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3화
제3편 벤자민
발레아와 나는 그날 밤, 황실 금고 안을 오랫동안 구경했다.
창고지기가 퇴근해서 조용한 황실 금고는 우리 두 사람이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기에 좋은 장소였다.
유물과 여러 보물을 구경한 뒤, 새벽이 되기 전에 우리는 다시 내 침실로 돌아왔다.
금고로 가기 전, 침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내 단검으로 다시 이동한 것이다.
발레아는 바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고, 나는 짧은 수면 뒤에 방으로 찾아온 차도프 자작을 맞이했다.
나는 자작의 안내를 받아, 황실 도서관으로 향했다.
황실 도서관은 대륙 제일의 도서관답게, 수많은 장서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다른 도서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수많은 금서와 고대 제국의 문헌과 자료들까지.
교단의 손을 피한 모든 문헌이 이곳에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다행히 황실 도서관에서는 특별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도서관 자체가 유물인 것도 아니었고, 보안도 특별하지는 않았다.
다만, 도서관 지기가 신기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이었다.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의 위치를 알아내는 능력이었다.
도서관에 있는 수많은 책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능력이었지만, 아쉽게도 도서관의 책 말고는 쓸모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어차피, 책은 가져갈 필요가 없으니, 나는 도서관 지기에 대해 관심을 끊었다.
대신, 온종일 도서관에 틀어박혀 고대 제국의 문헌을 살펴보았다.
“설마, 고대 제국 문자도 읽을 수 있었습니까?”
도서관 지기도 자작도 내가 고대 제국의 책과 문헌을 술술 읽어내려가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지만.
나도 어렸을 때는 천재로 불리었던 사람이었다.
더구나, 내게는 알아보기 어렵거나, 확인이 필요한 내용을 설명해 줄 에고도 있었다.
정보창을 보게 해준 ‘용사 관리 체계 예비 에고’, 줄여서 구슬 에고는 내가 막혔을 때마다, 내게 적절한 설명을 해주었다.
그 덕에, 사흘 만에 황궁 도서관에 있는 고대 제국의 문헌들을 모두 독파할 수 있었고, 나는 마왕이 봉인된 후보지를 둘로 줄일 수 있었다.
사흘 뒤, 나는 자작에게 떠나겠다고 말했다.
“영지를 너무 오래 비워두었습니다. 우선 고국에 돌아가 영지를 돌아봐야겠습니다.”
떠나겠다는 말에 자작이 물었다.
“그럼, 마왕이 봉인된 장소를 찾는 것은…….”
나야, 없어진 삶에서 하루 정도 영지에 머무르기도 했었지만, 그건 나만 기억하는 일이었다.
발레아도 영지를 나온 지 많이 지났고, 영지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본지 무척이나 오래되었다.
“영지를 둘러보고 늦지 않게 출발하겠습니다. 출발하게 될 때 교단을 통해 연락하겠습니다.”
“연락이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자작은 아쉬워했지만, 내가 떠나는 것을 말리지 못했다.
그것은 황자, 황제 대리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백작 자리나 변경백 자리를 준다고 해도 받지 않겠지? 황제의 후계자 자리도 싫다고 했으니.”
황자는 아직도 내 거절이 마음에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저는 카를로스 왕국의 백작입니다. 작위를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여왕님을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황자의 말대로, 나는 당장은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
사실, 제국의 귀족 작위는 카를로스 왕국의 귀족보다 훨씬 좋은 자리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제국의 귀족 작위는 수렁에 잠겨있는 미끼일 뿐이었다.
마물 왕들을 꼬셔 봉인지와 제국 사이에 구멍을 뻥 뚫어놓았으니, 앞으로도 봉인지의 마물들은 제국 쪽으로 쏟아져 나올 터였다.
기껏 구멍을 뚫어놓았는데, 그 구멍을 내가 막을 수는 없었다.
나중에 모든 일이 해결되었을 때, 작위를 준다면 감사히 받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다행히, 두 마물 왕이 죽은 뒤, 제국 동부의 소란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하나 남은 마물 왕은 요새에 틀어박혀 움직이지 않았고, 다른 마물들은 제국군과 기사들이 정리해 나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직도 봉인지에서 마물들이 흘러나오는 중이라, 제국 동부가 전처럼 안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마물 왕 두 마리가 설칠 때에 비하면 적어도 지금은 희망이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자작도 황자도 떠나는 나를 말리지 않았다.
“당장은 필요 없다는 말이군……. 좋아! 그래도 임명장 정도는 가지고 있는 게 편하겠지. 황실 명예 기사 임명장이네. 적어도 제국을 돌아다니기는 불편하지 않을 거야.”
자작처럼 황자도 내가 무조건 제국으로 돌아올 것으로 여기는 듯했다.
나는 전에 봤을 때보다는 얼굴이 좋아 보이는 황제에게 인사를 하고, 발레아와 함께 황궁을 나섰다.
황제도, 자작도 내게 영지까지 호위대를 붙여주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런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그럼, 바로 알란 신관을 불러올까요? 공간 이동진 들을 재구축하고 있어서, 돌아오려면 며칠 걸릴 거예요.”
마지막으로 찾아간 교단의 대주교, 조아나가 그런 제안을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백작님 영지에서 제일 가까운 공간 이동진은 왕국 수도의 신전에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보다는 훨씬 빠를 거예요.”
“말을 타지는 않을 겁니다.”
“네?”
“빨리 갈 방법이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조아나의 제안을 거절한 뒤에, 반대로 교단에 관해 물었다.
내 물음에 조아나 대주교는 한숨을 내쉬었다.
“쉽지 않네요. 전 대주교는 마음대로 교단을 이끄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렇지도 않았어요.”
조아나가 입을 쭉 내밀고 푸념을 했다.
대주교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신전의 대주교실에는 그녀와 나, 발레아와 내 누이 엘레나밖에 없었다.
“장로들과 추기경들을 설득하는 게 만만찮아요. 황제가 죽고, 황자가 제국을 장악하지 못했다면 아예 말이 안 먹혔을지도 몰라요.”
생각해 보면, 조아나는 전 대주교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정식 절차로 대주교가 된 게 아니었으니, 장로나 다른 추기경들이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대주교의 능력을 얻지 못했다면, 아예 인정조차 안 했을 수도 있었다.
“천천히 바꾸는 중이에요. 우선 유물을 없애는 대신, 마물과 마왕을 막는 것을 우선으로 교리를 바꾸고 있어요. 마왕의 봉인을 깨고 나올 때, 교단이 앞서서 싸워야 하니까요.”
희생을 우선으로 하는 교단의 대주교다운 말이었다.
다만, 말을 하는 대주교가 다른 신을 믿고 있는 게 문제긴 했지만.
어쨌거나 교단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조아나가 알아서 잘 준비하고 있었다.
만족한 나는 대주교 뒤에서 말없이 듣기만 하던 누이, 엘레나 신관에게 인사를 한 뒤에 주교의 방을 떠났다.
셀린 여신을 믿게 된 뒤로 누이는 한 번 더 달라진 것 같았다.
사제가 된 뒤에 처음 봤을 때는 사제가 아니라, 누군가와 싸우고 싶어 하는 전투광처럼 보였었는데, 이제는 정말 사제처럼 보였다.
교단이 아니라, 셀린 여신의 사제였지만.
발레아와 나는 교단의 본단을 빠져나와, 광장으로 향하는 긴 계단 앞에 섰다.
황자가 권력을 잡은 뒤에 교단에 대한 제재가 사라져서인지 무수한 신도들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교단의 본단과 광장, 광장 너머의 황궁을 바라보았다.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그럼 갈까요?”
내 말에 발레아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고, 나는 발레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교단 앞에서 할 행동이 아니어서인지,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남쪽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검을 떠올렸다. 남쪽, 카를로스 왕궁에 있는 검을.
그리고, 작게 말했다.
“전송.”
말과 함께 주변의 광경들이 일그러졌다.
너무 먼 곳으로 이동해서인지, 한순간에 바뀌지는 않았다.
나는 일그러진 공간 속을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솟구치고 동시에 추락했다. 한순간에 감각이 엉망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내 옆에 있는 발레아는 느껴졌다.
발레아의 체온도, 발레아의 심장 소리도 전부 잘 들려왔다.
그녀 덕분에 안심하는 찰나, 다시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앞에 보이던 광장은 더는 보이지 않았고, 대신, 많이 보던 벽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맙소사, 알렉스? 아니, 샤를 백작님?”
놀란 음성이 내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그 음성을 확인하는 대신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머리 위, 벽에는 예상대로 검이 걸려 있었다.
‘기사의 검’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기사의 검’이 걸려있는 카를로스 왕궁의 중앙 홀이었다.
그러고 보니, 들려온 음성도 아는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확인해보니,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이피로스 왕국 수도에 남겨 놓고 왔던 벤자민이 놀란 눈으로 나와 발레아를 보고 있었다.
다행히, 중앙 홀에는 벤자민 밖에 없었다.
벤자민은 눈을 끔벅이더니, 어이없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설마, 방금 그거 공간 이동은 아니죠? 설마, 공간 이동 능력까지 쓸 수 있게 된 것은 아니겠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발레아의 허리에서 팔을 내렸다.
팔을 내렸지만, 발레아는 계속 내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 모습을 보고, 벤자민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뭔가 벤자민의 표정이 전보다 다채로워진 듯했다.
“이 모습을 보면, 백작님의 두 번째 부인 자리를 노리던 영애들이 크게 실망하겠군요.”
오랜만에 만난 벤자민은 왕국의 정치에 물든 관료가 아니라, 아카데미에서 보던 선배 같았다.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은 벤자민의 모습이 반갑기는 했지만, 그때와는 사정이 달랐다.
나는 팔짱을 끼고, 벤자민에게 물었다.
“맡긴 일이 많았는데, 벌써, 이피르스 왕국에서 돌아온 건가?”
“……전부 잘 처리했습니다. 협정도 잘 마무리되었고, 앞으로 이피로스 왕의 지원도 약속받았습니다.”
어디선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벤자민은 내 물음에 잘 대답했다.
그보다, 그가 달려온 길을 생각하면, 이피로스에 있었던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을 텐데, 그 일을 다 처리했다니.
어찌 되었건 벤자민은 훌륭한 관료였다.
“그런데, 이 시간에는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왕국 안에 있는 소환이 가능한 내 장비가 ‘기사의 검’ 밖에 없어서, 검이 있는 중앙 홀이 빌 만한 시간에 전송한 것이다.
그런데 들키다니.
다행히 아는 사람이어서 입을 막을 필요까지는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그가 왜 여기 있는지 궁금했다.
“왕국에 돌아온 김에 ‘기사의 검’을 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백작님을 만나게 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그는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기사단을 쫓아 이피로스 왕국을 다녀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동안 왕국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왕국 밖에서 지켜보니, 전부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짓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뭔가, 좋은 이야기가 있을 듯한 말이었다. 나는 조용히 그의 회한을 들어주었다.
“생각해 보면, 샤를 백작님이 무슨 생각으로 여러 일을 해왔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백작님도 자신의 성공을 위해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그게 맞긴 한데…….
나는 입을 꾹 닫고 그의 말을 들었다.
“지나고 보니, 백작님은 사람들을 위해, 이 왕국을 위해, 더 많은 사람을 위해 싸우고 계셨습니다.”
벤자민의 말에 발레아가 마구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니, 사람들을 구하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전부 나 살자고 한 것인데…….
“백작님께 다시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혹시 용서되신다면 이 몸을 써주십시오.”
그의 말에 나는 반색을 하고 그의 손을 잡았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조금 오해를 한 모양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아카데미를 다닐 때부터 노렸던 인재였다.
그는 영지를 맡길 관료에다가, 전략과 전술에 능통한 똑똑한 참모였다.
100번을 오해해도 상관없었다. 그를 내 밑에만 둘 수 있다면 충분했다.
그렇게 되어, 나와 영지로 같이 갈 사람이 한 사람 더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