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6화
제21편 검의 파편 (1)
마물 왕의 팔을 자르고, 한 시간 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내 앞에 높인 거대한 투구를 바라보았다.
“끝난 건가?”
다행히 투구는 움직이지 않았다.
타오르던 눈도 굳게 감겨 있었고, 그르렁거리던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반대쪽에 누워있는 마물 왕의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난리를 치던 몸이었는데, 이제야 조용해진 것이었다.
그 오랜 싸움 끝에 드디어, 마물 왕이 멈춘 것이었다.
마물 왕이 회복 능력을 잃고, 팔 하나를 잃은 뒤, 싸움은 금방 끝날 것 같았다.
하지만, 회복 능력을 거의 잃고, 팔 하나가 잘려 나간 마물 왕이었지만, 마물 왕은 마물 왕이었다.
마물 왕은 한쪽 팔로 걸리적거리는 기사들을 쓸어버리고, 내 공격을 한참 동안 막아냈다.
기사들이 쓸려나가는 것을 보고, 투레 백작이 다시 끼어들었다가 마물 왕이 휘두르는 창자에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고,
나도 중간에 마물 왕에 깔려 온몸이 터져나갈 뻔했다.
위험할 때도 많았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결국 마물 왕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던져오는 창자를 잘라버리고, 양쪽 발목을 터트리고, 심장과 허파를 베어버린 뒤, 거인의 목을 자르는 데 성공한 것이다.
황당하게도 마물 왕은 허파가 박살 나도, 심장이 잘려 나가도 움직였다.
저 거대한 몸이 굴러다니는 바람에 나도 몇 번이나 깔릴 뻔했다.
그렇게 굴러다니는 몸을 피해 가며 겨우 마물 왕의 목을 자르니, 이제야 마물 왕이 움직임을 멈춘 것이다.
움직임이 멈춘 마물 왕을 보고 있으니, 뒤에서 사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쓰러뜨렸군.”
쩔뚝이는 발소리와 함께 들려온 목소리. 투레 백작이었다.
그는 한쪽 팔로, 검을 지팡이 삼아 쩔뚝이며 다가왔다.
그는 팔이 잘려 나간 뒤에도 다시 한번 싸움에 뛰어든 덕에 다리에 큰 상처를 입게 된 것이었다.
아예 잘리지는 않았지만, 신검으로도 치료가 되지 않는 것을 보니, 앞으로도 백작은 다리를 절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백작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반대로 뭔가 후련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는 잘린 투구를 보며 내게 말했다.
“아까, 내가 왜 왔냐고 물어봤었지?”
나는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이 끝났으니, 황궁의 일을 기다리며 백작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그건, 자네가 마물 왕과 싸우는 것을 보고, 내가 처음에 왜 기사가 되기로 했는지 떠올렸기 때문이야.”
과거를 더듬고 있어서일까?
백작의 표정이 아련해졌다.
“내가 어렸을 때, 예언가님이 찾아와서 내게 말했지. 내가 이 나라의 손꼽히는 기사가 될 거라고. 나는 그때, 나 자신에게 맹세했어. 제국을 지키는 기사가 되기로.”
아는 사람이 나오는 바람에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 뒤에 열심히 살아와서 예언가님의 예언은 지키게 된 것 같지만, 내 맹세는 제대로 지키지 못했지.”
다행히 백작은 자기 이야기에 빠져 내가 시선을 피한 것을 알지 못했다.
“예언을 지키기 위해 살아온 덕에 나는 황실에 충성하는 것으로 제국을 지킨다고 생각했던 걸세.”
“하지만, 아니었어. 새 황제의 말을 따라, 마물을 수도에 끌고 오는 것도, 동생을 죽이기 위해 비밀 통로로 향하는 것도 제국을 지키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 테니.”
“두 형제 중 누가 황제가 되건 상관없어. 마나를 가진 기사는 제국을 지키기 위해 마물을 쓰러뜨리면 되는 것이니까.”
그는 회한을 모두 털어내듯 이야기를 쏟아내더니, 나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왜 그러나?”
“아닙니다.”
나는 바로 표정을 바꾸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예언자를 죽인 사람이 나라는 것을 들킬 수는 없었다.
공국 성벽 앞에서 그를 놀린 사람이 나라는 것도.
온몸을 다치면서도 죽을 각오를 하고 나를 도와준 사람이었다.
이번만큼은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백작은 금방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멀리, 제국 수도 방향.
와아아아아아!
멀리, 함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먼 거리였지만, 분명 수도에서 사람들이 내지르는 소리였다.
흐릿하게 보이는 성벽 위로 병사와 기사들이 창을 흔들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모두, 마물 왕이 쓰러진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백작이 그 광경을 보며 말했다.
“제국의 새로운 영웅이 탄생한 것인가.”
영웅? 무슨 소리지?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백작은 재미있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마물 왕을 쓰러뜨렸지 않은가. 나와 기사들이 도와주었지만, 따지고 보면 자네가 혼자 잡은 거지.”
그건 맞았다.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이 마물 왕은 내가 쓰러뜨렸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제국 수도 앞에서 홀로 마물 왕을 잡았는데, 이게 영웅이 아니면 뭐겠는가.”
하지만, 투구로 얼굴을 가렸으니, 내가 누군지 알 수 없을…….
이런,
생각해보니 투구는 예전에 박살 났었다.
저 성벽 위에 있는 기사 중에는 사절단으로 왔던 나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을 터였다.
나는 혀를 찼다.
이래서야 황자를 뒤에서 돕는 얼굴 없는 용병 A 역할은 무리였다.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환호는 계속 이어졌지만,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나는 그렇게 복잡해진 머리로 투구를 바라보았다.
마물 왕의 머리가 들어 있는 내 몸보다 더 큰 투구.
나는 대검을 꺼내 들었다.
“뒷일은 뒤에 생각하고…….”
당장은 마물 왕이 왜 투구를 쓰고 있었는지 알아봐야 했다.
나는 대검에 마나를 가득 불어넣고, 투구를 내려쳤다.
쩍.
투구가 반으로 갈라졌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아무리 유물이라지만, 수리도 없이 저 마물의 머리에서 수백 년을 버틸 리 없었다.
분명 어디선가 마나를 공급받아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을 터였다.
당연히, 그 어디는 투구를 쓰고 있는 마물 왕일테고.
마물 왕이 죽었으니, 투구는 이제 오래되어 낡은 유물일 뿐이었다.
투구가 갈라지자, 그 안에 있던 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독하군.”
옆에서 들려온 백작의 말처럼 잘린 머리는 정말 지독하게 망가져 있었다.
분명 처음에는 사람 형태의 얼굴이었던 것 같았지만, 수많은 상처가 뒤덮인 얼굴은 더 이상 인간 형태의 얼굴이라고 부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빨과 턱뼈가 반쯤 드러나 있었고, 두개골도 깨져서 뇌 일부가 보일 정도였다.
아무래도 투구는 저 겉으로 드러난 일부의 뇌를 보호하기 위한 것인 것 같았지만,
내심 추악한 얼굴을 가리기 위한 것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어쨌거나 투구 안에는 별다른 게 없었다.
아쉬운 결과에 나는 몸을 돌리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번쩍.
마물이 눈을 떴다.
그와 함께 마물이 입을 벌렸다.
내 눈앞에서 마물의 입이 벌어졌다.
구더기가 들끓는 입안이 보이고, 지독한 냄새가 내 몸을 덮쳤다.
“위험……!”
백작의 고함이 들려오고, 동시에 나는 검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늦고 말았다.
콰과과과과!
내가 검을 뽑기 전에, 땅에서 솟구친 수많은 송곳이 마물 왕의 머리를 꿰뚫어 버린 것이었다.
마물 왕의 머리는 송곳들에 꿰어 위로 솟구쳤다.
내 뒤에서 발레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했어야죠! 방심하면 어떻게 해요!”
나는 검을 다시 넣고, 몸을 돌렸다.
내 뒤에 발레아가 다른 때와 똑같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은은한 미소를 띤 언제나의 모습.
하지만, 나는 그 모습 속에서 조금은 의기양양한 그녀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옆으로 손을 펼쳐, 그녀와 나를 감싸는 방음벽을 만들었다.
“수고했어요. 잘 끝내고 온 거죠?”
“네. 황제는 죽고, 황자는 무사해요.”
그녀의 말에 나는 슬쩍 옆을 쳐다보았다.
백작은 송곳에 꽤 뚫린 마물의 머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방음벽을 펼치자 백작은 알아서 시선을 피하는 중이었다.
확실히 발레아가 의기양양 할만했다.
내가 그녀에게 부탁한 것들은 평범한 것들이 아니었다.
황자를 지키고, 공격해 오는 모든 이들을 처리하라는 부탁이었으니.
다행히 황제를 처리할 수 있었지만, 운이 나빴으면, 발레아는 지금 내 옆에 있는 투레 백작과 싸워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추가로 부탁한 것도 전부 했어요.”
이어진 발레아의 말에 나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사실 혹시나 해서 부탁한 것이었는데, 설마,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
그녀에게 추가로 부탁한 것은 다른 게 아니었다.
목표를 한순간에 잃어버린 사람은 폐인이 되기 쉬웠다. 너무 쉽게 복수를 끝낸 황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발레아에게 황자를 지키는 것 말고도 한 가지 더 부탁했다.
미리 나서서 황제를 쓰러뜨리지 말고, 황자가 정신적으로 단단해질 시간을 주게 하라고.
발레아에게 설명할 때는 급해서 설명을 많이 줄이긴 했지만, 분명 발레아는 알아들었을 터였다.
그녀 말대로라면 황자는 무사하니까.
그런데, ‘무사’라는 것은 다치지 않은 게 맞겠지?
다시 걱정되었지만, 미소를 짓고 있는 발레아를 보니, 물어보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 돌아가서 확인해보면 될 터, 나는 물어보는 것을 포기했다.
발레아와 이야기를 마치고, 방음벽을 없애자, 때마침 백작의 말이 들려왔다.
“쇳조각인가? 저게 뭔지 모르겠군.”
백작의 말에 나도 백작이 보는 것을 쳐다보았다.
송곳에 꿰어 있는 마물 머리의 한쪽에 반짝이는 물건이 보였다.
금속처럼 보이는 물건이 깨진 두개골 사이에 밀려 나와 있는 뇌 가운데서 반짝이고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마, 발레아가 만들어낸 송곳에 뇌가 밀려난 덕에 뇌 속에 있던 물건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잠깐만요. 확인해볼게요.”
나는 다시 한번 마물 왕이 살아있는지 확인한 뒤에, 위로 뛰어올랐다.
턱.
머리 뒤에 올라 살펴보니, 반짝이는 물건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검 조각인데.”
반짝이는 금속은 분명 박살 난 검 일부분이었다.
마물 왕의 머릿속에 있었던 것이라면 분명 엄청나게 오래된 것일 텐데, 검 조각은 방금 만들어진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뇌에 묻혀 있는 검 조각을 뽑아 올렸다.
뽑아보니, 이 조각은 역시, 검날 일부분이었다.
처음 보는 문양이 새겨진 아름다운 검날.
나는 검날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오래된 유물이었지만, 그 아름다움은 세월을 비껴가는 것 같았다.
나는 점점 검날에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세상도 점점 어두워졌다.
멀리서, 발레아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설마, 죽은 건가? 함정이었나?’
세상이 어두워진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이 다시 환해졌을 때도, 메시지 창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내 앞에는 투구를 눌러쓴 마물 왕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게 보였다.
마물 왕은 내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아니, 내가 아니었다.
이 느낌은 전에 느껴본 적이 있었다.
기사의 검을 처음 잡고, 초대 왕의 기억에 빙의했을 때, 그때와 똑같았다.
나는 지금 마물 왕에게 인사를 받고 있는 자의 기억 속에 들어와 있었다.