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7화
제7편 나 홀로 봉인지로 (2)
대륙의 동쪽 끝, 과거 고대 제국의 수도이자, 지금은 수많은 마물이 자리를 잡은 마왕의 봉인지.
평범한 사람들은 평생 한 번도 오지 못하는 곳이었지만, 나는 뜻하지 않게 많지 않은 나이에도 이곳을 여러 번 왔었다.
그때마다 봉인지에서 보았던 것은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마물들이었다.
한국 땅만 한 밀림 속에서 마물 왕들이 각자 밀림의 한 부분을 차지한 채로 왕으로 군림하고, 그 아래 수많은 마물이 자신의 영역을 가진 채로 서로 싸우고, 협력하고 있었다.
웨이브 때에는 마물 종류에 상관없이 미친 채로 봉인지 밖으로 쏟아져 나오기는 했지만, 다른 때는 밀림에 사는 짐승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봉인지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가득 찬 마나는 그대로였지만, 그 아래, 밀림 전체에 살기와 광기가 가득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도 마구 뿜어나오는 살기와 광기가 아니라, 차분히 정돈된 기세였다.
이런 기세는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인간의 전쟁터. 인간의 대부대, 군단에서였다.
나는 우선 마나가 모여 있는 제일 가까운 장소로 향했다.
밀림 안에 마물은 보이지 않았다.
벌레와 짐승을 사냥하는 작은 마물들도 보이지 않았고, 마물의 둥지처럼 보이는 곳도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나뭇가지를 건너뛰고, 넝쿨을 타고 달려, 목적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밀림 너머, 작은 강 주변 벌판에 마물들이 모여 있었다.
한 종류의 마물이 아니었다.
늑대를 닮은 마물에서부터, 무기를 든 인간형 마물까지.
수백, 수천의 마물이 그 공터에 모여 있었다.
이 주변의 마물들은 이곳에 다 모인 듯했다.
공터에 여러 덩어리로 모여 있는 마물들은 서로 싸우지 않고 있었다.
서로 싸우지 않는 정도가 아니었다.
종류별로 그룹을 짓고 있는 마물들은 마치, 싸움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병사처럼 기세만 높이고 있었다.
더구나, 마물 그룹 사이로 무기를 들고 있는 인간형 마물과 사위 마물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무기를 저으며 마물들에게 고함을 지르는 모습을 보니, 그 마물들은 다른 마물들을 지휘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마물의 군대인가…….”
마물들의 모습은 판타지 영화에 나왔던 몬스터 군단 같았다.
나는 바로 유물 주머니에서 단검을 꺼냈다.
이 광경을 설명해줄 에고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마왕의 군대가 다시 모인 건가요?]
내가 따로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단검은 유물 주머니에서 나오자마자, 마왕 이야기를 꺼냈다.
“설마, 이게 대전쟁 때 마물들의 모습인 건가?”
[당연하죠. 아무리 수도에 마왕이 강림했다고 하지만, 설마, 지휘 없이 마구 날뛰는 마물들에게 제국이 멸망했겠습니까.]
그동안 내가 입을 막아왔던 설움 때문인지, 단검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인간의 군대가 마물들을 막는 사이, 용사들이 필사적으로 마왕을 봉인한 이유도 마왕의 통솔력 때문이었습니다.]
나도 대전쟁 때의 일을 알게 될수록 의문이 커졌었다.
용사들을 만들어낸 고대 제국이 용사 중의 하나인 마왕에게 멸망하다니…….
마왕이 다른 세상에서 강해져서 마물들을 이끌고 침략했다고 해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웠었다.
마왕의 기억을 봤을 때도 마물들은 서로 싸우지 않고 모여 있기만 했고…….
눈앞의 광경을 보고, 이제야 나도 고대 제국의 멸망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간의 군대처럼 싸우는 마물들이라니…….
그런 적이라면 용사들을 만들어내고, 대륙을 지배했던 고대 제국도 막기 어려웠을 터였다.
단순한 웨이브도 막기 어려운 지금의 제국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마왕은 단순한 마물의 왕이 아니었다.
마왕은 마물들의 통솔자이자, 장군이자, 수장이었다.
그는 단순한 짐승을 전쟁하는 병사로 만들어 준 전쟁의 신이었다.
“역시, 모든 일은 이유가 있는 거였어.”
왜, 대전쟁 때 용사들이 모두 마왕에게 달려들었는지,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았다.
용사들은 다른 방법이 없어서 마지막 기대로 마왕에게 돌격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마왕만 쓰러지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을 알고 마왕에게 달려든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마왕이 다시 나타나면 끝장이라는 소리잖아!”
내가 마물 왕을 쓰러뜨리고, 제국이 마물들을 막아 내는 것을 보고, 조금은 안일하게 생각했었다.
제국과 다른 왕국의 힘을 모아 마물들을 막아 내면서 마왕을 쓰러뜨릴 방법을 찾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 생각은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이대로는 전부 쓸려 나가버리겠군.”
인간의 군대처럼 전략과 전술을 짜서 움직이는 마물의 군대라니…….
제국과 다른 왕국들의 군대는 마왕이나 마물 왕이 아니라, 평범한 마물들도 막지 못할 게 분명했다.
일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서둘러야 했다.
나는 뒤로 물러서며 단검 에고에게 투덜거렸다.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면 그동안 말을 막지 않았을 거야.”
맨날, 물어본 것에 관련된 내용만 주절거릴 뿐, 단검 에고는 제대로 된 정보를 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저는, 저희는 사람이 아닙니다. 유물에 담긴 에고일 뿐.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하다고 해도, 주인이 물어온 이상의 대답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단검 에고의 대답은 평상시와 같은 어조였지만,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인간처럼 느껴진다고 해도, 한계가 있던 것일까? 아니면 뭔가 제한이 있었던 걸까.
에고의 대답에 나는 조금 미안해졌다.
[그렇기에 이 문제는 제대로 된 질문을 하지 않은 주인님 잘못입니다.]
하지만, 이어진 에고의 말에는 심술이 가득 묻어 있었다.
젠장, 미안해하지 말걸.
나는 단검을 다시 유물 주머니에 집어넣고, 몸을 날렸다.
원래 가려고 했던 곳. 마왕이 봉인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유적으로 향한 것이다.
대전쟁 뒤, 용사들은 마왕을 봉인한 뒤에 그 장소를 철저하게 숨겼다.
기록에도 남기지 않고,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것이다.
당연히 그 이유는 누군가 찾아와 마왕의 봉인을 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비밀은 신기하게도 수백 년간 지켜져 왔다.
고대 제국을 이었다는 차르 제국도 알지 못했고, 교단도, 조직도, 다른 누구도 그 장소를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니, 사람들은 모두 그 장소를 찾는 것을 포기했지만, ‘조직’은 그렇지 않았다.
예언을 통해 언젠가는 마왕이 봉인을 풀고 밖으로 나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만큼, 그들은 끝까지 마왕이 봉인된 장소를 찾아다닌 것이다.
그렇게 찾아다닌 끝에, 그들은 마왕이 봉인된 곳이 봉인지의 유적 중 한 곳이라는 것과 후보지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차도프 자작이 건네준 지도들이 그 후보지들이었다.
“문제는 후보지가 너무 많았지.”
마물과 마물 왕이 버글거리는 봉인지의 유적들이라, 조직은 후보지 숫자를 줄이기가 어려웠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그들과 다르게 한가지 특기가 있었다.
유물에 담긴 용사의 기억을 보는 능력이었다.
정보창에 나오지도 않는 조금 이상한 능력이었지만, 어차피 정보창이라는 것도 구슬 에고가 활성화한 것일 뿐이었다.
전부 표시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솔직히, 바로 찾아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거기까지 막아놓았을 줄이야…….”
텅 빈 밀림을 가로지르며 나는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용사들은 마왕이 봉인된 장소를 기록에 남기지도, 남에게 알리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억에서도 지워버린 것이었다.
‘별의별 능력이 다 있으니, 기억에서 지우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긴 한데…….’
그 덕분에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유물에서 본 용사의 기억으로 전투의 경로를 확인하고, 도서관에서 대전쟁 때의 기록을 확인해서 그 내용을 비교했다.
그렇게 해서, 기억에도 기록에 담기지 않은 빈 공간, 빈 지역을 찾아냈다.
그 장소는 봉인지의 두 지역. 지도 속의 두 유적이었다.
지금 내가 찾아가는 곳은 그중에서 조금이나마 더 그럴듯해 보이는 곳이었다.
봉인지의 북쪽.
고대 제국의 황궁터였다.
지금 찾아가는 곳이 그럴듯해 보였던 것은 다른 게 아니었다.
기록과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다르지 않았지만, 지금 찾아가는 옛 제국의 황궁터는 다른 유적과 달리, 대전쟁 후 수백 년간 사람들이 찾았었기 때문이었다.
마물이 가득한 봉인지였지만, 그 안에 있는 고대 제국의 황궁은 사람들이 꼬여 들기에 충분했다.
인생 역전을 생각하는 용병들도, 가문의 성공을 꿈꾸는 귀족들도, 고대 제국을 잇기를 원하는 차르 제국까지.
모두 고대 제국의 황궁을 찾아갔다.
하지만, 고대 제국을 찾아 떠났던 사람 중에 멀쩡히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은 봉인지 안에서 실종되고, 겨우 돌아온 몇 사람은 정신이 나가버려 몇 마디 말을 남기고 죽어버렸다.
‘거기는 다른 세상, 다른 공간이야.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어!’
다들 비슷한 말을 하고는 죽어버린 것이다.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라면, 그들은 어떻게 돌아온 것인지 이해가 안 갔지만, 어쨌거나, 도서관에 남겨져 있던 그들의 말은 내 관심을 끌게 되었다.
미쳐서 돌아왔으니, 그들이 갔던 장소가 어디인지 알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조직은 그 장소를 지도에 남겨 놓았었다.
“조직도, 제국도 이곳을 탐사해 보기는 했겠지?”
아직 후보지에 남겨져 있는 것을 보니, 당연히 탐사는 실패했을 터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옛 황궁터는 봉인지의 중심에 있었으니.
많은 인원을 데려갈수록 뚫기가 더 어려웠을 터였다.
다른 때였으면, 나도 찾아가기가 벅찼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봉인지 중심으로 나아갈수록, 마물들의 숫자는 더 줄어들었다.
물론, 군데군데 엄청난 수의 마물들이 모여 있는 장소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런 장소는 피해버리면 그만이었다.
나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텅 빈 밀림을 계속 주파해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온종일 쉬지 않고 달려, 나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넓은 분지에 펼쳐진 거대한 폐허.
고대 제국의 황궁 터였다.
아름다웠다는 건물들은 다 무너져 폐허로 변해있었고, 넓은 분지에 살아 있는 생명체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에 있던 마물들도 전부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나는 폐허 앞에 서서 앞을 노려보았다.
겉보기에는 황량한 폐허일 뿐이었지만, 마나를 볼 수 있는 나는 이 폐허, 유적의 이상한 점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쟁반을 덮어놓은 것처럼 느낌이 다른 마나가 폐허를 덮고 있었다.
무척이나 끈적거리고, 이질적인 마나.
“설마, 이게 봉인은 아니겠지?”
아니면, 봉인의 여파던가.
저 납작한 마나의 중심은 당연히 폐허의 지하였다.
껄끄러운 마나와 유적의 지하라.
아무래도, 안에 들어가기가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을 테고…….”
다음에 싸우더라도 마왕이 이곳에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했다.
거기다, 마왕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마나 속으로 들어가고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거나, 내게는 다시 시작할 기회가 있었다.
이번 삶에 쌓아 놓은 것이 많았지만, 다시 시작하면 될 뿐이었다.
“좋아. 가자.”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마나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질적인 마나가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