 안쪽의 눈도 멀쩡해 보였다.
그리고, 멀쩡하게 말도 했다.
“아인! 이게 무슨 짓인가! 네가 무엇이라고 제국을! 인간들을 모두 죽인단 말이냐!”
검을 든 거인 기사의 투구 안에서 격정에 찬 음성이 들려온 것이다.
하지만, 격정에 찬 그 음성은 서늘하고 조용한 대답에 묻혀버렸다.
작은 목소리에 큰 목소리가 묻히다니…….
어이가 없는 일이었지만, 무지막지한 마나가 있다면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한 이는 그런 마나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빙의한 자, 내가 가지고 있는 파편의 원래 검을 들고 있는 마왕은 서늘한 목소리만으로 홀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다.
뒤쪽에 앉아 두 사람의 대치를 보고 있는 황제와 황족들은 자신들이 원해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왕이 뿜어내고 있는 마나가 그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내가 빙의하고 있는 이, 마왕이 말을 이었다.
“아인이라……. 정말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 차라리 지금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명칭인 마왕이라고 불러주었으면 하는데. 지금 네가 말한 그 이유도 충분히 설명될 테고.”
자신이 마왕이라 불리고 있으니, 제국도 인류도 멸망시키는 게 당연하다는 건가?
앞뒤가 바뀐 것 같지만, 마왕이 말해서 그런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큭…….”
기사는 대답을 듣고 신음을 흘렸다. 마왕의 말에 실린 마나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기사가 말을 하지 못하자, 가운데 앉아 있는 화려한 왕관을 쓴 노인이 억지로 입을 열어 마왕에게 말했다.
처음 보는 노인이었지만, 그가 고대 제국의 마지막 황제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의 손가락에서 빛나고 있는 반지를 보니, 그는 유물 반지의 도움으로 말하고 있는 듯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제국의 수도도, 제국의 병력도, 제국의 아름다운 문화도 자네가 모두 파괴했으니……. 거기다 자네에게 고통을 준 자들도 모두 죽어버렸잖은가…….”
“다는 아니지. 아직, 황제도 살아 있고, 황비께서도 살아계시고, 아름다운 황녀마저도 살아계시니까.”
마왕의 말에 황제는 허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가 마지막인 건가?”
황제의 대답에 좌우로 시야가 흔들렸다. 마왕이 고개를 저은 것이다.
“아니지, 만든 사람들이 모두 죽어도 만든 물건들은 남아 있으니까.”
마왕은 검을 들어 기사를 가리켰다.
“내가 마지막이 아니었더군. 실패작이라 더는 만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제국은 내 뒤에 계속 능력자를 만들어내고 있었어. 지금은 용사라고 불리던가?”
마왕이 검을 들어 가리키자, 마나가 기사에게 몰아쳤다.
기사는 도를 양손으로 잡고, 이를 악물었다. 바닥의 청석이 움푹 팼다.
기사와 달리, 마왕은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놈들이 수도에 있었으면, 같이 파묻어 주었을 텐데, 훈련이랍시고, 대륙 반대편에 가 있어서 조금 시간이 걸리겠어.”
“그들은 왜……. 네 말대로라면 그들도 피해자인데.”
황제의 물음에 마왕은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마물들로 가득 찬 세계에 날려진 뒤, 나는 마물과 싸워가며 하루하루 겨우 버텨나갔어. 지옥 같은 고통을 이겨내고, 외로움을 버텨내며 나는 복수만을 생각했었지.”
마왕은 왼손가락을 접으며 복수의 대상을 나열해 나갔다.
“나를 그 세계로 보낸 이들에 대한 복수, 나를 이렇게 만든 이들에 대한 복수, 이런 실험을 한 제국에 대한 복수. 신의 유물을 지닌 사제들에 대한 복수. 그 신을 믿는 인간들에 대한 복수.”
손가락이 다 접히자, 마왕은 손을 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사실, 지금은 그럼 감정은 다 잊어버렸어. 너무 오랜 시간이었어. 시간이 지나니 감정도 말라붙고, 기억도 흩어지더군.”
마왕의 오랜 시간이라는 말에 황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황제는 그래도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마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는 걸까?
“이제 내게 남겨진 것은 내 삶의 목적 한가지 뿐이야.”
마왕은 검지를 세웠다.
“바로 인간들에 대한 복수. 인간의 멸망이지.”
이어 마왕은 즐거운 듯이 손을 펴며 말했다.
“사실, 사람들이 말하는 내 별명은 나를 제대로 말한 거야.”
즐거운 어조와 달리, 마왕의 심장은 잔잔했다.
마치 연극처럼, 마왕은 마지막으로 세상을 향해 선언했다.
“나는 정말 마왕이 되었어.”
말이 끝나는 순간 마왕의 마나가 폭풍처럼 홀 내부에 몰아쳤다.
커억!
의자에 앉아 있던 황제와 황족들이 비명을 지르며 피를 토했다.
그들을 지켜주던 유물들은 마나를 버티지 못해 차례로 터져 나갔고, 황제와 황족들은 모두 숨이 끊어졌다.
앞을 가로막았던 기사는 마나의 폭풍을 버텨냈다.
그는 오히려 마왕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감히! 제국은! 나는! 아직 지지 않았다!”
기사의 말에 마왕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결국, 그 실험들은 황족들에게 능력을 부여하기 위한 실험들이었던 거였나?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가 마지막 실험자라니.”
마왕은 검을 휘두르려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죽이는 것보다, 나도 한번 실험해보는 게 좋겠어.”
마왕은 검집에서 검을 빼지 않고, 다가오는 기사에게 휘둘렀다.
퍽!
아름다운 선을 그린 검은 기사의 목을 지나갔고, 기사, 아니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는 옆으로 튕겨 나갔다.
“능력을 가진 인간을 마물로 만드는 실험을 해 보는 거야. 잘하면 황제의 말대로 인간 모두를 죽이지 않아도 될지도 몰라. 마물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살아 있는 거니까.”
마왕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구석에 처박힌 기사에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다시 어두워졌다.
기억이 끝난 것이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온 나는 기억을 보기 전 느꼈던 위화감이 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기억에서 보았던 깨끗한 건물과 바닥과 달리, 지금 이 건물은 먼지에 덮여 있었다.
수백 년간 방치되어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내가 날려버린 검 파편에도 먼지가 가득 묻어있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거기다, 사지가 잘린 마물 기사,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도 이미 한참 부패가 진행되고 있었다.
홀 안에는 썩은 냄새가 가득했다.
이건 다른 이유가 있을 리가 없었다.
해골과 싸우던 정신세계 안에서 많은 시간이 지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