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9화
제24편 적과의 동침
자작의 말은 황당한 말이었지만 다시 보면 그럴듯한 말이기도 했다.
나는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
다른 함정은 없어 보였고, 아직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죽지 않으려고 열심히 떠드는 바람에 정작 할 말을 못 할 뻔했군요.”
자작은 말을 하며 있지도 않은 땀을 닦는 시늉을 했다.
그 뒤에 그는 마왕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마왕은 인간이 맞을 겁니다. 기록도 그렇고, 고대 제국을 부수면서 마왕도 자신이 제국인이라고 말했고요.”
확실히 내가 본 기억대로였다.
하지만, 자작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마왕과 싸웠던 고대 제국과 용사, 그리고 대륙인 모두는 그를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손가락을 꼽으며 그 이유를 이야기했다.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그 강대한 힘, 마물과 마물 왕을 통솔하는 능력을 보고 그를 인간으로 여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고름이 가득한 그의 괴기한 모습도 인간으로 여기기 어렵게 만들었고요.”
기억에서 본 그의 강대한 마나와 마물들을 통솔하는 능력은 사람으로 여기기는 어려울 듯했다.
그런데, 마왕의 몸에 고름이 가득했다고?
그 말에 나는 기억에서 느꼈던 통증이 떠올랐다.
세상 가득 오염된 마나와 몸속의 마나가 충돌을 일으키는 고통.
‘그런 고통을 느끼는데 피부가 멀쩡할 리는 없겠군.’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도, 자작의 말은 계속 들려왔다.
“마왕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마왕은 고대 제국인이 맞고, 돌연변이 마물들처럼 마나가 오염되어서 마물이 된 게 아닐까 하는 의견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건 아니었다.
마왕의 몸속에 있는 마나는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마나였다. 피부가 어떻게 변했던 그의 몸도 사람 그 자체였고.
마왕이라 불렸던 인간은 오염되지 않았었다.
“사실, 조직도 마왕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거대한 마물이 아니라 인간에 가까웠다는 것과 인간이라 볼 수 없는 강대한 마나는 물론, 용사들이 사용하는 수많은 능력을 똑같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도무지 죽일 방법을 못 찾은 용사들이 그를 봉인했다는 것 정도입니다.”
생각보다 조직은 아는 게 많지 않았다.
투레 백작에게 괜히 말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쉬워하는 내 표정을 보자, 자작은 머뭇거리며 다시 말했다.
“아, 한 가지 더, 이건 조직에서도 전에 오는 이야기에 가깝긴 하지만, 용사들은 마왕을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꺼낸 이야기도 풍문에 불과한 이야기였다.
결국, 마왕에 관한 이야기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조직이 직접 찾아와 주었으니, 물어볼 말들이 있었다.
“교단과 달리, 조직은 고대 제국의 지식과 유물을 보관하고 있죠?”
교단이 수백 년간 고대 제국의 유물과 지식을 빼앗고 지웠다면, 내가 본 조직은 유물을 사용하고 지식을 이어오고 있었다.
유물을 빼앗고 부수던 교단도 유물을 모아놓은 곳이 있는데, 조직이 없을 리가 없었다.
내 말에 자작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있기는 합니다만…….”
“괜찮습니다. 위치는 알려주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장소를 알려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있는지만 알면, 어떻게든 찾을 방법이 있을 테니.
하지만, 자작이 난감한 표정을 지은 것은 위치를 알려주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게, 조직이 유물이나 장서를 따로 보관하는 장소를 만들어 놓지는 않았습니다.”
“방금 있다고 하셨습니다만.”
자작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제국 황실 금고와 황실 도서관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
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조직과 황실과 같이 쓰고 있다고 할까요? 대대로 황실 금고지기와 도서관 사서를 조직원들이 맡고 있었으니까요.”
“맙소사.”
절로 그런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자작의 말은 조직은 금고지기와 사서를 통해서 황실 금고의 유물과 도서관의 장서들을 마음대로 빼돌려 쓴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어이가 없었다.
제국을 뒤에서 조종하는 게 조직이라는 말이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이게 알려지면, 제국이 뒤집힐 일이 분명했다.
자작은 그런 비밀을 내게 해준 것이었다.
나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뜻을 직접 보여준 것이었다.
고마운 일이었지만, 나는 아직 자작도 조직도 믿을 수 없었다.
지금 내가 믿고 있는 것은 내 능력 ‘사자 회귀’였다.
“그럼, 유물들을 살펴보려면, 요하네스 황자에게 부탁하면 되겠군요.”
내 말에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물 왕을 처리하고, 새로운 황제가 되게 도와주셨으니, 충분히 허락을 받을 겁니다.”
“아직, 요하네스 ‘황자’이십니다.”
내 말에 자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분이 없으니까요. 조직도 찬성한 일입니다. 저희 쪽 파벌이나 반대파벌이나 다른 대안이 없거든요. 사실, 조직은 황제가 죽기 전에 황제에게서 손을 뗐습니다.”
자작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중간에 황제와 헤어진 것도, 요하네스 황자와 죽은 황제가 직접 붙어 결론을 짓게 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황제와 같이 다녔다고?
그럼 황실 집사장 대신, 황제와 같이 다녔다는 귀족이 이 자작이란 말인가?
“조직은 이 기회에 요하네스 황자의 실력을 확인해볼 생각이었습니다. 뭐 나쁘게 말하면 이기는 편 우리 편이라 할까요.”
자작은 고개를 저으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요하네스 황자가 이겼으니, 조직은 열심히 황자를 도울 생각입니다. 많이 약해졌다고 해도, 봉인지의 수많은 마물을 막아 내려면 제국이 필요하니까요.”
그는 거기까지 말한 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갔다.
“유물과 장서에 대한 것은 금고지기와 사서들에게는 미리 말해두겠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카를로스 왕궁 때의 일이 떠올랐다.
카를로스 왕실 창고에도 특이한 창고지기가 있었다.
“설마, 제국 말고 다른 왕국도…….”
“뭐, 어느 정도는……. 그렇죠.”
내 말에 자작이 말을 얼버무렸다.
내 상상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말이었다.
카를로스 왕국 왕실 창고지기가 ‘조직’ 소속이라는 확답은 받지 못했지만, 조직의 힘이 얼마나 퍼져 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지금껏 내가 싸우고 있었던 조직은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곳이었다.
마왕에 대해 조직은 아는 것이 많지 않았지만, 어디를 가봐야 할지는 알게 되었다.
내가 질문을 멈추자, 자작이 물었다.
“궁금증은 다 풀리셨습니까?”
그렇지는 않았다. 아직 물어볼 게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어보죠.”
나는 오래된 질문을 꺼내놓았다.
“마왕이 봉인된 장소는 어디입니까?”
내 물음에 자작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놀랍다는 표정과 반가운 표정.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표정들이었다.
“안타깝게도 봉인 장소는 용사들이 후세에 전하지 않았습니다. 조직도 알 수 없었고요.”
시작은 부정적인 말이었지만, 이어진 말은 그렇지 않았다.
“알려지지 않았다고 조직이 찾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단이 수백 년간 이단 신전을 찾은 것처럼 조직도 봉인지가 어딘지 계속 찾아왔습니다.”
그는 품에서 몇 장의 종이를 꺼냈다.
지도처럼 보이는 종이들이었다.
그는 그 지도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게 저희가 찾은 후보들입니다. 전부 봉인지에 있습니다. 모두 마물 왕들이 지키고 있는 유적들입니다.”
나는 지도를 보다가 다시 자작을 보았다.
자작은 기대에 찬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왜 자작이, 아니 조직이 나와 손을 잡고자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이 유적들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겁니까?”
내 말에 자작은 진심을 담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저희 조직이 전폭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자작의 말에 따르면.
조직은 봉인지 밖으로 마물 왕들이 쏟아져 나왔을 때, 검호와 기사들을 모아 봉인지에 있는 유적들을 확인하려 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다른 왕국으로 마물 왕들을 보내려던 그 계획은 예지 능력을 잃은 예언가와 ‘적대자’로 불리는 자로 인해 망가져 버렸고.
조직은 마왕을 상대하기는커녕, 마왕이 풀려날 곳도 확인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조직이 ‘적대자’일 거라고 생각되는 나에게 이렇게 낮은 자세로 말하는 것은, 결국, 내가 ‘마물 왕’을 홀로 쓰러뜨린 실력자이기 때문이었다.
자작이 떠나고 나는 지도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묘하게 일이 꼬여버린 것 같았다.
전부 내 정체, ‘적대자’라는 것을 들켜서 생긴 문제였다.
문제가 생길 거로 생각했지만, 내 생각보다 문제가 훨씬 커져 버렸다.
더구나 문제가 생겼다고, 바로 회귀할 수도 없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 일들은 또한 조직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었고.
내게도 꼭 필요한 일들이었다.
“이번에는 다 끝날 때까지 죽으면 안 되겠군.”
조직과 손을 잡는 것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건 조직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자작은 방을 떠나며, 내 정체를 최대한 숨겨주겠다고 말했다.
‘적대자’와 내가 동일인이라는 것을 조직안에서도 최대한 알지 못하게 해주겠다는 말이었다.
“알면, 복수하겠다고 나설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테니까요.”
그가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은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그도 조직이 나를 지원하는 게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먼저 황자, 아니 예비 황제를 만나야겠군.”
나는 다음 날 요하네스 황자를 만나러 갔다.
다행히 황자는 나를 만나주었다.
황자는 집무실 대신, 황제의 응접실에서 나를 맞이했다.
황자는 응접실 소파에 반쯤 누워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과 늘어진 몸.
분명 포션과 신관의 치유 능력으로 모두 치료되었다고 들었는데, 황자는, 다 죽어가는 모습이었다.
“내가 피곤해서 마물 왕을 쓰러뜨린 용사에게 감사도 못 한 것 같군. 원래 일어나서 제대로 인사를 해야 하는데, 몸이 이 모양이라……. 먼저 사과를 하겠소.”
“괜찮습니다. 감사는 받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도 계약 대신 한 일이니까요.”
내 말에 황자는 묘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아무짝에 쓸모없는 계약 말인가.”
황자의 반대파들을 처리하는 대신 황자와 내가 한 계약은 ‘황자가 내게 적대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황자는 단순한 계약에 무척이나 의아해했다.
제국의 작위와 보물, 유물도 원하지 않고, 단지 적대하지 않는다는 계약이라니.
확실히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의아해할 만했다.
하지만, 나는 이 정도 계약이면 충분했다.
사실, 저 계약은 지독한 불평등 계약이었다.
포괄적인 계약이라 틈을 발견할 수 있기는 하겠지만, 어쨌거나 계약상으로는 그는 내게 적대하는 게 불가능했다.
내가 그를 적대하든, 죽이든 간에.
“그럼, 무슨 일로 온 건가?”
“황실 금고와 황실 도서관을 ‘관람’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나는 황자가 거절할까 봐 ‘관람’을 열심히 강조했다.
“그렇게 하게.”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황자는 대수롭지 않게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황자의 모습을 보니, 황실 금고에 있는 유물을 달라고 해도 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몸이 아픈 게 아니라, 살아가는 게 지친 것 같은 모습.
내가 걱정했던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충격이 작았던 모양이었다.
봉인지라도 끌고 다녀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황자가 입을 열었다.
“부탁을 들어주었으니, 내 부탁도 하나 들어주도록.”
“네?”
갑작스러운 황자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자가 부탁할 만한 게 없을 텐데?
내 표정을 보고, 황자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뭔가, 음모를 꾸미는 듯한 미소였다.
“형님의 칼을 맞는 바람에 나는 더는 후사를 이을 수 없다는군. 대를 이으려면 양자를 얻어야 하는데……. 나를 죽이려던 형의 자식들을 양자로 할 수도 없고.”
황자는 나를 가리켰다.
“제국의 영웅인 자네가 내 양자가 되는 게 어떻겠나.”
나는 황자의 개소리에 입을 딱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