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0화
제25편 황실 금고 (1)
황제는 소파에 누운 채로 자신의 배를 가리켰다.
“밖에는 멀쩡하다고 말해 놓았지만, 포션을 먹는 게 너무 늦어서 장기들이 꽤 망가진 모양이야.”
내 생각보다 죽은 황제와의 싸움이 치열했던 모양이었다.
그랬으니 발레아가 바로 참견하기 어려웠겠지.
“신관들이 주저하는 것을 보니, 오래 살지도 못할 것 같고. 후사를 못 이은다는 것도 거기서 나온 말이지. 사실, 결혼이나 자식을 가질 생각도 없었고 말이야.”
“내가 죽게 되면 귀족 놈들은 형님의 자식들을 황제 자리에 올리려고 할 텐데, 그 꼴을 보고 싶지는 않거든. 뭐, 시원한 북쪽 땅으로 가족들을 보낼 생각이기도 하고.”
농담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이건 농담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말에 반박했다.
“저는 제국인도 아니고, 카를로스 왕국의 귀족입니다.”
내 말에 황자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자네는 수도 앞에 나타난 마물 왕을 쓰러뜨린 영웅이니까, 제국은 용사의 그런 하찮은 약점은 신경 쓰지 않는 법이지.”
“그런…….”
내가 다시 반박하려 하자, 황자가 손을 들었다.
“나이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어차피 양자라는 것은 황위 계승권을 주겠다는 말일 뿐이니까.”
그의 말 대로였다.
귀족이 내란을 일으켜, 강제로 전대 왕의 양자가 되어 왕이 된 예도 있고, 동생이 형의 양자가 되어 다음 대 왕이 되는 일도 없지 않았다.
몸이 망가진 황자 입장의 생각하지만, 아예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하지만, 듣는 나는 황당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거절하겠습니다.”
나는 딱 잘라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황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아직 시간은 있으니……. 잘 생각해 보도록.”
나는 바로 나가지 않고 황자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내 말에 황자는 씩 웃었다. 무척이나 음울한 미소였다.
“나는 복수가 목적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복수는 형님만이 아니라, 이 제국도 포함된 거라서 말이야. 오래 살 수 있었으면, 내가 열심히 할 생각이었는데…….”
황제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양자로 들어오던가. 낄낄.”
나는 황제의 말을 듣고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냥 복수에 불타고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미친 사람이었다.
심약한 사람은 회까닥하면 무섭다더니, 그 말대로였다.
내가 복도로 나서자, 어느새 내 옆에 발레아가 걷고 있었다.
발레아는 손톱을 깨물며 자책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가 실수한 모양이에요.”
“실수?”
나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발레아는 정말 잘해왔었다. 그런데. 실수라니.
발레아가 말을 이었다.
“그때 요하네스 황자를 그냥 죽게 내버려 두는 거였는데 잘못했어요.”
이어진 발레아의 말은 예상 밖이었다.
“황자가 알렉스를 양자로 둘 생각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감히 양자로 제국을 잇게 할 생각을 했다니!”
황자의 이야기를 발레아도 들었던 모양이었다.
제국 황궁의 본궁은 발레아의 영역 안이었다. 방음벽으로 막는 게 아니라면 모두 그녀가 들을 수밖에 없었다.
황자의 이야기를 들은 발레아는 진심으로 화를 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확실히 발레아는 상대의 신분과 지위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황자건 기사건, 평민이건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이라고 여기면 가차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어떻게 그렇게 잘하는지……. 지금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발레아는 눈썹을 찡그리며 계속 말했다.
“알렉스라면 잿더미가 된 제국 위에다가 새로운 제국도 만들 수 있는데 말이에요.”
발레아의 말에 슬쩍 소름이 돋았다.
이번에도 나를 치켜세우는 말이었지만, 역시 발레아의 말은 뭔가 무서운 기분이 들게 했다.
그렇게 황자를 욕하던 발레아가 나를 보며 물었다.
“지금 죽이면 안 되겠죠?”
“안 돼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말을 하는 황자였지만, 지금은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어차피, 오래 살기도 어렵다는데 일찍 죽일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니, 형제의 싸움이 심해져서 발레아가 포션을 늦게 준 게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아는 발레아의 실력이라면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었다.
아마도, 내 부탁을 잘못 이해했을 테지.
다른 때였으면, 주의를 주었겠지만, 황자의 생각을 알게 되었으니, 주의를 줄 수 없게 되었다.
“실수가 아니에요. 잘했어요. 항상 발레아에게 고마워하고 있어요.”
나는 자리에 멈춰서서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내 말에 발레아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아버지에게 칭찬을 들은 어린 소녀같이,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잘한 건가요? 다행이다. 앞으로도 잘할게요. 맡겨만 주세요.”
여기서 더 잘하는 것은 솔직히 조금 곤란했지만, 나는 그녀의 말에 웃어주었다.
황자의 부탁을 거절했지만, 황자는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이미 주위에서 황제로 인정받고 있었던 그는 ‘황제’의 이름으로 황실 금고와 황실 도서관의 출입을 허락해주었다.
나는 바로 황실 금고로 향했다.
한 나라의 권력자들은 대부분 생각이 비슷한 모양이었다.
카를로스 왕국의 왕실 창고도, 제국의 황실 금고도 모두 본궁 지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침대 아래에 금고를 넣어두어야 안심이 되는지, 도무지 그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웃기게도, 황실 금고로 나를 안내하는 사람은 전에 조직의 일원으로 나를 찾아왔던 차도프 자작이었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며 내게 사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원래 황실 집사장이 해야 할 일이지만, 집사장이 죽어서 제가 하게 되었습니다.”
“대단하군요. 죽은 황제와 같이 다닌 것을 사람들이 알고 있을 텐데, 이렇게 다시 활동하다니.”
“저야 자작에 불과하니까요. 실무자로 황제에게 끌려다녔으니, 실무자가 필요하게 되면 또 불려 다니는 거죠.”
자작에 불과하다고?
제국 자작도 아니라, 왕국 자작 자리를 얻기 위해 그토록 노력한 나는 어떻게 되는데?
“아, 자작 작위가 별로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제국 수도에는 작위를 가진 귀족들도 많고, 제 영지가 뭔가 이름있는 영지도 아니라서요.”
내 표정을 보았는지, 그가 바로 변명했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 조직이 손을 쓴 게 아닌가요?”
내 말에 그는 슬쩍 웃었다.
“사실 그런 것도 있기는 합니다. 그래도 뭐, 황자만 모르면 되는 것이니까요. 어차피 같은 귀족끼리 죽여댈 이유도 없고요.”
저런 여유라니.
오랫동안 전통을 유지한 귀족이라서일까.
치열하게 살아온 반쪽짜리 귀족은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렇게 황궁 계단을 한참 동안 내려가니, 닫힌 커다란 문이 나왔다.
카를로스 왕궁에 있던 왕실 창고보다 훨씬 크고 튼튼해 보이는 문이었다.
사실, 황궁 깊은 곳에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발레아가 이 아래에는 영역을 펼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왕실 창고도 그랬지만, 이 제국 금고도 뭔가 대단한 유물로 지켜지는 것일 테지.
이 두꺼운 문도 유물이 분명했다.
그리고, 문 양쪽에는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는데, 모두 상당한 실력의 기사들이었다.
“이분이 황제 대리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자작은 품에서 작은 구슬을 꺼내 기사들에게 건네주었다.
작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구슬과 비슷한 구슬이었다.
저것도 유물일 테지.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구슬 에고에게 물으면 저 작은 구슬이 뭔지 알 수 있을 테지만, 나는 따로 확인하지 않았다.
어차피 신분 확인용 유물일 테니.
내 예상대로였다.
기사들은 구슬을 확인한 뒤에 문에 구슬을 가져다 댔다.
문에 새겨진 문양이 희미하게 빛을 뿌리더니,
그그그긍.
문이 활짝 열렸다.
기사는 열린 문에서 구슬을 빼내, 내게 건네주었다.
“구슬을 몸에서 떼지 마십시오. 그리고 열람만 가능합니다. 물건을 숨겨서 가지고 나올 시에는 목숨이 위험할 테니, 시험해 보지 마십시오.”
조금 걱정하는 듯한 말을 들으니, 이 기사들도 나에 대해 들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황자의 허락을 받아 황실 금고로 찾아온 외부인이라면 다른 사람이 있기 어려울 터였다.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내가 구슬을 받자, 자작이 뒤에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자작을 바라보았다.
역시, 자작이 나를 안내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지원을 위해서인지, 감시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직’은 최대한 내 옆에서 나를 지켜볼 모양이었다.
그러든 말든 나는 상관없었다.
사실, 죽지 않고 이번 삶을 이어가는 것은 반쯤 포기했다.
일을 모두 처리하려면 무척이나 긴 삶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이 삶을 저장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최대한 정보를 모아,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
황실 금고 안은 생각보다 훨씬 수수했다.
평범한 돌바닥과 돌벽으로 이루어진 넓지 않은 복도가 쭉 이어져 있었다.
복도 양옆으로는 여러 문이 있었고, 복도 한쪽에는 책상과 그 뒤에 로브를 깊게 눌러쓴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카를로스 왕실 창고에서 본 창고지기와 비슷해 보였다.
“아시겠지만, 이곳의 물건은 공식적인 허락이 있지 않은 한 외부로 반출할 수 없습니다.”
생김새만이 아니었다. 말하는 것도 그때와 정말 비슷했다.
“그리고, 이 황실 금고는 카를로스 왕국의 왕실 창고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유물입니다. 제가 이 유물을 관리 중이니, 저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창고에 훼손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거기다, 카를로스 왕실 창고라는 말까지.
분명, 이 남자는 카를로스 왕실 창고에 있던 창고지기와 연관이 있었다.
“그리고, 원래 제가 따라다니면서 지켜봐야 하지만……. 따로 연락을 받았으니, 저는 이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따로 말이 없어서 조직에서 말을 전하지 않았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지 않는다라…….
따지고 보면, 작은 편의에 불과했지만, 내게는 나쁘지 않은 도움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 복도에 늘어서 있는 문들을 가리켰다.
“방마다 종류별로 유물을 모아 두었습니다. 이곳에 들어왔을 때처럼 구슬을 방문에 대면 열릴 것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옆을 지나갔다.
그를 지나가자, 뒤에서 말이 들려왔다.
“……혹시, 카를로스 왕실 창고에 있던 검에 대해 아십니까?”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검을 말하는 겁니까?”
“카를로스 용사의 두 번째 검. 죽음의 검을 말하는 겁니다.”
생각지도 못한 물음이었다.
그리고, 그 검은 지금 내 가슴에 있는 유물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나는 당연히 시치미를 뗐다.
“왕실 창고에서 보기는 했지만, 그걸 왜 내게 물어보는 거죠?”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내 말에 그는 로브를 숙이며 내게 사과했다.
그도 뭔가 이유가 있어 보였지만, ‘조직’이 주위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아는 척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몸을 돌려, 첫 번째 문에 구슬을 쥔 손을 올렸다.
그그긍.
문이 열리고, 내부가 보였다.
환한 빛들이 눈에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