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7화
제22편 검의 파편 (2)
카를로스 용사, 초대 왕의 기억에 들어갔을 때,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같이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검을 쥔 자의 기억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투구를 쓴 마물 왕에게 향할 때, 나도 그와 함께 마물 왕을 보고 있었고.
그가 마물 왕의 거친 숨소리를 들었을 때, 나도 그 소리를 들었다.
거기다, 온몸을 개미가 갉아대는 듯한 고통까지.
젠장, 죽고 난 뒤의 환상통 같은 극악한 통증은 아니었지만, 이 통증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런 고통에도 그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희로애락이 모두 사라진 인형 속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인간이 아니라, 골렘 안에 들어온 게 아닐까 생각했을 테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공허한 마음은 무척이나 익숙했다.
죽음을 반복하고, 고통을 이어갈수록 나도 이자와 점점 비슷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저 깊숙한 곳에 모든 감정이 묻혀 있었다.
세상을 뒤집을 분노도, 외로움도, 괴로움도 모두 마음 깊숙한 곳에 묻혀 있을 게 분명했다.
물론, 나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앞으로도 죽음을 계속 반복하면, 결국 다르지 않게 될 게 분명했다.
나는 거기서 계속 이어지는 생각을 멈추었다.
피부가 타들어 가는 고통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피니, 왜 이런 고통이 느껴지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마나의 충돌 때문이었다.
내가 빙의한 자도 세상의 마나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도 주변에 퍼져 있는 마나를 볼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마나가 내가 알고 있는 마나와 달랐다.
오염되고, 변형된 마나.
동물을 오염시켜 마물로 만드는 마물들의 마나가 허공에 가득했다.
맙소사.
이곳은 내가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거기다, 더 황당한 것은 내가 빙의한 자의 마나는 오염된 마나가 아니었다.
마물들과 다른 순수한 마나.
기사가, 귀족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나였다.
이런 오염된 마나가 가득한 세상에 있으니,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와 마물 왕이 있는 이 건물 안도 처음 보는 괴기한 모습이었다.
이곳은 거인 마물 왕도 여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거대한 홀이었다.
그 거대한 홀은 벽과 천장, 바닥까지 거대한 뼈들이 얼기설기 이어져 있었다.
뼈로 이루어지지 않은 곳은 없었다.
그가 앉아 있는 의자마저 뼈로 가공된 것처럼 보였다.
이 홀, 아니 건물 전체가 거대한 생명체의 뼈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홀을 가로질러 밖으로 향했다.
쿵. 쿵. 쿵.
뒤에서 마물 왕이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홀 입구의 문도 신기하게도 뼈로 만들어져 있었다. 넓적하고 평평한 거대한 뼈였다.
여기는 신화에 나오는 거북이라도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는 열린 문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그곳은 넓은 광장과 지평선이 보이는 평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밖에 나와 보니, 다른 세상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하늘이 검붉었다.
하늘에는 해 비슷한 것이 떠 있어, 낮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해의 색이 너무 붉고 어두웠다.
하늘에 떠 있는 해 때문인지, 하늘도 검붉고, 땅도 붉었다.
멀리 보이는 산도 검은 흙과 바위만 가득했고.
건물 앞 돌판들로 만들어진 광장 외에는 붉은 흙만 보이는 황무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은 정말 지독하게 붉고 어두운 세상이었다.
다만, 광장 너머에 펼쳐져 있는 황무지에는 지평선이 안 보일 정도로 마물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엄청난 숫자였다.
수만 마리, 아니 그 이상의 마물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내가 아는 마물들도 많았다.
처음 영지의 유적에서 본 마물, 봉인지에서 싸웠던 마물, 그리고, 왕국 내전 때 내가 죽였던 마물 왕까지.
그 모든 마물들이 광장 주위에 모여 있었다.
텅 비어 있는 광장에는 거대한 문양, 아니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공간 이동 때 보았던 진과 어딘가 비슷한 진이었다.
하지만, 크기는 완전히 달렸다.
수십 배 나 큰 진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원형의 마법진 외각에는 지팡이를 쥐고 있는 인간형 마물 수십 마리가 서 있었다.
기괴하게 마르고 늙은 고목처럼 보이는 인간형 마물들.
그들은 지팡이를 세우고,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나서자, 수만, 수십만의 마물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머리가 좋아 보이는 마물들은 고개를 숙였고, 흥분해 있던 마물들도 조용해졌다.
마물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마물 왕이 고개를 숙일 것으로도 예상했지만, 역시, 내가 빙의한 자는 마왕이었다.
거대한 마물일 거라는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광장에 펼쳐져 있는 진을 확인하고, 검을 쥔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마나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미친!
절로 그런 소리가 날 만한 거대한 것 마나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가 왜 마왕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주변 상황을 보면, 마왕이 분명했지만, 작은 인간 크기의 존재가 저 마물들을 장악하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퍼져나가는 마나를 보니 바로 이해가 되었다.
파파파파파팍.
그를 중심으로 허공에 거대한 스파크가 피어올랐다.
스파크가 건물을 덮고, 거대한 광장을 뒤덮었다.
광장 전체에 화려한 빛이 가득했다.
동시에, 마법진을 둘러싼 인간형 마물들의 입이 벌어졌다.
크아아아악.
그들 입에서 나온 것은 비명이었다.
마른 고목처럼 보이던 마물들의 몸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툭. 툭.
피부가 부서지고, 손가락이, 팔이 가루로 변했다.
마물들은 가루로 변해 마법진 속에 빨려 들어갔다.
동시에 허공에 가득한 스파크들도 마법진 안으로 빨려들었다.
마왕이 풀어놓은 마나가 마법진 안으로 스며든 것이다.
쿠우우우웅.
마나가 빨려 들어가자, 광장을 메운 마법진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법진 중앙, 광장 중앙에 검은 구멍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허공에 생겨난 구멍이 점점 커졌다.
구멍이 커지면서 온통 검은색 일색이던 구멍 속에 작게 반짝이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건 별이었다.
그리고, 구멍 안에 보이던 검은 공간은 밤하늘이었다.
저 별들, 그리고, 별자리는 나도 본 적이 있었다.
봉인지에서 본 밤하늘의 별들이었다.
밤하늘을 보고, 나는 지금 이 기억이 어떤 기억인지 알게 되었다.
이 기억은 마왕의 기억.
마왕이 마물들을 이끌고, 우리 세상으로 넘어오는 순간의 기억이었다.
내가 그것을 깨닫는 순간, 시야가 다시 흐려지기 시작했다.
기억이 끝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지금껏 아무 말도 없었던 마왕이 입을 열었다.
마왕은 구멍 속의 밤하늘을 보며 말했다.
“정말 오래 걸렸다. 이제 돌아간다. 집으로, 고향으로, 제국으로.”
그의 말은 나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의 말이 고대 제국어였기 때문이었다.
말을 하는 순간, 처음으로 그의 마음속에 감정이 휘몰아쳤다.
회한과 분노. 슬픔과 기쁨, 온갖 감정이 솟구쳤다가 가라앉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기억에서 튕겨 나왔다.
“괜찮아요?”
눈을 뜨니, 발레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직, 마물의 머리에 서 있었다.
시간도 얼마 지나지 않은 듯했다.
그런데도 발레아가 옆에 있는 것을 보니, 그녀는 빛이 터져 나온 것을 보고, 한걸음에 이 위로 올라온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별것 아닙니다. 잠깐, 이 검 조각으로 과거의 기억을 보았을 뿐입니다.”
내가 손에 들린 검 조각을 보여 주자, 발레아가 눈을 흘겼다.
“별것 아니긴요. 방금 완전히 의식을 잃고 아래로 떨어질 뻔했는걸요.”
급하게 올라온 발레아가 잡아주어서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발레아에게 다시 감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발레아와 대화를 끝내고, 나는 검 조각을 조심스럽게 들고 아래로 내려왔다.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투레 백작이 물었다.
“괜찮나? 아니, 그게 뭔데 그러는 건가.”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그는 들을 자격이 있었다.
“마왕이 쓰던 검의 조각입니다.”
“검 조각? 그렇게 작은 검을 쓰는 마물도 있는 모양이군……. 아니 잠깐, 마왕이라고?”
내 말에 투레 백작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마왕의 검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았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가 가끔 유물의 기억을 읽을 때가 있습니다. 방금, 이 검 조각에서 침공 당시 마왕의 기억을 읽었습니다.”
내 말에 투레 백작은 놀란 눈으로 나와 검 조각을 쳐다보았다.
사실, 내 능력까지 투레 백작에게 말할 이유는 없었다.
그가 들을 자격이 있다고 해도, 꼭 들려줄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그에게 말해 준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조금 전 보게 된 마왕의 기억 때문이었다.
공간 이동 비슷한 진을 만들어 세상 사이에 구멍을 뚫은 것도, 세상을 덮을 것 같은 그 대단한 마나도 놀라웠지만,
내가 제일 놀란 것은 마왕의 신분이었다.
그의 마나는 마물과 달리, 깨끗한 마나였고, 그의 육체는 인간의 육체였다.
그는 고대 제국어를 할 줄 알았고, 인간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마왕은 마물이 아니었다. 마물 왕도 아니었다.
그는 인간, 고대 제국인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물들의 세상으로 가게 되었던 고대 제국인.
그가 마왕이 되어 돌아와 대전쟁을 일으켰고, 고대 제국을 멸망시킨 것이다.
조금 전까지 나는 마왕은 단지 훨씬 더 강한 마물 왕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마물이니, 마물 왕들을 쓰러뜨리고, 모두와 함께 나중에 나타난 마왕을 쓰러뜨릴 계획이었다.
그래서 아이샤 공주를 여왕으로 세우고, 요하네스 황자를 새로운 황제로 세우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마왕이 인간 그것도 고대 제국인이라니…….
동화책도, 역사책에도,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
어떻게 고대 제국인이 마왕이 되었는지 이해가 안 되었지만, 어쨌거나 상대가 인간이라면 당장 계획을 바꿔야 했다.
그러기 위해, 먼저 그가 누구인지, 그 당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아야 했다.
다행히도 물어볼 사람이 앞에 있었다.
“기억에서 본 마왕은 인간, 고대 제국인이더군요. 이것에 대해 혹시 아시는 것 없습니까?”
내 말에 투레 백작은 표정을 굳혔다.
“정말, 기억을 본 게 맞군.”
역시, 투레 백작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그 이상 알지 못했다.
“나도 언뜻 들었을 뿐이네. 더 아는 게 없네. 대신 아는 사람을 소개해 주겠네.”
그래도 다행히, 거기서 끝은 아니었다.
다만, 투레 백작이 소개해 준 사람은 내 예상과 너무 달랐다.
다음 날 밤, 내 방에 찾아온 손님은 ‘조직’에서 온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