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4화
제4편 늦은 파견 보고
영지로 떠나기 전, 나는 여왕과 그레시아 공작을 만났다.
내가 발레아와 함께 여왕의 집무실에 찾아갔을 때, 여왕은 그레시아 공작과 다른 서기관들과 함께 열심히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사실, 여왕이나 재상, 그리고 영주가 하는 일 대부분이 저런 서류 검토와 도장을 찍는 일이었다.
그런데 영주가 영지를 놔두고 이렇게 밖으로 싸돌아다니고 있다니…….
여왕이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되니, 나 대신 영지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고마워졌다.
내가 집무실을 찾아가자, 여왕은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이했고, 공작과 서기관들은 자리를 비켜 주려 했다.
나는 공작에게 자리를 비키지 말고, 남아 있어 달라고 말했다.
“할 이야기가 있으면 여왕님을 뵙고 따로 이야기를 나누면 될 것 같습니다만.”
공작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두 분이 같이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괜히 두 번 말하기 귀찮았고, 공작을 따로 이해시키기도 쉬운 게 아니었다.
“파견을 끝내고 보고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신전으로 달려갔다고 들었어요.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 모두 걱정했어요.”
하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황당한 일이었을 게 분명했다.
“말들도 나왔겠군요.”
“파견이 잘 끝나서 다들 입을 닫고 있을 뿐이지. 마침 일을 잘 키우는 귀족이 파견을 떠나기 전에 죽기도 했고.”
공작은 말을 하면서 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혹시 그 일에 연관된 게 아니냐는 눈짓이었다.
연관 정도가 아니라, 직접 벌인 일이었지만, 나는 공작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래서 그동안의 일을 두 분께 말씀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역시, 보통 일이 아니었던 거죠?”
내 말에 여왕은 두 손을 모으고, 기대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서기관에게 지시를 내리던 냉철한 여왕이 아니라, 아카데미 응접실에서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소녀가 되어 있었다.
나는 제국에 다녀온 이야기를 두 사람에게 했다.
“신전으로 달려갔었던 이유는 그곳에 공간 이동 능력을 가지고 있는 신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발레아는 그 신관과 함께 제국으로 넘어가, 수도 근방에 감금되어 있던 2 황자를 구했습니다.”
원래, 예언자와 그녀의 호위를 죽이기 위해 제국으로 간 것이었고, 2 황자를 구한 것은 우연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이야기하기 힘든 예언자 이야기는 빼고, 2 황자를 구했다는 이야기만 했다.
뭔가 알맹이가 쏙 빠진 이야기였지만, 나머지 이야기만으로도 두 사람을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와, 제국에 가서 2 황자를 구했다고요? 황자는 지금 어디 있죠?”
“설마, 황제에게 들키지는 않았겠지? 황자가 없어진 것을 알면 황제, 아니 제국이 가만히 안 있을 텐데.”
처음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어서인지, 두 사람의 말투가 달라졌다.
그리고, 순수하게 놀란 여왕과 달리, 공작은 뒷일부터 걱정했다.
벌써 놀란 두 사람을 보며,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아직 도입부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질문은 나중에 대답하겠습니다. 아직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두 사람의 질문을 막고,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그 뒤에 구한 황자를 중심으로 교단의 도움을 받아서 사람을 모으고, 황자는 황제가 마물왕을 잡기 위해 친정을 떠난 틈을 타서 수도를 장악했습니다.”
내가 말을 잇자, 두 사람은 더는 묻지도 못하고 황당한 얼굴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수도의 반란을 들은 황제가 황당하게도 싸우고 있던 마물왕을 데리고 수도로 오게 되었고, 제가 투레 백작과 다른 기사들과 함께 마물왕을 쓰러뜨렸습니다…….”
“뭐라고? 제국 수도 앞에서 마물왕을 죽였다고?”
마물왕을 죽였다고 하자, 공작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뭔가 상식에 안 맞는 말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와, 정말요? 잘되었어요. 다치지는 않았죠?”
하지만, 여왕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기뻐하는 여왕의 모습을 보니,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아, 맞다. 여왕님은 기억하실 거예요. 황제가 데려온 마물왕은 여왕님이 저와 함께 봉인지에서 만났던 거인 마물왕이었습니다.”
내 말에 여왕의 눈이 엄청 커졌다.
“네? 그 마물왕이라면, 알렉스가 좀비거인이라고 불렀던 마물이잖아요. 뭘 해도 절대 죽지 않았던.”
확실히, 여왕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하기야 평범한 마물도 아니고, 마물왕을 만난 일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오래 걸렸지만, 죽기는 하더라고요.”
정말 미친 듯이 오래 걸리고, 죽이기도 힘들었지만, 결국 죽이기는 했다.
공작은 여왕과 내 대화를 듣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이걸 믿어야 하는 건가…….”
공작은 조금 전까지는 내 이야기를 믿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내가 크는 것을 본 사람이니 다른 사람들보다 더 믿기 어려울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이렇게 여왕이 직접 인정하고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을 터였다.
다만, 공작에게는 미안하게도 놀랄 만한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제가 마물왕과 싸우는 중에 황제가 비밀 통로를 통해 황궁 안으로 들어갔다가, 오히려 2 황자 쪽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내 말에 공작은 다시 놀란 얼굴이 되었다.
오늘 공작의 놀란 얼굴을 정말 많이 본 것 같았다.
평생 보아온 공작의 놀란 얼굴보다, 지금 본 놀란 얼굴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놀란 공작 얼굴을 보니, 그동안의 고생이 보람차게 느껴졌다.
“그래서 지금, 제국은 2 황자가 황제 대리를 맡아서 다스리고 있습니다. 저와 발레아는 일을 마치고, 이렇게 돌아왔고요.”
나는 그렇게 이야기를 끝냈다.
“말도 안 돼.”
이야기를 끝내자,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답지 않은 말.
자기도 모르게 한 말인 듯했다.
사실, 공작의 말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쭉 이야기를 늘어놓다 보니, 내가 생각해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이건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용사 이야기 같아요.”
여왕은 아직도 두 손을 모으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보니, 여왕의 표정은 동화책 속의 용사를 보는 것처럼 나를 보고 있었다.
여왕이 되어 바뀐 줄 알았는데, 아직 그녀는 어린 소녀인 모양이었다.
꿈꾸는 소녀로 돌아간 여왕과 달리, 공작은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었다.
결국, 내 말을 믿게 된 것 같았다.
그는 내 말을 믿게 되니, 생각할 게 많아진 모양이었다.
잠시 뒤, 고개를 든 공작이 내게 물었다.
“내가 알고 있는 백작이라면 신원을 숨기고 있었을 것 같은데, 설마, 중간에 신원이 알려졌나.”
왕국 수도에 올라온 뒤에도 공작의 날카로움은 줄어들지 않은 듯했다.
그는 짧은 내 이야기 속에서 다른 사실을 유추해낸 것이다.
“용병으로 숨기고 있었는데, 마물왕과 싸우다가 투구가 벗겨져서……. 꽤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습니다.”
수도 바로 앞에서 마물왕을 쓰러뜨려서인지, 소문이 퍼져나가는 속도가 엄청났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소문이 덩치를 불렸고, 수도를 떠날 때는 귀족들은 물론, 수도에 있는 제국인 모두가 내 이름을 다 아는 듯했다.
“별명도 생겼어요. 차르마니아에서는 ‘왕 살해자’라고 불리고 있어요.”
옆에서 끼어든 발레아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영어로 ‘킹 슬레이어’라면 멋있기라도 하지. 왕 살해자라니.
이건 오해를 사기 딱 좋은 별명이었다.
나는 발레아를 흘겨보았다.
사실, 황제를 죽인 것은 내가 아니라 발레아였다.
그런데, 내가 영 듣기 꺼림직한 별명을 얻어버린 것이었다.
근데 뭐.
사실, 발레아에게 시킨 것은 나였으니, 틀린 별명은 아닐지도 몰랐다.
내 대답을 들은 공작이 굳은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신원이 알려졌으면, 귀족이나 황자가 너를, 아니 샤를 백작을 그냥 놔둘 리가 없을 텐데…….”
공작의 말에 나는 왜 공작이 제일 먼저 내 신원에 대해 물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제국이 나를 잡아 놓을 거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여왕 바로 아래에서 왕국을 다스리고 있기에 떠올렸던 생각일 터였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작위를 준다고 하긴 했는데……. 제 나라는 카를로스 왕국입니다. 저는 카를로스 기사이고, 이곳이 내 영지가 있는 곳입니다. 일이 마무리된 뒤에 바로 돌아왔습니다.”
준다는 작위가 좀 대단했고, 작위 말고 더 엄청난 말도 듣기는 했다.
하지만, 어차피 당장 제국에 몸을 맡길 생각이 없었으니, 그 말까지는 할 필요가 없었다.
“떠날 때 황자, 황제 대리와 협상을 해 놓았습니다. 우리 왕국과 다른 나라들과 함께 봉인지에서 쏟아져 나올 마물왕과 마왕에 대해 대비를 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계약은 나중에 나와 따로 한 계약이 아니라, 처음 그를 구한 뒤, 교단의 대주교 앞에서 한 계약이었다.
다른 자잘한 계약이 더 있었지만, 처음 계약에서는 이 부분이 제일 중요했다.
이 계약으로 겨우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차르 제국, 이피로스 왕국 그리고 카를로스 왕국까지.
이리저리 사고도 많고, 얼렁뚱땅 정해지기도 했지만, 어찌 되었건 마물들과 마왕을 상대할 국제 연합이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당장은 제국과 카를로스 왕국, 이피로스 왕국만으로 이루어진 연합이었지만.
세 나라가 모두 봉인지 옆에 있는 강대국들이었고, 다른 나라들이라고 해봐야 남쪽의 소국들밖에 없었다.
결국, 대륙의 힘이 다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그 태반은 제국의 힘이었지만.
“이제 뒷일은 여왕님과 공작님께 맡기겠습니다. 저는 너무 영지를 오래 나와 있어서……. 인제 그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여왕과 공작은 다시 냉철한 정치가로 돌아온 듯했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한 일이……. 전부 다시 검토해야 할 것 같은데요.”
“제국이 협력해준다면, 반대하는 귀족들의 입도 막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 싫어하는 이들도 나오겠죠. 마냥 긍정적인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슬금슬금 물러났다.
“잠깐만요. 이런 엄청난 일을 던져놓고 그냥 갈 생각이에요?”
내가 물러나는 것을 보고, 여왕이 눈을 치켜세웠다.
바로 전에까지 귀여웠던 소녀는 어디 가고, 무시무시한 여왕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공작도 여왕과 같은 생각인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나에게도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황자가 마지막으로 변경백은 어떻겠냐고 물었었는데……. 거절을 하긴 했지만, 황자는 제 거절을 받지 않으셨던 것 같았습니다.”
비장의 무기는 ‘붙잡으면 제국으로 도망치겠다!’라는 정말 싼 티 나는 협박이었다.
다행히 내 협박은 잘 통한 모양이었다.
내 말에 여왕이 눈을 치켜세웠지만, 다시 내가 물러서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나는 그렇게 여왕과 공작에게 일거리를 가득 안겨주고, 왕국 수도를 떠났다.
나는 발레아와 퇴직서를 던진 벤자민과 함께 영지로 향했다.
정말, 오랜만에 돌아가게 된 내 영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