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1화
제1편 황실 금고 (2)
역시 차르 제국은 대륙 유일의 초강대국이었다.
카를로스 왕국과 다르게 여러 개로 나뉜 황실 금고였지만, 그 금고 하나에 들어있는 유물은 더 많아 보였다.
다만, 내가 처음 들어온 방은 각종 소품이 모여 있는 방이었다.
등이나 찻잔, 주전자에서 테이블까지.
전부 특별한 것 없는 생활용품들이었지만, 다만 이 물건들은 전부 유물이었다.
싸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평범한 유물들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먼저 이 방에 들어온 것이다.
처음 단검에서 능력을 얻었을 때처럼 능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이런 소품들이 있는 방에 들어올 일은 없겠지만,
내가 제국 황실 창고에 들어온 이유는 그런 이유도 아니었다.
물건들을 살펴본 뒤에 회귀해서 빼내려 한 것도 아니었고.
황실 금고에 온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나는 이 유물들에서 용사들의 기억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조직’마저 마왕과 대전쟁 때의 일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내가 직접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오랜만에 유물 주머니에서 단검을 꺼냈다.
카트린이 준 라텐하마르 가문의 단검. 불새의 단검이었다.
[저를 까먹은 줄 알았습니다만…….]
오랜만에 꺼내서인지, 단검의 에고는 내 머릿속에서 무뚝뚝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처음 대공녀가 단검의 에고를 되살렸을 때는 이렇게 자유롭게 말하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단검의 에고는 인간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에고가 투덜거렸지만, 단검은 오래전부터 내 소유가 되어 있었다.
“전처럼 여기 있는 유물 중에 용사들이 썼던 유물이 있는지 찾아봐.”
[네. 네. 알겠습니다.]
에고는 투덜거리면서도, 내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음. 지금 오른쪽에 있는 등과 네 걸음 앞에 있는 작은 조각상은 본 적이 있습니다.]
[저 스스로 빛을 내는 등은 정찰을 주로 다녔던 용사 물건 같습니다. 그리고, 조각상은 신관 용사 중 한 명이 가지고 다녔던 물건입니다.]
이 많은 유물 중에 둘이라.
생각보다 숫자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나았다.
거기다, 여긴 일상 용품을 모아 놓은 곳이었다. 용사들이 쓰던 물건들이 많이 있을 리 없었다.
나는 단검 에고가 말한 유물들을 살펴보았다.
나는 먼저, 스스로 빛을 뿌린다는 등을 살펴보았다.
비슷한 다른 유물들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였다.
나는 등에 마나를 밀어 넣어보았다.
부우웅.
원형 등 한쪽에서 빛이 쏟아졌다.
신기하게도 손전등처럼 한쪽만 비치는 유물 등이었다.
확실히 밤에 주위를 살필 때 좋아 보였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손전등을 닮은 이 등은 아무런 기억을 보여 주지 않았다.
나는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그동안 용사가 썼던 유물을 여러 번 보고 만졌었다.
그 유물 중에 기억을 보여 준 유물은 극히 적었었다.
나는 등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조각상을 살펴보았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작고 낡은 조각상이었다.
뭔가 동물을 형상화한 조각상 같은데. 무슨 동물인지 알 수 없었다.
단검의 에고도 다른 설명이 없었고,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나는 조각상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우우우우웅.
조각상이 떨렸고, 세상이 어두워졌다.
이번에는 성공이었다.
다시 세상이 밝아졌다.
어두운 밤.
나는 벽만 남아 하늘의 별이 가득 보이는 건물 안에 앉아 있었다.
앞에는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고, 모닥물 너머 흐릿하게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평화롭고 안온한 느낌이 드는 모습이었지만, 폐허가 된 건물과 엉망이 된 옷을 입고 있는 지친 사람들 때문에 그런 느낌은 금방 사라졌다.
그렇게 모닥불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작은 음성이 들려왔다.
사람들의 모습처럼 지친 목소리였다.
“신관분들은 억울하지도 않나요?”
“네?”
내 입에서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에 빙의한 상대는 여자인 모양이었다.
“원래 유물도 용사도 전부 신관분들이 쓰던 능력들을 훔쳐서 만든 거잖아요.”
목소리를 따라 시선이 돌아갔다.
옆에 앉아 있는 여성이 말을 하고 있었다.
가죽 갑옷을 입은 날카로운 인상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목소리처럼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아니, 피곤하기도 하지만, 지치고 낙심한 모습이었다.
쪼그려 앉아 있는 그녀의 허리에는 조금 전에 확인했던 등이 달려 있었다.
이 여자가 단검 에고가 말한 정찰 용사인 모양이었다.
여자의 말에 내가 빙의한 여자 신관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여자는 거기서 말을 끝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런데, 이렇게 뒤처리까지 신관분들에게 부탁하다니……. 나 같았으면 문을 걸어 닫고 신경도 안 썼을 거예요.”
“모른 척해봤자 멸망을 피할 수는 없으니까요. 더구나, 이제는 화를 낼 상대도 없고요.”
신관은 품에서 조각상을 꺼내 두 손에 쥐었다.
“흥, 제국은 망할 만했어요. 마왕도 그래. 제국만 망하게 하면 그만인데, 왜 멈추질 않는 건지…….”
“글쎄요. 그의 분노는 저희가 알 수가 없는 거니까요.”
신관의 말을 끝으로 다시 조용해졌다.
무너진 건물 안에는 모닥불이 타는 소리만 들려왔다.
아쉽게도 이번 기억에는 특별한 정보는 없어 보였다.
단지 평범한 전쟁의 기억일 뿐이었다.
다른 여러 기억도 많을 텐데, 조각상에 왜 이런 기억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모닥불을 보며 기억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잠시 뒤.
나는 기억에서 깨는 대신, 다른 광경을 보게 되었다.
저벅, 저벅.
무너진 건물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건장한 세 남자였다.
모닥불로만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나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한 명은 나도 여러 번 보았던 사람이었다.
왕궁에서 그림으로 보기도 했고, 수련검 속에서 싸우기도 했었다.
바로, 왕국의 초대왕, 카를로스 용사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너무 유명한 사람이라 모를 수 없었다.
제국 황궁에도 그림이 걸려 있고, 동화책에도 나오는 사람.
바로 차르 제국을 세운 빌헬름 황제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중앙에 선 사람은 빌헬름 황제도, 카를로스 용사도 아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양옆에 미래의 황제와 왕을 세워놓은 사람은 무척 평범해 보였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을 한 남자.
이상하게 친숙한 느낌의 남자였다.
그는 모닥불 주변에 앉아 있는 이들을 보며 말했다.
“드디어, 전부 모였습니다. 이제 반격을 시작합니다.”
크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주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지쳐 보이던 사람들이 다른 표정을 지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빙의한 신관도 마찬가지였다.
환호성도, 구호도 없었지만, 모두 결연한 표정을 지은 채로 건물 밖으로 나갔다.
이 건물은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뻥 뚫린 문을 나서자, 지평선까지 평야가 펼쳐져 있는 게 보였다.
이 어두운 밤에 지평선을 알아볼 수 있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하늘에 펼쳐져 있는 별들이, 지상에도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이 들고 있는 횃불이 너른 들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린 소년, 소녀, 노인과 임산부, 병사, 기사와 주술사까지.
모두가 횃불을 들고 있었다.
건물을 나선 사람들, 용사들의 맨 앞에 친숙해 보이는 남자가 섰다.
그는 들판에 가득한 사람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 살아남은 제국인들, 도망치고, 숨어 있던 유민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우리는 더이상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을 겁니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마나가 가득 실린 목소리는 벌판 끝까지 퍼져나갔다.
“이제, 이 땅에서 마물들을 몰아냅시다!”
그의 마지막 말과 함께 세상이 어두워졌다.
기억이 끝난 것이었다.
기억이 끝나자, 나는 다시 황실 금고 안에 서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에 대단한 광경을 보기는 했지만, 뭔가 중요한 정보를 얻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왜 이 기억이 있었는지는 알 것 같았다.
반격 순간의 기억이라니.
그래도 나쁘지 않은 구경을 한 셈이었다.
“그런데 누구지?”
다시금 기억 속에서 본 남자를 떠올려 보았지만, 그가 왜 친숙하게 느껴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것에 매달릴 이유가 없었다.
나는 조각상을 원래 자리에 올려놓고, 출입구로 되돌아갔다.
입구의 문은 닫혀 있었다.
이번에도 구슬을 문에 대야 할 모양이었다.
나는 문에 손을 올려보았다.
유물이라서 그런가. 촉감이 이상했다.
이어서 나는 문에 마나를 흘려 넣어보았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역시 자작인 준 구슬이 아니면 열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구슬을 문에 가져다 댔고, 문은 바로 열렸다.
열린 문을 통해 복도로 나섰다.
복도는 그대로였다.
의자에 앉아 있는 로브를 뒤집어쓴 금고지기의 뒷모습도 달라지지 않았다.
금고지기도 내가 나온 것을 알았을 테지만, 그는 약속한 대로 아는 척하지 않았다.
나는 다음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반나절 동안 나는 모든 방을 돌아보았다.
액세서리를 모아 놓은 방.
방어구 방.
무기 방.
유물이 아니라, 금은보화를 쌓아놓은 방까지.
방마다, 용사가 썼던 유물들이 있었다.
생각보다 숫자가 적었지만, 그래도 방마다 한두 개 이상은 있었다.
기억도 몇 번 더 볼 수 있었다.
용사들이 훈련을 받는 기억과 마물들과 싸우는 기억. 유물의 주인이 죽는 기억까지.
알고 있거나, 내게 가치가 없는 기억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다행히도 아예 쓸모없지는 않았다.
그 기억들 덕분에 용사들과 마왕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동안 의심했던 대로, 용사들은, 아니 용사들의 능력은 고대 제국이 만든 것이었다.
제국은 신관들의 능력을 연구해 유물을 만들고, 용사들을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마왕은 그들이 만든 첫 번째 용사였다.
사실, 검 조각으로 마왕의 기억을 봤을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었다.
유물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본 것은 유물의 주인이 용사였을 때와 신관이었을 때밖에 없었다.
마왕이 신관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되었고, 결국, 마왕도 용사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마왕은 제국이 만든 첫 번째 능력자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국은 첫 번째 능력자를 다른 세계에 추방해 버렸고, 그 능력자는 마물들을 이끌고 이 세상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정말 자업자득인 건가…….”
나는 왜 교단이 그토록 제국이 한 일을 숨기려 하고, 유물을 없애려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조직은 마왕이 봉인을 다시 풀고 세상에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교단은 또다시 마왕이 만들어지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었다.
다들 그 당시에는 자기 방식으로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다만, 그 모든 일이 내게 방해가 되었을 뿐.
어느 정도 상황을 알게 되었지만, 사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결국, 마왕을 쓰러뜨려야 했다.
아쉽게도 이곳에서는 마왕이 봉인된 장소를 알아낼 수 없었다.
“결국, 도서관을 뒤져봐야 하나.”
자작, 아니 조직이 후보지랍시고, 여러 장의 지도를 주었지만, 그곳을 모두 확인할 수는 없었다.
최대한 범위를 줄여야 했다.
다만, 도서관에 가기 전에 이곳에서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조직이 이 황실 금고의 유물을 몰래 빼돌린다는 말을 듣고 떠올린 것이었다.
조직이 할 수 있다면 내가 못 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마지막 방의 중앙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에 손을 댔다.
방마다 마나를 밀어 넣어 확인해 본 결과, 여기가 약점이었다.
나는 바닥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