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5화
제5편 소환
영지에 돌아오니 사람들이 우리를 반겼다.
영주 대리를 맡고 있던 오헨 기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다른 기사들과 집사장도 기뻐했다.
나로서는 파견에서 돌아온 뒤에 몇 번이나 방문했었던 영지였지만, 그 시간은 이미 사라진 시간이었다.
영지를 지키던 이들은 내가 파견을 떠난 뒤, 나와 발레아를 처음으로 보는 것이었다.
모두의 환영과 투덜거림을 들은 뒤, 나는 제일 먼저 어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나는 처음으로 발레아와 함께 어머니께 인사를 드렸고, 어머니는 인사를 하는 우리 두 사람을 보고 미소를 지으셨다.
“이제 결심이 선 거냐?”
“네.”
어머니의 질문에 나는 확실하게 대답했다.
어머니는 발레아를 아내로 삼겠냐고 물은 것이었고, 나는 그 대답을 한 것이었다.
사라질지 모르는 아이 때문에, 아내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에 여태껏 거부해왔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미룰 수 없었다.
다들 발레아를 내 아내로 생각해주고 있고, 실제로 백작 부인의 역할을 해 주고 있는데, 그냥 내 애인으로 놔둘 수는 없었다.
사실, 그동안 발레아가 보답 없이 나를 도와준 것을 생각하면, 내 결정은 너무 늦은 것이었다.
다만, 아직도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삶도 없어질 삶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내 정체가 너무 노출되어 있었고, 아직도 마왕과 봉인지에 있는 마물 왕에 대한 준비도 제대로 돼 있지 않았다.
그 일들이 잘못되어 다시 회귀하게 되면, 결국, 지금 결정은 없었던 일이 되어버릴 터였다.
하지만, 없어질지 모른다고 안 할 수는 없었다.
제국 황궁에서 프러포즈 비슷한 것을 해 버렸는데, 지금 와서 발을 뺄 수는 없었다.
내 결정이 사라지고, 프러포즈가 없어진 일이 되어버린다면, 다시 하면 될 뿐이었다.
나는 사라지게 되는 삶에서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나 자신과 약속했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건 최선이 아닐 수도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적을 죽이고, 남게 되는 이들의 생존을 고민하는 것만이 최선일 리가 없었다.
없어지게 되는 삶에서도 나와 주변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
그건 그들과 충실한 삶을 산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그 첫걸음으로 발레아와 손을 잡기로 한 것이다.
내 말에 어머니는 발레아의 손을 잡았다.
“다행이구나. 이제라도 결정되어서.”
“네.”
발레아는 어머니의 말에 수줍게 대답했다.
수줍어하는 그녀의 모습은 다른 이들을 대할 때의 가식적인 모습인지, 아니면 진짜 수줍어하는 것인지, 나도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발레아의 손을 잡은 채로, 어머니는 무척 아쉬워했다.
“아쉽지만, 결혼식은 지금 하기 어렵겠구나. 정략결혼 상대가 나와야 같이 결혼식이 가능할 테니…….”
정말, 이 세계의 규범은 사람을 피곤하게 했다.
이 세계, 이 대륙에서 작위를 가지고, 영지를 가진 귀족들의 첫 결혼은 거의 무조건 정략결혼이었다.
귀족들의 정략결혼은 대전쟁 뒤, 각성한 귀족들의 피를 섞어서 능력을 계속 유지하고 강화하자는 이유로 시작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정략결혼은, 강대한 능력을 가진 귀족의 작위가 더 높아지고, 힘을 가지게 되면서 갈수록 더 강화되었다.
지금은 귀족 가문 간의 연합이라는 정치적인 이유까지 가세하면서 귀족들의 가장 중요한 규칙이나 규범이 되어버렸다.
작은 영지를 가진 귀족부터, 황족까지 지켜야 하는 규칙이자, 능력을 후대에 물려주어야 할 귀족의 의무였다.
처음 작위를 얻게 되었을 때도 이 규칙을 무시하기 어려웠지만, 작위가 올라가는 바람에 발레아를 정부인으로 삼기가 더 어려워졌다.
물론, 전부 무시하고 발레아를 정부인으로 삼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내 명예가 실추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 욕이 전부 어머니와 발레아에게 가게 될 테고, 내 밑에서 일하는 이들은 모두 명예를 모르는 주군 밑에서 일하는 이들이 되어버리게 될 터였다.
더구나, 이런 규범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밖에 없는 듯했다.
“괜찮아요. 저는 누가 오더라도 잘 지낼 수 있을 거예요.”
어머니도 발레아도, 정략결혼에 대해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발레아는 거꾸로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있었고.
내가 보기에도 발레아는 가식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던…….
그녀가 너무 진심이라, 조금 서늘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어머니, 아만다는 바로 정략결혼 상대를 알아보시겠다고 했지만, 나는 바로 그녀를 말렸다.
나는 발레아 이외에는 부인을 둘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발레아와의 결혼식도 당장은 할 생각이 없었다.
발레아와의 결혼식은 모든 일이 끝나고 할 생각이었다.
그때가 되면, 규범 같은 것도 신경 쓸 필요가 없을 테고, 아이도 가질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두 여성을 어머니의 응접실에 두고, 밖으로 나왔다.
“축하드립니다.”
응접실 밖으로 나가자, 밖에서 기다리던 집사장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축하드려요!”
이어서 다른 고용인들과 시녀들의 축하 인사가 이어졌다.
조금 전에 꺼낸 이야기였는데……. 벌써 모두 알고 있다니.
역시, 영주의 저택에는 비밀이 없었다.
시녀들 중간에 플로라가 있는 것을 보니, 누가 말을 전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플로라를 보고 피식 웃고 말았다.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내 어린 시절 전담 시녀를 혼내기는 힘들 것 같았다.
다만, 한번 퍼져나간 소문은 순식간에 저택은 물론, 영지 전체에 널리 알려졌다.
만나는 사람마다, 축하를 하는 바람에 일을 진행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게 되어서 이제야 여러분께 벤자민을 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날 저녁, 나는 집무실에 내 사람들을 모아 벤자민을 소개했다.
“반갑네. 드디어 오게 되었군.”
내전 중에 그를 보았었던 기사들은 그를 반가워했고, 그를 처음 본 사람들도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집사장은 물론, 오헨 기사도 그를 알고 있었다.
“영지에 공주의 지혜가 올 줄은 몰랐군요.”
“아……. 그 별명은 좀…….”
오헨 기사의 말에 벤자민은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처음 듣는 별명과 묘한 벤자민의 표정에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별명이지?”
“아, 모르셨습니까? 내전 중에 두 별명이 엄청나게 유행했었습니다. 음유 시인의 노래도 있었는데……. 공주의 지혜와 공주의 검이라는 별명인데.”
“……설마, 공주의 검이 나인가?”
내 물음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별명을 모르는 것은 나만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별명이 하나 더 늘어났죠.”
다른 때보다 기분이 좋았는지, 조용히 있던 발레아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무슨 별명입니까?”
당연히 발레아에게 별명이 무엇인지 묻게 되었고, 모두에게 발레아가 새로운 별명을 이야기해주었다.
“‘왕 살해자’예요.”
그녀의 말에 모두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는 다른 이들이 오해하기 전에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여왕에게도, 공작에게도 말한 내용이었다.
이곳에 있는 내 사람들에게는 모두 말해 줄 생각이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파견에서 있었던 일과, 제국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화해서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그렇게 되어서 ‘왕 살해자’라는 별명이 붙은 겁니다. 왕을 죽여서가 아니라 마물 왕을 죽여서 생긴 별명입니다.”
모두 내 이야기를 듣고, 여왕과 공작 이상으로 놀라워했다.
“그게……. 별명이 잘못된 것은 아니군요.”
벤자민이 떠듬거리며 말했고.
“세상에, 영주님이 마물 왕을 죽이셨다고요? 마물 왕을 쓰러뜨린 기사라니! 이건 완전히 용사인데요!”
기사들은 내가 마물 왕을 죽였다는 것에 흥분해 버렸다.
“……돌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헨은 내가 제국의 작위를 거절하고 돌아온 것을 무척이나 고마워했다.
“이제부터 벤자민이 도와주겠지만, 오헨 영주 대리는 좀 더 남아서 일을 도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영지에 돌아왔으니, 영주로서 내가 일을 처리해 나가겠지만, 이번에도 그 기간은 길지 않을 터였다.
이제는 포기해서인지, 아니면, 내게 그동안의 일을 들어서인지, 오헨 기사도 이번에는 모레나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헨에게 말한 뒤, 나는 모두를 향해 이야기했다.
“제 이야기를 들었으면 아시겠지만, 앞으로는 더 힘들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모두 좀 더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물 왕들이 제국으로 넘어가고, 그 마물 왕들이 쓰러진 지금, 영지의 마물도, 북부 산맥의 마물도 조용했다.
하지만, 나는 이 조용함이 폭풍의 전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그 폭풍은 고대 제국을 멸망시켰던 재해를 다시 세상에 끌어낼 것이다.
나는 그 재해를 막아 낼 것이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어머니와 발레아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그렇게 모두에게 이야기한 뒤에, 집사장에게 따로 지시를 내렸다.
“발레아와 함께 공사를 하나 해야겠어요.”
집사장은 내 지시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그가 생각하기에는 정말 뜬금없는 공사였을 터였다.
그 뒤에 나는 열심히 영지를 다스려 나갔다.
새로 뽑은 기사들과 대련도 하고, 증축한 성벽도 확인하고, 병사들과 영지민들도 만났다.
세금도 확인하고, 그동안 벌여왔던 사업들도 살피며 오랜만에 영주로서 할 일을 이어나간 것이다.
마물들이 조용하니, 영지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나갔다.
사실, 훨씬 더 성장할 수 있었지만, 나는 최대한 내실을 다져나갔다.
나는 내 영지를 왕국에서, 대륙에서 제일 튼튼한 영지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렇게 내가 열심히 영주 노릇을 하니 많은 이들이 기뻐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교단을 통해 제국에서 다시 요청이 왔습니다.”
특히 제국의 황자가 불만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황자, 황제 대리는 교단을 통해 계속 내게 연락을 보내왔다.
제국으로 오라는 연락이었다.
“슬슬, 상황이 안 좋나?”
내 물음에 레스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북부 산맥 남쪽은 아직 조용하지만, 제국 쪽은 다시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예상대로 마물들은 제국을 먼저 공격했다.
역시, 한번 뚫린 구멍은 메우기 어려운 법.
내가 열어놓은 문은 아직도 열려 있었다.
“곧 가겠다고만 전하도록.”
“안 가실 생각입니까?”
내 말에 레스티가 다시 물었다.
“가더라도, 제국으로 가는 것은 아니니까. 봉인지로 갈 생각이야.”
“그럼 여태 가만히 계셨던 이유가…….”
“마물 왕과 마물들이 좀 쏟아져 나왔지만, 봉인지에서 더 쏟아져 나와야 해. 그래야 마물들을 피해 마왕을 가두었다는 봉인 유적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슬슬 마물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으니, 이제 움직일 때가 된 것이었다.
마침, 공사도 끝났으니, 한 가지 일만 끝내고, 봉인지로 가야 할 듯했다.
나는 레스티와 이야기한 뒤에 바로 저택 지하로 내려갔다.
원래 있던 지하실을 지나, 더 아래로.
원래 단단한 땅이었던 저택 지하는 지금 텅 빈 지하 광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발레아와 집사장이 함께 만든 지하 광장이었다.
나는 같이 내려온 발레아를 보고, 넓은 지하 광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머릿속으로 한 가지 유물을 떠올리고, 작게 속삭였다.
“황실 금고 소환.”
지하 창고에 거대한 금고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