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1화
제11편 죽음의 사도와 사자 회귀자 (1)
알렉스가 영지의 일을 보던, 저택의 집무실.
집무실 책상에는 알렉스 대신, 발레아가 앉아 있었다.
원래 알렉스가 오헨 기사에게 맡긴 자리였지만, 노기사는 집무실 책상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반대편에 서 있었다.
노기사 옆에는 우고와 미겔, 영지의 두 기사와 셀린 교단의 신관이자, 경매장 주인인 레스티가 있었다.
그들은 무슨 이유인지 무척이나 심각한 얼굴로 레스티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레스티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였던 껄렁한 경매장 주인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신관인 본연의 모습으로 말하고 있었다.
“제국은 이미 반 이상 점령당했다고 합니다. 제국 수도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주력은 제국 쪽이긴 하지만, 이피로스 왕국도 계속 밀려나고 있습니다. 겨우 마물 왕 하나인데……. 왕국이 버티질 못하고 있습니다.”
레스티의 말에 다들 한숨을 내쉬었다.
“한 달도 안 되었는데 이런 꼴이라니……. 정작 마물들의 주인은 앞으로 나서지도 않았는데…….”
우고의 말에 미겔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물들이 전술과 전략을 짜서 공격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백작님은 아셨으려나.”
우고의 말에 방 안이 조용해졌다.
“흠, 흠!”
우고도 자신이 실수했다고 생각했는지, 헛기침을 내뱉었다.
어두워지는 분위기를 보며, 오헨 노기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왕께서 다시 연락을 보내셨습니다. 저번과 같은 이유였습니다. 수도에 합류하는 게 어떻겠냐고…….”
기사의 말에 발레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우리, 아니 저는 마지막까지 이 영지에 남아 있을 겁니다. 그게 샤를 백작, 알렉스가 한 부탁이었고, 그와의 약속이었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지만, 노기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영주에 대한 신앙 같은 저 믿음들은 늙은 기사가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물론, 영주에 대한 고마움은 그도 가지고 있었지만, 봉인지에 들어가 연락이 끊어진 지도 한참이 지났는데도 모두 영주의 생존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딸과의 연결도 끊어져 버렸지만, 사람들은, 특히 백작 부인은 영주가 살아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저런 수하들을 이끌려면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백작 부인이 영지를 이끄는 게 맞았다.
오랫동안 작은 영지를 다스려오긴 했지만, 오헨도 기사였다.
이런 때에는 그도 검을 잡아야 했다.
“그리고, 이 대륙에서 이 영지보다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알렉스와 제가 오랫동안 준비해 놓은 영지입니다. 마물들과 싸우게 된다면 수도보다 이 영지가 더 나을 겁니다.”
이어진 발레아의 말에는 오헨 기사도 같은 생각이었다.
백작 부인의 능력인 영역 덕분에 이 도시는 도시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적을 막아 낼 수 있었다.
거기다, 그동안 훈련 시킨 병사와 기사, 유물 배낭에 쌓아놓은 엄청난 군량과 저택 지하에 있는 유물 창고는 이 영지에 있는 병사들에게 각자 마물과 싸울 힘을 주었다.
그래서, 그도 딸을 다른 곳으로 보내지 않은 것이다.
발레아의 말이 끝나자 집무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우고 기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많이 늦으시는군요.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모두 영주가 무사하다고 믿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제가 늦지 않게 만들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우고의 말에 발레아가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람들은 발레아의 말에 작게 몸을 떨었다.
그녀의 말에는 뭔가 스산한 분위기가 풍겼기 때문이었다.
* * *
꿈이었나?
방금, 발레아도 보고, 영지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본 것 같은데…….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순간,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뭔가 나에 대해 걱정이 가득한 사람들을 본 것 같았다.
이건, 악몽이려나, 아니면 좋은 꿈이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세상에는 어둠만 가득했다.
눈에 마나를 불어넣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니, 잠깐 눈에 마나를 밀어 넣기는 한 건가?
내 몸에 마나가 있기는 한가?
뭔가,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마치 먼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전생에 평범했던, 그런 사람으로…….
전생?
전생은 또 뭐지?
뭔가 머릿속 한 부분이 지워진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 아니, 앉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조용히 생각을 가다듬었다.
나는 누구?
알렉스.
알렉스 디 샤를 백작.
그레시아 공작의 차남이자 서자.
카를로스 왕국의 백작이자.
‘사자 회귀’ 능력자!
회귀 능력이 떠오르자, 머릿속에 잠들어 있던 수많은 기억이 떠올랐다.
수많은 삶과 인생, 사람들과 사건들.
전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마지막 싸움까지.
‘맞다. 나는 조금 전에 해골에게 당했었지.’
마지막 순간, 해골이 만든 반투명한 구에 휘말려 버렸었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거겠군.’
전에 악신의 성물에게 당했을 때도, 이런 정신 공간에 남겨졌었다.
그때는 손에 들고 있었던 기사의 검에 의지해서 빠져나왔었는데…….
지금은 손에 쥐었던 기사의 검이 느껴지지 않았다.
해골의 말대로라면, 죽음의 신 성물로 기사의 검을 막아놓았을 터.
이번에는 내 힘으로 빠져나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앞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짝. 짝. 짝.
동시에 내 앞에 사람이 나타났다.
빛도 없었지만, 나는 그를 볼 수 있었다.
로브를 걸친 차가운 얼굴의 중년인이었다.
얼굴을 본 적이 없었지만, 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저 로브는 기억에서 본 적이 있었고, 조금 전 싸울 때도 보았었다.
“이런 모습은 처음일 텐데, 내가 누군지 알겠나?”
말을 할 수 있는 건가?
나는 작게 헛기침을 해 본 뒤에 그에게 말했다.
“누구긴 누구야, 해골 사제지.”
내 말에 악신의 사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곳에 들어와서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다니. 대단한 정신력이군.”
역시 이곳은 악신의 사제가 펼쳐놓은 정신세계였다.
머릿속에 있는 가상의 공간이랄까.
“솔직히 놀랐다. 그 검을 눌러놓았는데도 아직 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니.”
조금 전 겪었던 혼란 이야기인가?
하긴, 조금 전 일은 회귀 능력자인 나도 정신을 차리기가 쉽지 않았다.
기억이 빠져나가고, 자신의 정체성이 믿어지지 않게 된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제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울 터였다.
“이렇게 내가 직접 나서게 될 줄은 몰랐군. 하지만, 잘 되었어. 이 정도 정신력이라면, 내 기억을 덧씌워도 잘 버틸 수 있겠지.”
사제는 만족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어두웠던 세상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가 손을 흔드는 순간, 나는 그에게 몸을 던졌다.
하지만, 내 몸은 사제와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사제는 허둥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이곳은 내가 만든 세계다. 네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의미 없는 곳이지.”
그의 말과 함께 세상이 완전히 밝아졌다.
밝아진 세상은 수많은 장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 머리 위로 침실의 천장을 배경으로 어머니가 내려다보는 장면이 보였다.
바닥에는 내 옆을 걷고 있는 발레아의 모습이 보였다.
검을 가르치는 미겔도 보였고, 왕국 수도의 전경도, 제국의 황궁도 보였다.
밝아진 세상 전체에 그런 광경이 가득했다.
전부 내가 아는 광경, 내가 아는 장면들이었다.
이 광경들은 모두 내 기억이었다.
“안됐군. 그냥 정신을 잃은 채로 있었으면, 지옥에 빠졌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했을 텐데.”
사제는 끝없이 펼쳐져 있는 내 기억을 향해 양손을 펼치며 키득거렸다.
“네 강한 정신력에 욕을 해라. 네게 지옥이 펼쳐지는 것을 직접 보게 만든 것은 네 강한 정신력이다.”
이런 대단한 광경을 보게 해 주고는 사제는 또 헛소리를 해댔다.
그의 말은 법원에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떠드는 헛소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어서 사제는 즐거운 얼굴로 떠들기 시작했다.
모습은 예전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아무래도 해골이 되면서 망가진 머리는 그대로인듯했다.
“그럼, 지옥이 뭘까. 뭐가 제일 괴로운 걸까?”
사제는 마치 교인들에게 설교하는 것처럼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건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다. 추억을 잊고, 과거를 잊고, 사람을 잊고, 결국 자신도 잊어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지옥이지.”
말과 함께 그는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순간, 세상을 가득 메웠던 기억 일부가 잘려 나갔다.
어둠에 먹혀버린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기억이 무엇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기억을 잊은 것이다.
내 표정이 굳어진 것을 보고, 사제는 다시 키득거렸다.
“정말, 답답하지? 하지만, 이제 시작이야. 너는 이렇게 하나씩 기억을 잃고 결국 백치가 될 거야.”
딱.
말과 함께 사제는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쿵.
이번에도 기억 일부가 베어져 사라져버렸다.
그의 말대로였다.
조금 전까지 보고 있었던 기억이 더는 떠오르지 않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고통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역시, 대단해. 하지만, 그건 아무 소용없는 짓일 뿐이야.”
딱.
그는 다시 손가락을 튕겼고, 다시 기억 일부가 사라졌다.
기억들이 사라지자, 가슴 한 곳이 뻥 뚫린 것 같았다.
답답하고, 막막해졌다.
사제는 내 표정을 보다가, 다시 키득거렸다.
“이게 끝이 아니야. 더 재미있는 것은 그다음이지.”
그는 손가락을 튕기는 대신, 손뼉을 쳤다.
짝.
기억이 사라진 공간. 검게 변한 공간에 새로운 광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는 죽은 자, 언데드가 가득했다.
“기억을 잃은 자에게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더 있어. 그건, 비어 있는 기억에 다른 기억을 덧씌우는 거야. 그렇게 되면 새로운 인격이 ‘짠’ 하고 탄생하게 되는 거지.”
비어 있는 공간에 점점 퍼져나가는 광경은 그의 말대로 사제의 기억이 담겨 있었다.
동시에 내 머릿속에도 그의 기억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죽음과 재생, 죽음의 신을 섬기는 그의 기억이.
“그게 지금 내가 할 일이고, 내가 넣을 기억은 바로 내 기억이야. 너는 두 번째 내가 되는 거고.”
그는 손가락을 튕기고, 손뼉을 치면서 나를 놀려댔다.
“자, 거기 서서 무력하게 네가 사라지고, 또 다른 내가 태어나는 것을 구경해라!”
그가 손뼉을 치고, 손가락을 튕기니, 내 기억이 사라지고, 그의 기억에 계속 밀려들었다.
그렇게 세상 전체가 그의 기억으로 덮어갈 무렵.
내가 입을 열었다.
“겨우 이정도 기억으로 내 기억을 덮어버리려고 한 건가?”
내 말에 사제는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아직도 정신을 유지하는 거지?”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내 기억은 이게 다가 아니니까.”
내 말과 함께 검게 변한 세상에 다시 기억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가 밀어 넣은 기억을 몇 번이나 뒤엎을 만한 기억들.
그 기억들의 마지막에는 모두 죽음과 실패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기억들도 전부 소중한 기억들이었다.
다시 세상을 덮고 있는 것은 이제는 사라져버린 내 삶의 기억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