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6화
제6편 나 홀로 봉인지로 (1)
소환을 끝낸 뒤, 나는 사람들을 불러서 한가지 서약을 하게 했다.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이었다.
미겔, 우고, 두 기사와 오헨 노 기사, 그리고 벤자민과 집사장까지.
모두 믿을 만한 사람들이었지만, 이번에 그들에게 보여 줄 것은 계약 없이 보여 주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지하에 무슨 공사를 했길래, 저희에게 비밀 서약까지 받으신 겁니까.”
우고의 말에 벤자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신관도, 계약서도 없이 계약이 가능한 것이었나요?”
당연한 의문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의 의문에 어깨를 으쓱였을 뿐이었다.
“영주님이 하신 일이니까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한둘이 아니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편이 좋을 겁니다.”
집사장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교단 대주교의 능력이 남아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지만, 다들 알아서 받아들이는 것을 보니,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을 데리고, 저택 지하로 내려갔다.
“그러고 보니, 수고했다는 말도 안 한 듯하군.”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 집사장에게 고맙다고 했고, 그는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정작 일은 백작 부인께서 다 하셨습니다. 저야 사람들을 시켜서 뒷정리만 한 정도입니다.”
집사장의 말대로 지하에 공간을 만드는 것은 발레아가 다 했겠지만, 그래도 집사장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수도 한가운데 커다란 저택 아래에 거대한 공간을 만드는데, 문제가 없었을 리가 없었다.
사실, 다 무시하고 만들면 하루면 되었겠지만, 그렇게 하면, 지상의 집들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발레아에게 집사장을 붙여 준 것이었고, 내 생각대로 두 사람은 지하 공간을 잘 만들어주었다.
계단을 다 내려가니, 텅 빈 광장이 있던 곳은 커다란 문이 떡 하니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고, 문 옆에는 발레아가 서 있었다.
“왜 여기에 문이…….”
나는 마나를 움직여 문이 열리게 했다.
황궁 지하에서 보았던 복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복도를 가리키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제국의 황실 금고입니다. 관리자로 발레아를 지정해 놓았으니, 이 금고에서 필요한 물건을 꺼내려면 발레아에게 허락을 받으면 됩니다.”
사실, 처음에는 그냥 발레아에게만 알려주려 했다.
백작 부인이 된 예물로, 결혼식이나 약혼식 대신, 제국의 황실 금고를 맡기려 한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래서는 영지에 위험이 닥쳤을 때 황실 금고가 제대로 쓰이기가 어려울 터였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유물이 뭔지, 유물들을 어떻게 활용할지 미리 계획을 세워놓지 않으면 유물들은 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지금 내가 떠나기 전에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 금고를 보여준 것이었다.
믿는 사람들이었고, 비밀 서약도 해 놓았으니, 다른 곳에 말할 염려도 없었다.
서약을 안 했다고 해도, 제국의 황실 금고가 여기 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사람들은 놀란 얼굴로 내 뒤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섰다.
“앞에 있는 방들은 유물 방들이고, 나머지 방들은 재물들을 모아놓은 곳입니다. 다들 살펴보고, 어떻게 쓸지 고민해 봐요.”
내 말에 발레아가 마나를 움직여 모든 방의 문을 열었다.
유물들과 금은보화의 빛이 복도를 밝혔다.
모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눈을 가렸다.
다들 얼이 빠진 것처럼 보였고, 벤자민만이 겨우 입을 열었다.
“설마, 이것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요?”
이번에는 모두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다들 정신없이 방안을 훔쳐보는 중에 노기사가 떠듬거리며 물었다.
“에……. 그러면……. 황실 금고라 했으니, 제국 황실에서 가져오신 겁니까?”
나는 오헨 기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훔쳐 왔습니다.”
내 대답에 모두 입을 딱하니 벌렸다.
아니, 다들 왜 또 놀라는 것인지…….
훔치는 게 아니면 황실 금고를 이곳에 가져올 방법이 있을 리가 없는데.
“황실, 아니 제국이 가만히 안 있을 것 같은데요.”
나도 벤자민의 말에 동의했다.
“제국 황실은 난리가 났겠지요. 문책을 당하는 사람도 많을 거고. 근데, 거기서 끝날 겁니다.”
나도 황실 금고를 방문하긴 했지만, 나를 의심하기는 어려웠다.
내 능력을 아는 사람도 없고, 능력으로 황실 창고를 옮기는 게 가능할 거라 믿는 사람도 없을 테니.
‘수련검’을 물어보았던 금고지기는 조금은 의심하려나.
하지만, 상관없었다.
다시 마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국에서 지금 황실 금고를 찾으러 돌아다닐 사람은 없었다.
“황실 금고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밖에 없으니까요.”
이들에게 괜히 서약을 받은 게 아니었다.
더구나, 이제부터 같은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으니, 모두 딴생각을 하기는 힘들 터였다.
다음 날, 나는 영지를 떠나기로 했다.
목적지는 봉인지.
마왕이 봉인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두 유적 중 한 곳이었다.
발레아도 따라오고 싶어 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이 영지를, 어머니와 내 사람들을 지켜야 했다.
아직, 봉인지의 마물들은 북부 산맥 위쪽, 제국 쪽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북부 산맥 남쪽이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돌아오기 전, 마물들이 북부 산맥을 통해 영지로 쏟아져 나올 수도 있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 열심히 사람을 모으고, 훈련을 시키고, 황실 금고까지 털어왔지만, 다른 이들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적어도 발레아라면 그녀의 영역으로, 이 도시, 아니 저택은 지킬 수 있을 터였다.
그녀의 능력이 최대로 발휘되는 것도 사람을 지키고, 일정 지역을 방어하는 것이었고.
더구나, 이번에는 마왕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단지, 어디가 마왕이 있는 유적인지 확인만 할 생각이었다.
고맙게도 발레아는 저택에 남아달라는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대신 그녀는 내게 이번에도 무조건 돌아오라는 약속을 받아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비밀 서약을 얻어낸 것을 보고, 그녀는 내게 교단의 서약을 하게 한 것이다.
물론, 나는 회귀가 가능했기에 서약은 의미가 없었다.
사실, 회귀할 수 없어도 죽게 된 이상 서약은 아무 의미가 없었지만…….
발레아는 약속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녀는 내 약속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 같았다.
나는 아침에 필요한 물건들을 유물 주머니에 넣고, 용병 갑옷을 입은 뒤, 저택을 나섰다.
저택 앞에는 내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어머니와 발레아, 오헨 영주 대리와 내 권속들까지.
어머니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몰랐지만, 다른 이들은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다.
혼자 봉인지로 간다는 말에 모두 걱정했지만, 이번에는 나를 쫓아 오겠다는 사람도, 나를 막는 사람도 없었다.
“마왕과 싸운다면 기를 쓰고 따라가겠지만, 마물 왕을 잡은 용사가 정찰하러 간다는데 따라갈 수는 없죠.”
우고 기사의 말에 미겔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역시 방해가 되겠죠?”
사실 미겔은 따라오고 싶은 모양이었다.
미안하지만 미겔은 같이 갈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발레아 외에는 나와 함께 갈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벤자민처럼 내가 직접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내가 고집을 부렸고, 내 실력을 알게 된 이들은 나를 말리지 못했다.
나는 모두에게 인사를 한 뒤, 발레아에게 말했다.
“다녀올게.”
“제가 필요하면 부르세요.”
발레아의 말에 왜 발레아가 따라오겠다고 우기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발레아는 내 옆으로 부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필요하다면 부를 생각이었다.
발레아를 끝으로 인사를 마친 뒤, 나는 멀리 동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장비 소환’을 하기 위해서였다.
소환 능력이 강화되고, 고정관념을 깨뜨리게 되니, ‘장비 소환’ 능력은 과거의 평범한 능력과 궤를 달리하는 능력이 되어버렸다.
사람인 발레아를 옮기고, 유물인 황실 창고를 옮길 수 있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지만, 생각을 바꾸니, 다른 것도 가능했다.
손을 뻗은 채로 나는 머릿속으로 내 소유의 물건들을 떠올렸다.
여러 가지 물건 중에 봉인지에 있는 물건으로.
봉인지에서 찾은 유물들은 거의 다 내가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 봉인지에 남아 있는 것도 있었다.
유물도.
유적도.
“셀린 유적으로 전송.”
말과 함께 마나가 쑥 빠져나가는 게 느껴지며, 시야가 일그러졌다.
제국 수도에서 왕국 수도로 날아왔을 때보다, 더 세상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렇게 세상이 빠르게 변하더니, 눈앞에 무너진 흑백의 지하 광장이 보였다.
이곳은 셀린의 신전.
신검을 발견했던 봉인지의 던전이었다.
나는 이 신전에 있던 신검의 주인이자, 이곳에 남아 있던 성기사의 대를 이은 셀린 교단의 성기사였다.
당연히 이 유적도 나의 것이었고, ‘장비 소환’ 능력으로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말리지 못한 것은 내 실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장비 소환’ 때문이었다. ‘장비 소환’이 있으면, 발레아를 부를 수도, 필요하다면 도망치는 것도 가능했다.
신전은 처음 보았을 때와 달라져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도 방치한 지 오래 지나 허름해 보이기는 했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멀쩡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그 모습이 거의 남지 않았다.
지하 광장은 무너져서 출구도 보이지 않았고, 공기도 통하지 않는지, 숨쉬기도 편치 않았다.
당연히 빛도 들어오지 않아, 온통 흑백으로 보일 뿐이었다.
나와 일행이 신검을 들고 이 유적을 빠져나왔을 때, 신전이 폐쇄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폐쇄된 신전은 내 생각보다 더 엉망이었다.
출구도 무너져서 다른 곳이었으면 빠져나가지도 못할 뻔했다.
하지만, 이곳은 셀린의 신전.
나는 셀린의 성기사였고, 이 신전은 아직 신전을 지키는 이들이 남아 있었다.
나는 가슴에서 신검을 꺼내, 마나를 불어넣었다.
검이 환하게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잠시 뒤,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바닥이 울린 것이다.
쿵. 쿵. 쿵.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쾅! 쾅! 쾅!
바닥이 터져나가고, 무너진 지하 광장에 먼지가 가득 채워졌다.
쿵. 쿵. 쿵.
이어서, 먼지 사이로,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마나를 풀어, 먼지를 가라앉혔다.
먼지가 가라앉자, 내 앞에서 서 있는 골렘들이 보였다.
수백 년 동안 이 신전을 지켜온 수호자이자, 처음 이 신전을 찾아왔을 때, 거인 마물 왕을 쫓아내 준 그 골렘들이었다.
시간이 더 지났지만, 골렘들은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이 골렘들은 신전이 폐쇄된 뒤에도 신검의 부름을 따라 지상으로 올라왔었다.
당연히 지금도 가능할 터.
나는 신검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골렘들에게 부탁했다.
쿵. 쿵. 쿵.
골렘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상을 향해 벽을 뚫기 시작한 것이다.
골렘이 벽을 부수고, 땅을 파내자, 빠르게 동굴이 만들었다.
나는 골렘들의 뒤를 따라 동굴을 걸어갔다.
몇 분을 걸었을까.
마침내, 나는 지상에 나오게 되었다.
동굴에 나와 봉인지를 보고,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여기가 봉인지?”
주위에 퍼져있는 마나를 보면, 분명 봉인지가 분명했지만.
이곳은 내가 알던 봉인지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